너머의 산문

예술지상주의자의 변辯?/

너머의 새 2015. 9. 10. 11:26

예술지상주의자의 변辯?/강영은







고티에는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예술 자체 및 미(美)에 있으며, 도덕적 ·사회적 또는 그밖의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고 함으로써 예술의 자율성과 무상성(無償性)을 강조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했다. 소설 《모팽양(孃)》의 서문에서 그는 “무용(無用)한 것만이 아름답고 유용(有用)한 것은 모두 추악하다”고까지 극언하였다.


예술을 통하여 모든 외적인 제약에 대해 저항하여 주체의 자유를 성취하는 것을 예술지상 주의라고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모든 사물이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되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예술지상주의자들은 그러한 '이해관계'에 예술이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고 예술의 독자성을 부르짖는다.



때문에 예술지상주의는 낭만주의, 고답파, 상징파의 시대에 걸쳐 성행되었는데 실제적인 출현은 탐미주의(眈美主義), 악미주의(惡美主義) 등에서 나타났고, 현실에서의 도피적 경향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다. 작품의 내용보다 형식을 중시하는 형식주의도 이 예술주의의 입장에 선다. 작품이 표명하는 주제나 제재면에서 그만큼 포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경향이 그렇다고 예술가가 실제로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소설가 김동인을 들 수 있다. 그는 10년대 "인생을 위한 예술"(이광수, 최남선의 계몽주의)에 대해 부정적이던 태도를 "예술을 위한 예술"로 치환시킨다. 예술 자체가 목적이 되고, 비도덕적이고 패륜적이라 할지라도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이 표현될 때 그는 모든 것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경향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광화사와」 「광염 소나타」이다. 「광화사」에서 솔거는 눈 먼 소경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들여 절세의 미인을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마지막 눈동자를 그릴 수 없게 되자, 그는 광기에 휩싸인 채 그녀를 죽이게 된다. 그것은 미치광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백성수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일부러 방화를 일삼고, 그 불을 보면서 희열 속에서 작곡을 하게 되는 피아니스트란 자신이 생각한 아름다움을 위해 기성의 가치를 모두 일탈해 버린다. 물론 김동인의 가치관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소설 속 주인공처럼김동인이 방화범이나 살인자는 아닌 것이다.



이 말은 작품 속에서 예술로서의 주체적 자유가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이지, 예술을 창작하는 사람 자체가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도덕적 가치의 치외법권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규범이 행동의 당위적 명령이라면 예술이 그러한 당위적 명령에 속해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창작 행위가 어떠한 이유로든 제약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창작자가 어떠한 이유로든 제약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아무리 범법자라 해도 예술 행위를 함에 있어서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아야 된다는 말은 얼른 들으면, 예술의 자율성과 무상성(無償性)을 중요시하는 발언 같다. 그러나, 작품 속 세계와 현실 세계를 혼동하는 오류가 말 속에 들어 있다. 그것은 예술가와 작품을 동일시 하는 시각적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가는 작품이 아니다. 예술가이기 이전에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개인이 지켜야할 것은 있는 것이다. 사회에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개인의 사 생활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회적 악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수단과 목적이 바뀌는데에서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할 때, 자신을 합리화 하기 위해, 가장 유용하게 이용되는 논리가 바로 수단과 목적의 전치이다. 예술행위를 수단이라고 한다면, 예술 작품을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목적이 될 때 전치가 이루어진다. 예술행위가 목적이 되기 때문에 그 행위를 수행하는 예술가에게 면책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변이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