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반경환의 명시감상 66

너머의 새 2015. 9. 10. 11:50

벌레시인/ 강영은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 골 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

잠 안 오는 밤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

잘 벼려진 낫날이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를 헤집어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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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 평론가, 애지 주간

밤이란 밤나무의 열매이며, 지름 2.5~4cm의 크기로 짙은 갈색으로 익는다. 아시아, 유럽, 북아메리카, 북부 아프리카 등이 원산지로서 한국밤, 일본밤, 중국밤, 미국밤, 유럽밤 등이 있다고 한다. 일본밤은 알이 굵은 것이 특색이나 질이 단단하지 않아 가공용으로는 적당하지 않고, 유럽밤은 밤알이 다소 작고 질도 좋지 않아 가공용으로는 좋지 않다고 한다. 중국밤은 우리나라의 평양밤과도 같아서 알이 작고 단맛이 많아 군밤으로는 좋지만 해충에 약하고, 한국밤은 서양밤에 비해 육질이 좋고 단맛이 강한 것이 그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한국의 밤나무는 재래종 가운데 선별된 우량종과 일본밤을 개량한 품종이 대부분이고, 주로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에서 재배된다. 충청남도의 공주, 경상남도의 산청과 하동과 함양, 그리고 전라남도의 광양과 보성이 주요 산지이고, 8월 하순과 10월 중순 사이에 년간 약 10만톤을 생산하게 된다.

왜, 우리 한국인들은 이 밤을 그토록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는 것일까? 밤은 밤나무에서 아람이 번 것도 보기가 좋지만, 갓 수확해놓은 밤들은 짙은 갈색으로 윤기가 좌르르 흐르며 그 모양이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밤은 탄수화물, 지방, 칼슘, 단백질, 비타민 A, B, C 등이 들어 있는 가장 영양가가 풍부한 과일이며, 조율이시棗栗梨柿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한국인들의 제삿상에는 반드시 빼어놓을 수가 없는 과일이다. 특히 밤은 비타민 C가 들어 있어 피부미용과 피로회복, 감기예방 등에 효능이 있으며, 생밤은 비타민 C 성분이 알코올의 산화를 도와주어 술안주로도 좋다고 한다. 이밖에도 밤은 위장을 강화시켜주는 효소가 들어 있으며, 성인병의 예방과 신장 보호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나는 해마다 수십 년 이상을 알밤을 따거나 주우러 다닌 적이 있었다. 농사꾼들의 주요 수입원인 과수원 말고도 대한민국의 산천에는 야생의 밤나무와 전혀 가꾸지 않는 밤나무들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고,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그야말로 밤나무밭은 처절한 생존 경쟁의 장으로 바뀌게 된다.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이며, 더 많이 주울수록 최고의 선이다. 밤나무밭을 오래 다녀본 사람들은 꿈 속에서도 그 탐스러운 밤송이들이 우수수 쏟아지고, 그 까만 갈색의 밤들을 배낭 가득히 주워 담아오는 꿈을 꾸게 될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줏어온 밤을 한 소쿠리 가득히 삶아서 까먹거나, 늦은 저녁무렵 TV를 보면서 생밤으로 까먹기도 하고, 가까운 친지들과 나누어 먹기도 한다. 내가 그 ‘밤줍기’를 그만 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수많은 사람들과 두 눈에 불을 켜고 그 밤줍기 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더 많은 밤을 줏어야 한다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 어떠한 양심이나 양보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영은 시인은 제주도에서 출생했고, 2000년도에 {미네르바}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스스로 우는 꽃잎}과 {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등이 있으며, 아직은 이렇다 할 주목을 받아본 적이 없지만, 그의 시세계는 흙속의 진주처럼, 아니, 새로운 신세계처럼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는 ‘벌레시인’이며, ‘꿀꿀이 바구미’, 즉, ‘밤바구미의 시인’이다. ‘꿀꿀이 바구미’는 일명 ‘밤바구미’이며, 성충의 몸 길이가 약 9mm라고 한다 보통 연1회 발생하며, 성충은 8~9월에 나타난다. 이 성충은 보통 밤을 수확하기 20여일 전부터 산란을 시작하며, 긴 주둥이로 종피까지 구멍을 뚫고 들어가 과육과 종피 사이에 1~2개의 알을 낳는다. 밤나방의 유충과는 달리, 밤바구미의 유충은 배설물을 바깥으로 내놓지 않기 때문에, 밤을 수확해서 쪼개 보기 전에는 그것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밤바구미의 방제법으로는 밤을 수확한 직후, 메틸브로마이드로 밤을 훈증하고 토양 소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튼 강영은 시인은 ‘밤골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을 훔쳐다가 밤바구미처럼 그토록 달콤하고 고소하게 파먹은 추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의 벌레시인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추억을 되돌아 보고 있는 시이며, 그 추억의 시간을 통해서 현재라는 몽상의 시간을 노래하고 있는 시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주지적主知的인 시인답게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골 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라고, 그 첫째 연과 둘째 연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는 하필이면 ‘쓴다와 쓰다 사이’로 그 첫째 연을 시작하고 있는 것일까? ‘쓴다와 쓰다’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그는 그 ‘쓴다’와 ‘쓰다’의 차이점을 통해서 무엇을 들려주고자 했던 것일까? ‘쓴다’는 ‘쓰다’의 변형이며, ‘쓰다’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을 가리키고, ‘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황을 가리킨다.

‘쓰다’의 의미를 추적해보면 다음과도 같이 정리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붓, 펜 등으로 글씨를 그리다. 글을 짓다.

2, 모자 등을 머리에 얹다. 우산 등을 받쳐 들다.

3, 사람을 두어 부리다. 온 정신을 기울이다.

4, 머리를 써서 일하다. 힘이나 기술을 발휘하다.

5, 돈을 들이거나 없애다.

6, 연장, 원료를 사용해서 물건을 만들다.

7, 약을 먹이거나 바르다.

8, 묏자리를 잡아 시체를 묻다.

9, 윷놀이 등에서 말을 옮기다.

10, 맛이 소태와도 같이 쓰다. 맛이 없다. 마음이 언짢다.

다시 말해서, ‘쓰다’가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정황을 가리킨다면, ‘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황을 가리킨다고 할 수가 있다. ‘낫을 쓰다’와 ‘낫을 쓴다’의 차이, ‘손을 쓰다’와 ‘손을 쓴다’의 그 미묘한 차이점이 ‘쓰다’와 ‘쓴다’의 그 엄청난 차이점일는지도 모른다. 강영은 시인이 벌레시인에서 느닷없이 ‘쓴다와 쓰다’를 하나의 화두처럼 들고 나온 것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골 아저씨”와 “낫 놓고 니은자는 더 더욱 모르는” 밤골 아저씨가 그 익숙한 손놀림으로 밤을 따던 그 옛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밤골 아저씨가 그 익숙한 손놀림----그 잘 벼려진 낫을 사용하여---으로 수많은 알밤들을 까놓았기 때문이다. 그 밤골 아저씨는 때로는 낫을 쓰고, 또 때로는 낫을 쓴다. ‘쓴다와 쓰다’, 또는 ‘쓰다와 쓴다’가 하나의 화두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밤골 아저씨가 사용하던 낫 때문이고, 그리고 그 ‘쓰다와 쓴다’의 차이점은 낫과 유사한 ‘ㄴ’의 유무에 있다. 낫은 그 놓는 위치에 따라서 기역자(ㄱ)와도 같고, 니은자(ㄴ)와도 같다. 낫 높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도 일자무식을 가리키고, 낫 놓고 니은자도 모른다는 말도 일자무식을 가리킨다. 밤골 아저씨는 낫 놓고 기역자는 물론, 낫 놓고 니은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낫날이 잘 벼려진 낫만큼은 어느누구보다도 더욱 더 잘 사용할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쓴다’와 ‘쓰다’의 차이점을 강조하는 시인이 너무나도 지적이고 현학적인데 반하여, 낫 놓고 기역자는 물론, 낫 놓고 니은자도 모르는 밤골 아저씨는 무식하고, 또 무식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영은 시인은 “잠 안 오는 밤”, 그 옛날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낫 놓고 니은자는 더 더욱 모르는 밤골 아저씨’와 그 밤골 아저씨의 잘 벼려진 낫을 생각하며, 그 아저씨가 까놓던 알밤들을 훔쳐먹던 추억을 떠올려 본다.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라는 시구는 밤이 똑 고르지 못했고, 또 밤을 까기가 매우 힘들었지만, 그러나 그 맛만큼은 매우 좋았다는 뜻으로 풀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밤골 아저씨의 밤나무는 일본산 개량종이 아니고, 한국산 토종 밤나무이다. 한국산 토종 밤은 그 맛이 매우 뛰어나기는 하지만, 그 크기가 작고, 또 밤송이를 까는 것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벌레시인의 시적 공간은 가을이며, 그 시간대는 ‘잠 안 오는 밤’이다. 강영은 시인은 잠 안 오는 가을밤에, 그의 고향인 제주도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며, 그 밤골 아저씨의 밤을 훔쳐먹던 시절을 떠올려 보고 있는 것이다.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라는 시구가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그 고소하고 달콤한 밤맛을 음미하면서도 어느덧 그의 가슴 속에는 죄의식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다.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가 그것이고, “쓰다와 쓴다 사이에 놓여있는/ 잘 벼려진 낫날이/ 일몰의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 속에서/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가 그것이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고, 낫 놓고 니은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이기는 했지만, 그토록 성실하고 성실했던 그 아저씨의 밤을 훔쳐 먹었기 때문에, 그 아저씨의 시퍼런 낫에 손을 베인다는 표현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 죄의식 때문에, “일몰의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 속에서/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라는 표현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도둑질’은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훔치는 것을 말하고, ‘서리’는 여럿이서 콩, 닭, 수박, 과일 등을 훔쳐다가 먹는 것을 말한다. 도둑질은 범죄행위이고, 서리는 청소년들의 짓궂은 장난이다. 도둑질과 서리는 엄연히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때로는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고 서리 역시도 타인들의 물건을 훔치는 짓이라는 점에서는 도둑질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강영은 시인은 그의 친구들과, 또는 그의 오빠와 언니들과 함께, ‘밤골 아저씨’의 밤을 훔쳐다가 먹은 전과(?)가 있고, 따라서 그의 윤리의식은 밤골 아저씨의 잘 벼려진 낫날에 손을 베이는 환영에 잠기기도 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을 ‘꿀꿀이 바구미’, 즉, ‘벌레시인’이라고 단죄를 하기도 한다. 얼마나 많은 밤을 훔쳐다가 먹었으면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손목을 베이는 환영에 잠기고 있는 것이며, 또한 얼마나 많은 밤을 훔쳐다가 먹었으면 “쓰다와 쓴다 사이에 놓여있는/ 잘 벼려진 낫날이/ 일몰의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 속에서/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내다”라는 시구에서처럼, 그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내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쓰다’와 ‘쓴다’의 주체자는 밤골 아저씨이며, 그는 잘 벼려진 낫으로 그 잘 익은 밤송이들을 까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 잘 벼려진 낫으로 그의 알밤들을 훔쳐간 밤도둑들을 단죄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쓰다와 쓴다’의 진정한 주체자는 그 ‘밤서리의 추억’을 토대로 해서, 벌레시인을 쓰고 있는 강영은 시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머리도 플라톤이고 꼬리도 플라톤이라는 말이 있다. ‘쓰다’와 ‘쓴다’의 미묘한 차이점을 발견한 것도 시인이고, 밤골 아저씨와 그의 잘 벼려진 낫날을 떠올린 것도 시인이다. 맛이 좋은 알밤들을 생각해냈던 것도 시인이고, 잘 벼려진 낫날에 손목이 베이는 환영을 연출해냈던 것도 시인이다. 그리고 도덕 감각과 양심의 가책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꿀꿀이 바구미로 단죄했던 것도 시인이고, 자기 자신을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시인”이라고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 것도 시인이다. 시인은 독창적인 명명자이며, 새로운 가치의 창조자이고, 그는 오직 단 하나 뿐인 전제군주인 것이다. 그가 자기 자신을 단죄하거나, 칭찬을 하거나,혹은 도둑질을 미화하거나, 도둑질을 비난하거나간에, 그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그는 그의 시를 통해서 이 세상을 찬양하고, 자기 자신을 더욱 더 찬양한다. 시는 시인의 삶의 터전이며, 그의 비옥한 텃밭이다. 그 비옥한 텃밭에는 언어의 씨앗이 싹트고, 언어의 꽃이 피고, 언어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그 열매의 이름은 사상과 이념, 그리고 개념 등과도 같은 열매들이며, 그 열매들의 영양가는 우리 인간들의 건강을 지켜준다. 시는 행복한 삶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쓰다와 쓴다’의 주체자는 밤골 아저씨가 아니고, 시(언어)를 쓰는 강영은 시인인 것이다.강영은 시인의 벌레시인은 궁극적으로는 그의 윤리의식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단죄하고 있는 시가 아니다. 그의 단죄의식은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결형 어미가 시퍼렇게 달려든다
날카로운 날에 손을 베인다


라는 시구와,


쓰다와 쓴다 사이에 놓여있는
잘 벼려진 낫날이
일몰의 붉은 혀가 삼킨 밤 껍데기 속에서
꿀꿀이 바구미를 토해낸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시인이다


라는 시구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고달프고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지나간 과거의 추억들은 그 모든 것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밤골 아저씨의 알밤들을 훔쳐다가 밤새도록 그 알밤들을 파먹은 벌레시인이라고 하면서도 그 단죄의식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 오히려, 거꾸로, 그 옛날의 행복했던 추억에만 더욱 더 잠겨 들어가게 된다. ‘쓰다와 쓴다 사이’, 잘 벼려진 낫날에 손이 베이고, 그 잘 벼려진 낫날에 꿀꿀이 바구미처럼 그 모든 것을 토해내게 되었어도 ‘나는 더욱 더 행복한 벌레시인이다’라는 좀더 대범한 역설이 그의 벌레시인의 행간 속에는 담겨 있는 것이다. 벌레는 매우 부정적인 말로서, 곤충이나 기생충과도 같은 하등생명체들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른 한편, 일
벌레, 돈벌레, 공부벌레처럼, 자기 자신의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인간을 가리키기도 한다. 벌레의 일차적 의미는 하등생명체들이고, 벌레의 이차적 의미는 그 하등생명체에서 비롯된 못된 인간들이다. 벌레와도 같은 인간은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간이며, 벌레와도 같은 인간은 공동체 사회로부터 추방되어야만 하는 인간이다. 따라서 이처럼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벌레시인이다’라고 선언해버린 강영은 시인은, 그러나 그 벌레의 꿈을 통하여 타인의 시선과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그 벌레의 행복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벌레는 벌레의 삶이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인간의 삶이 있는 것이다. 벌레는 벌레의 행복이 있는 것이고, 인간은 인간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벌레도 맛 있고 달콤한 열매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며, 인간도 맛 있고 달콤한 열매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그 어느 누가 하등생명체이며, 그 어느 누가 더 도덕적인 생명체란 말인가?

오오, 그토록 달콤하고 행복한 벌레시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