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진흙 스프*

너머의 새 2015. 9. 10. 11:51



진흙 스프*/ 강영은


그녀는 그때, 넘실거리는 가스불의 긴 혓바닥을 조절하며 수프 냄비를 휘젓고 있었어요 수프 냄비는 아주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어요 엄마, 저 수프 좀 봐, 수프가 넘치고 있어요, 발 돋음 한 채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가 소리를 질러요 창 너머 흙의 붉은 살점들이 뭉그러지고 있었는데요 발가락까지 드러난 나무들이 무너지려는 몸을 가까스로 버티고 있었는데요 저런 수프가 무척 먹고 싶은 게로구나, 조금만 참으렴, 그녀가 호호 웃어요

창 넘어 크고 작은 바위 덩어리와 뿌리째 서 있는 나무들이 소용돌이치며 잘게 부서지고 있었는데요 엄마, 저 수프는 누가 끓인 거야? 아이가 그녀의 치마폭으로 달려들어요 잘게 부순 식빵 조각을 넣고 이제 곧, 따끈따끈한 수프를 먹으려던 참 인데요 수프 속에 네모난 식빵 조각을 넣기도 전에 끈적끈적하고 검은 수프가 피비린내를 풍기며 쏟아져 내려요

수프를 먹는 스푼처럼 공중에 떠 있는 채 그녀도, 그녀 아이도 수프 속의 건더기가 되고 말았는데요 수프를 만드는 그토록 많은 그녀들도 모두 수프가 되고 말았는데요 수프 속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입이 지옥의 입구처럼 벌어져 있어요 사람들을 통째로 집어 삼킨 저 말랑말랑한 입이라니! 스피노사우르스*의 이빨처럼 정말이지, 저렇게 커다란 입을 가진 수프를 끓인 손은 누구의 손일까요?


*집중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최대 3천명이 숨지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필리핀 중부 레이테 섬 의 기온 사우곤 마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플로렌시오 비라톤 씨는 “쾅!쾅!쾅! 마치 헬리콥터 굉음 같았다”고 사고 당시를 회상했다.“산이 무너졌다”는 아내의 말을 듣기가 무섭게 수프 처럼 흘러내려온 진흙과 바위, 나 무 조각들에 집이 무너져 내렸다고 그는 공포스러웠던 상황을 설 명했다. - AP 통신- )
창작21 가을호, 한국시인협회 사화집(생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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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람 2008년 여름호 기획특집 "물길과 삶길" 중에서/ 박옥춘




동화적 상상력이 동원된 <진흙 수프>는 아이의 목소리를 통해 종말론적인 광경을 평쳐보인다. 집중 호우로 인한 산사태로 삼천명 이상 사망, 실종된 필리핀 중부 레이터 섬마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시는 생태 환경의 문제가 한 나라에 국한 된 일이 아니며 , "따끈따끈한 수프"를 먹는 대신 "끈적하고 검은 수프"를 먹어야 할 때가 가까이 이르렀음을 경고 하고 있다. "엄마, 저 수프는 누가 끓인 거야?" 하고 묻는 아이의 물음에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시커먼 입"은 산사태로 무너진 흙더미가 아니라 인간들이 쌓아올린 "지옥의 입구"며, 인간들이 생산한 "스피노사우르스"다. 책임의식을 촉구하는 물음이 다시 주어진다. "저렇게 커다란 입을 가진 수프를 끓인 손은 누구의 손일까요?"

지젝은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상징적 질서가 '중재하고' 조작하는 실천에 맞서는 "실재의 응답' 이라고 결론지으며, 위기에 관한 전형적인 반응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실재와의 대면을 회피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오직 실제적인 위험 때문에 자연과 인간을 성찰하는 일은 옳지않으며, 위기에 대한 적절한 유일의 태도는 자연- 인간의 간격(실재계- 상징계)을 인간 조건의 규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에 속하는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튕겨져 나온 균열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생태학적 응답이 갖고있는 강박적 사고- "죽을 지경으로 병든 자연"으로서의 인간이개입함으로써 엉망이 되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연의 균형"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날 때에야 위기를 직시하고 지혜로운 해결방안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박옥춘(명지대 문창과 박사과정)/2005년<문학사상>평론부분 신인상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