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상처, 또는 몸의 기억 /마경덕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 구렁이」
초록 상처, 또는 몸의 기억
마경덕
강영은 시인의 시들은 ‘젖다’ 와 ‘움직이다’로 다가온다. 시를 따라가 보면 빗소리와 짐승의 울음과 곤충의 날갯짓 소리가 들린다. 65편의 시들은 시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점질(粘質)로 끈적거린다. 그녀의 시들은 한시도 멈추지 않고 살아 꿈틀거린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낭랑한 매미울음이 들려오고 이어 밤벌레가 꼬물고물 기어간다. 시인은 자연을 한 상 걸게 차려 내놓는다. 편편이 그득 담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산뜻하고 후련하다. 강영은 시인은 시에 질질 끌려가지 않는다. 시를 빚는 솜씨가 세련되고 노련하다. 시인의 손에 닿으면 잠자던 시가 개구리처럼 펄쩍 뛰어오른다.
경칩날 아침, 이슬비 내린다
방울져 내리는 빗방울 바라보다
와, 개구리 알이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둥글고 말간 알들이 송알송알 내린다
동그라미가 툭 툭 터지는 것이
올챙이 투명꼬리 터지는 것 같다
바람이 헤적일 때마다
꼬리를 살랑이는 투명 올챙이
앞다리가 쏙, 뒷다리가 쑥,
땅바닥을 딛고 튀어 오른다
땅바닥이 넙죽 네 다리를 벌린다
하늘과 땅이 포개어진다
경칩날 아침, 어디서 개구리가 운다
개구리 한 마리보이지 않는데
봄이 온다, 봄이 온다, 내가 운다
천지가 연못이다
-「투명 개구리」전문
이 시를 읽으며 봄비에 충분히 젖었다. 아니, 둥글고 말간 개구리알들이 송알송알 터지는 소리에 젖었다. 봄비는 투명한 개구리알, 마른 논으로 철철 빗물이 몰려가고 봄이다, 봄. 천지가 연못이다. 화자는 빗소리도 따라 개구리가 되어 운다. 땅바닥이 넙죽 네 다리를 벌리고 하늘과 땅이 포개어진다. ‘젖다’와 ‘움직이다’가 만나 멋진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다.
시인이 즐겨 사용한 것들은 매미, 벌레, 가시거미, 장수하늘소, 개구리, 코알라, 까치, 누, 비단구렁이, 개미, 잠자리, 산낙지, 박쥐 등이다. 강영은 시인의 시들은 다분히 동물성이다. 식물성인 몇 편의 시들마저도 산우(山芋) 라고 불리는 마처럼 끈기가 있다. 자연과 시의 접목 또한 일품이다.
잠자리 한 마리 풀잎 끝에 앉아 있다
가느다란 발목이 흔들리는 날개를
꽉 붙들고 있다
잠자리가 붙들고 있는 것은
바닥에 닿으려는 마음일지 모른다
흙냄새 향한 간절함으로
풀잎처럼 땅에 뿌리박고 싶은 것이다
일평생
바닥을 딛지 않고 살아가는 것들에게
어찌 무거움만이 닻이라고 할 것인가
소슬바람과 햇살도
제 각각의 무게로 닻을 내리는
풀잎 끝,
잠자리 한 마리
날아갈 듯
높아진 하늘을 내려놓는다
참으로 멋진 한 판 뒤집기이다. 바람과 햇살도 무게가 있는 법, 어찌 무거움만이 닻이랴. 제 각각의 무게로 닻을 내리는 곳이 풀잎 끝이다. 잠자리 한 마리가 날아갈 듯 높아진 하늘을 내려놓는다. 시인이 하늘을 내려놓는 순간, 무릎을 탁 쳤다. 몸속에 깃든 감각들을 섬세하게 짚어내는 역설, 이 얼마나 발칙하고 즐거운 상상인가. 감히 하늘을 내려놓다니.
무거운 닻은 정박을 위한 도구이다. 우리는 쇠로 만든 닻에게 이미 길들여져 있다. 닻이 있어야 할 곳은 출렁이는 물속이거나 깊은 바다이다. 딛지 못할 곳에 닻은 내려진다. 그러나 강영은 시인은 풀잎 끝에 닻을 내리고 하늘을 끌어내렸다. 이처럼 유쾌한 상상이 시의 맛을 돋운다. 밤새도록 밤을 파먹은 벌레처럼 시인은 잠 안 오는 밤, 맛있게 시를 파먹는다. 작시법(作詩法)을 보면 시인은 수백만 마리의 누 떼가 먹이를 찾아 대평원을 흔들며 달리듯 시를 찾아 달려간다.
먹이를 찾아가는 수백만 마리의 누(gnu)* 떼가
대평원을 흔들며 달리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와 드럼통 같은 몸뚱어리를 떠받치고
가느다란 두 다리가 함께 달린다
날카로운 이빨에 맞서는 것은
기우뚱거리는 발목의 힘뿐이지만
그 가느다란 끈이
서로의 발자국을 묶어주면서
건기를 지나
풀이 무성한 우기로 대평원을 운반한다
구르고 나뒹굴며 생의 행간을
지나는 길
누가,
누가 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긴 문장을 완성하는 누 떼의 행렬 사이
누에게 길을 묻는
햇빛의 발자국이 간간이 섞인다
-「작시법 作詩法」전문
누의 몸을 지탱하는 건 기우뚱거리는 발목의 힘뿐이지만 그 발목의 힘이 악어의 이빨에 맞서며 강을 건너간다. 건기를 맞아 초지를 찾아 대이동을 하는 그 가느다란 발목들이 무리를 이루고 대평원을 횡단한다. 시인은 풀이 무성한 우기로 대평원을 운반한다고 했다. 대평원을 운반하는 건, 역시 발목의 힘이지만 삶은 녹록치 않아 구르고 나뒹굴며 생의 행간을 지나야 한다. 시를 찾아가는 길도 이와 같을 것이다. 이 험한 길을 누가, 누가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누는 이중적인 장치를 깔아두었다. ‘폐를 끼치다’의 누(弊)로도 읽힌다. 집안에 누군가 시인이 있다면 가족에게 적잖은 누를 끼치는 일이다. 혼자 잠들어야 하는 남편, 또는 아내는 시에 빠진 시인을 원망했을 것이다. 밤새 밤벌레처럼 시를 파먹은 시인도 시인이 아닌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을까?
좋은 시를 찾으려면 목숨을 걸고 질주하는 누처럼 시를 찾아 달려야 할 것이다. 문학이라는 대평원을 향해 시인이라면 어찌 누가 되어 달리지 않으랴. 시작법도 역시 누 떼를 동원시켰다. 대평원으로 수백만의 누 떼를 몰고 가는 건 시인이다. 밤새 긴 문장을 완성하는 사이 날은 밝아오고 불면의 행간 사이로 햇빛의 발자국이 뛰어든다.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일어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망에 희망을 덧칠하는 초록의 음모에서 나를 구해주세요 제발 내 몸의 비단 옷을 벗겨주세요 꼬리에서 머리까지 훌러덩 벗어던지고 도도히 흐르는 검은 강,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어요
-「녹색비단 구렁이」전문
이번 시집의 표제시인「녹색비단 구렁이」는 어머니를 향한 독백이다. 또한 화자가 자신에게 이르는 전언(傳言)이요 바람이다. 여기서도 시인에게 내재된 넘치는 끼를 볼 수 있다.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시들은 똬리를 틀고 태어나지 않는다.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려면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강물을 세상으로 퍼 날라야 한다.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는 잠재된 슬픔을 불러내지 못한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몸은 젖지 않는다. 천둥 치고 비가 내려야 한다. 녹색비단구렁이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음모일 뿐 초록은 이미 희망이 아니다. 허울 좋은 비단옷을 벗어버리고 ‘깊이 모를 슬픔으로 꿈틀대는 한 줄기 물길이고’ 싶다는 시인은 심연에 잠재된 심미적 감각을 처연하게 토로하고 있다.「녹색비단 구렁이」는 시인의 열망이 아름답고 힘차게 표현되었다. 마치 커다란 뱀에게 몸을 조이듯 강한 힘이 느껴진다.「허공 모텔」에서도 유형(類型)의 성질이 눈에 띈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자을 수 있으리
-「허공 모텔」부분
거미는 허공에 집을 짓지만 그 집은 죽음의 집이다. 장수하늘소를 끌어들여 거미줄로 친친 동여매고 싶은 거미는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에 깊은 잠을 풀어놓는다. 매일 줄을 타야하는 삶, 거미줄 모텔은 불안한 집이다. 장수하늘소 같은 그 사내, 모자도 신발도 잃어버리고 돌아갈 길 아주 끊어지면 거미는 사내의 몸에 시를 슬고 끝내 가볍게 날아오를 것이다. 강영은의 시들은 대부분 허상이 아닌, 실존의 몸체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시인의 잠재의식의 세계이다. 시인의 내면에는 끓어 넘치는 열정과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 들어있다. 시인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냄새를 맡고 시를 정확하게 포획한다. 적중률이 높은 놀라운 사냥법이다. 또 한 편의 시를 주목해본다.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 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오래 남는 눈」전문
뒤꼍은 유년의 기억이 숨 쉬는 곳, 유년기와 사춘기를 건너 온 곳이다. 회초리를 피해 달려간 은신처다. 종아리를 맞고 뒷담에 기대어 흐느끼던 아이는 아직 그 뒤꼍을 기억한다. 아이의 울음을 받아먹고 키가 자란 눈 젖은 대밭도 있고 휘청거리는 대숲 그림자에 간담이 서늘한 아이도 아직 그 자리에 있으리라. 뒤란은 볕이 잘 들지 않는 곳, 시인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어둑하고 은밀한 비밀이 자라고 있다. 뒤꼍이 있어 한 남자의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뒤꼍은 해가 들지 않는 그늘이요. 아픔이다. 그러나 그 상처는 시를 쓰게 하는 시인의 힘이다. 아름다운 상처 없이 어떤 시를 쓰랴. 강영은 시인의 손에 들면 어떤 것도 살아 움직이고 추함도 아름다움으로 변신하고 만다. ‘젖다’와 ‘움직이다’의 축축한 질감과 강력한 진동에 가슴이 설렌다. 유쾌한 상상과 아름다운 상처 한 권을 넘기는 손에 초록물이 흠뻑 들었다. 언어의 절정, 시의 꽃을 활짝 피운 시인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마경덕 (시인)
2003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신발論」
2008년 다시올문학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