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원형적 교감과 꿈의 현상학 / 최휘웅(시인, 문학평론가)
몸의 원형적 교감과 꿈의 현상학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서평/ 최휘웅(시인, 문학평론가)
강영은의 시집 『녹색비단구렁이』에 담긴 시편들은 매우 감각적이다. 선명한 이미지들이 독자들을 전율하게 하고 매료시킨다. 강영은 시들은 온 몸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거기에서 얻어진 인식과 시인 내부에 존재하는 의식의 신기루를 감각화 하여 표출한다. 여기서 나는 의식의 신기루를 꿈의 현상학이라 명명한다. 그의 시는 자연과 교감하면서도 자연이 갖고 있는 완전성에 도달하지 못하여 몸부림치는 시인의 자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실현되지 않는 이상에 대하여 집착하는 의식은 곧 꿈꾸는 자의 의식이고, 이런 의식을 드러내는 시는 신기루를 쫒는 꿈의 현상학이 될 수밖에 없다. 가령 이 시집의 첫머리에 있는「매미시편」을 보면 이런 의식의 단층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절창을 뽑기 위한 인고의 과정에 대한 인식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시작행위를 반성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이 때 시인은 직설적 화법을 구사하지 않고, ‘매미소리’를 은유로 한 지극히 시적인 언어감각을 살린다. 이 시에서 <매미소리>는 ‘명창의 넋’이 담겨 있는, ‘박연폭포 한 소절 폭포수’와 같은 자연과 일치된 완벽한 시편과 동일시된다. 그런데 화자의 관심은 매미가 이런 ‘짧고 굵은 절창을 위해’ 땅 속에서 오랜 시간 ‘몸 속 가락을 고른다는’ 인고의 과정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안일한 시작행위를 반성하는데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꿈꾸는 시의 이상은 ‘동안거 하안거 다 지낸’, 고행 끝에 온 몸을 다하여 얻은 득음의 경지임을 암시하고 있다. 동시에 ‘매미소리’를 통하여 인식하게 되는 이런 시작의 이상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의식과의 괴리에서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감정까지 우회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강영은의 시들은 온몸으로 세계와 교감하면서 그와 대비하여 자아를 탐구하고, 그러면서 또 내부에 존재하는 탐미적 욕망을 분출하는 양식이 되고 있다.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실 비단 그물침대 걸어놓은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가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 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지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에 들 수 있다면
-허공 모텔-전문
시는 일정부분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는 욕망을 표현한다. 구태여 라깡의 욕망론을 들지 않더라도 시에는 다양한 욕망들이 편재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시 「허공 모텔」에서도 시인 강영은이 꿈꾸는 욕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시에서 ‘허공 모텔’은 화자가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집인 동시에 무릇 많은 여성들의 내면에 자리한 집의 의미를 집약하여 상징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는 여성의 남성 소유욕이란 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여성의 입장에서 집의 의미는 사랑하는 남자를 자기 품안에 영원히 가둬 두고자 안달하는 욕망의 도구다. 남자들은 끝없이 집밖을 배회하지만 여자들은 그런 남자를 집안에 가둬두고 싶어 한다. 여자들이 집을 치장하는 일에 집착하는 이유도 남자를 가정이란 울타리 안에 묶어두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에 가시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이야 말로 여자들이 꿈꾸는 집의 전형이 될 수밖에 없다. 이 거미줄을 모텔로 바라보는 시인의 의식에는 ‘장수하늘소’로 비유되는 건장한 사내를 끌어들여 꼼짝 못하게 품안에 가둬두고 싶은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장수하늘소도 이 거미줄에 걸려들면 꼼짝없이 묶이고 마는 현상에 착안한 발상이다. 화자는 ‘그 사내 걸어온 길 칭칭 동여맬’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 사내가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란 염원을 갖는다. 결국 이 시의 화자가 꿈꾸는 완벽한 사랑은 사내로 하여금 과거로 못 돌아가게 하는 것이고, 사내를 자기 품에서 죽을 때까지 못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음을 낳고, ‘그 죽음 자랄 때까지’ ‘빵처럼 그 죽음 뜯어 먹으며’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죽음’은 자식을 함의하는 말이지만 이런 삶이 죽음에 이르는 길임을 암시하는 중의적 표현이기도 하다. 곤충 가운데는 암컷이 생식을 위하여 수컷을 끌어들이지만 교미가 끝나자마자 수컷을 잡아먹는 습성을 가진 것도 있다고 한다. 어쩌면 여성의 무의식 속에는 이런 본능이 잠재해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 시는 본능에 충실한 완벽한 소유를 꿈꾸고 있다. 그러나 그 소유의 과정이 죽음을 낳고, 죽음을 뜯어 먹으며 살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허무한 것임을 화자는 말하고 있다. 소유의 결과로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지을 수 있으리라 희망하지만, 이 역시 죽음에 이르는, 허무의 공허한 목소리로 들릴 뿐이다.
이렇게 강영은의 시는 여성 특유의 본능적 욕망을 재현한다. 그리하여 삶의 원형적 의미를 추적한다. 이 때 강영은이 취하는 시적 방식은 은유를 바탕으로 한 감각적인 표현이다. 그의 시적 사유가 생경한 관념에 빠지지 않고, 육감의 감성으로 와 닿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시는 온 몸으로 세계와 교감하여 얻은 원형적 심상을 근간으로 한다. 강영은의 시가 탐미적 성향을 갖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시 「소비되는 봄」과 「그가 나를 쏘았다」에서 그의 탐미적 의식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지하철 입구로 내려서기 전 통풍구를 보았지?
음흉하고 뜨거운 숨을 내쉬는 바람난 사내들
시커먼 속내 같은 구멍 말이야
그녀의 스커트를 단숨에 들어 올려
스커트 아래 누웠던 사내들보다 더 유명해진
복제된 바람의 힘 때문에
그곳을 지나던 그녀의 두 손이 깜짝 놀라
스커트 앞자락을 내리 눌렀지만
미끈한 종아리와 부푼 엉덩이 아래 활짝 드러난 그녀의
하초에서
그만, 뜨거운 꽃송이가 터지고 말았대나
섹시한 몸매가 상품이 되는 시대
저것봐, 목련나무 위 그녀의 스커트가 활짝, 화-알짝,
들어올려지고 있어
날아갈 듯 희디흰 스커트 속 불쑥 드러난
앤디위홀의 손
저것봐, 비릿한 꽃냄새에 환장한 통풍구가
여기저기 그녀를 복제하고 있어
지하의 봄을 쏟아내고 있어
-소비되는 봄-전문
시 「소비되는 봄」은 모든 것이 상품화 되어 소비되고 있는 현대 도시 문화의 한 단면을 풍자한다. 이 시의 소재는 지하도 벽면에 걸려 있는 마릴린 먼로의 사진이다. 바람에 날리고 있는 스커트 앞자락을 두 손으로 누르고 있고, 미끈한 각선미가 시선을 끄는 그런 사진이다. 도시 곳곳에 걸려 있어서 흔히 목격하게 되는 그런 사진인데, 여성의 육체미가 선전도구로 상품화 되어 걸려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을 이 시는 실물처럼 묘사하고 감각화 하여 미적 경이감을 창출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지하철 입구에서 화자는 이 사진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진에서 스커트가 날리는 이유를 통풍구에서 나오는 바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그 통풍구는 ‘음흉하고 뜨거운 숨을 내쉬는 바람난 사내들의 시커먼 속내 같은 구멍’으로 비유된다. 이것은 자연물에 인위적인 감정을 이입한 의인화된 표현이다. 그럼으로써 사진 속의 인물이 그곳을 지나던 실제적 인물로 둔갑한다. 음흉한 사내로 의인화된 바람과 사진 속의 뇌쇄적인 여인이 만남으로서 어떤 실제적 상황의 감정을 동반한다. 여인의 아름다운 속살을 들여다봤을 때의 황홀감, 경이감, 당혹감 등 미적 감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활짝 드러난 그녀의 하초에서 뜨거운 꽃송이가 터지고 말았대나’와 같은 표현이 그 단적인 예다. 시인은 이런 미적 감정에 탐닉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비극은 이런 감정까지도 상품의 대상이 된다는 데 있다. 현대의 자본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표적에서 제외하지 않는다. ‘비릿한 꽃냄새에 환장한 통풍구’에 의하여 그녀는 수없이 복제되고, 지하의 봄은 쏟아지고 있다. 여기서 통풍구는 모든 것을 상품화하여 재화로 바꾸는 거대한 자본의 힘을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비릿한 꽃냄새’는 표면상 성적 자극을 촉발하는 소재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돈을 쫒는 자본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돈 냄새를 맡은 자본의 힘은 성 감정까지 상품화하여 소비시킨다. 이런 상품화된 성 감정을 이 시에서는 쏟아지는 ‘지하의 봄’으로 명명하고 있다. 어떻든 이 시는 탐미의 선상에 있다. 비록 자본주의의 힘에 의하여 ‘섹시한 몸매가 상품이 되는 시대’라고 개탄하면서도 여전히 시인은 경이의 시선으로 사진에 담긴 마릴린 먼로의 아름다운 몸매에 탐닉되고 있다. 이것은 시인 내면에서 분출하는 탐미의식의 발현으로 읽혀진다.
강영은 시인의 탐미의식은 감각적인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했을 때, 언어는 관념을 지시적으로 전달하는 기능이 아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메타적 기능을 본령으로 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이런 언어의 메타적 기능에 충실하고 있다. 이 점에서 강영은은 메타적 언어로 존재를 탐색하고, 또 그것을 감각적 언어로 표출함으로써 언어 연금술사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강영은은 탐미주의자이면서 예술지상주의자이다. 그는 결코 이념 지향적이거나 윤리적 관념에 억매여 있지 않다. 그의 의식은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굴레에서 안주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의 몸 전체가 세계와 맞서있고, 거기에서 인식된 체험의 내용들이 그대로 감각적인 언어로 재현된다. 기존의 관념적 틀에서 벗어나 톡톡 튀는 듯한 시적 사고를 보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건반 위를 튀는 손가락이 싱싱한 총알을 쏟아낸다
몸에 와 박히는 무수한 음의 총알들, 납탄 같은
랩소디 언 블루의 탄피가 귀를 파고든다
음파를 타고 이동해온 슬픔의 멜로디는 정직한 총알이다
음계의 상류를 향해 나아가던 나보다
기억이 먼저 사살된 걸까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
잿빛의 탄흔 무성한 음결 속에서
시퍼런 물줄기 쏟아내는 음계의 하류로 망명한다
(누구에게나 망명하고 싶은 순간이 있는 법이다)
마지막 남은 총알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지자
붉은 선혈 뿜는 실내등이 켜지고
커튼콜 끝난 무대 위에서 어둠이 점점 자라나
도시를 삼킨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총탄에 맞은 사람들을 수거해 간다
누가 이 절망의 도시를 살아나게 할까
청중석 구석에 자리한 이미 죽은 나에게 낮은음자리인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인다
지구 저편은 환한 대낮,
사막의 전장에서 수신되어 오는 짧은 신호음처럼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은빛의
빛나는 총알, 사랑 혹은 문명을 복제하고 있을
그 지나간 음표들이
나를 쏜다. 쏘았다 탕!
-그가 나를 쏘았다-전문
시 「그가 나를 쏘았다」는 미국의 작곡가 G.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를 제재로 한 작품이다. 피아노와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이 음악은 미국의 현대 문명이 내포하고 있는 암울한 도회지의 분위기와 인간의 불안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시의 주註에서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이 시가 이런 음악의 분위기를 시로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 졌음을 드러내는 언표다. 일종의 음악 감상시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적 진술은 살아 움직이는 물체가 그대로 돌진해 오는듯한 충격으로 와 닿는다. 이 시의 전반부는 연주가 진행되는 과정을, 후반부는 연주가 끝난 뒤, 음악이 준 심리적 충격을 진술하고 있다. 이 때에도 관념적 진술은 최대한 억제되고 감각이 살아 있는 비유적 언어를 동원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을 ‘건반 위를 튀는 손가락’으로, 귀로 파고드는 음을 ‘싱싱한 총알’, 또는 ‘납탄’으로 비유함으로써 피아노 연주자의 격렬한 손의 움직임이나 음악이 주는 충격을 실감하게 한다. ‘음계의 상류를 향에 나아가던’은 음악에 몰입해 가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고, ‘잿빛의 탄흔 무성한 음결 속에서/시퍼런 물줄기 쏟아내는 음계의 하류로 망명한다’는 음악에 도취된 심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연주가 진행됨에 따라 음에 대한 비유가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는 점이다. 총알-납탄-잿빛의 탄흔-시퍼런 물줄기로 이행되는 음에 대한 비유의 변주는 변화해가는 음악의 진행과정을 직접 보고 있는 듯한 실감을 자아내게 한다. 연주가 끝난 뒤 상황제시도 마찬가지다. ‘붉은 선혈 뿜는 실내등이 켜지고’에서 ‘붉은 선혈’은 장내를 밝혀주는 실내등의 불빛을 비유한 것이지만 앞에서 음악을 총알에 비유한 것의 연장선상에서 읽혀지는 이미지다. 음악이 귀로 파고드는 총알이라면 음률로 가득했던 장내는 선혈이 낭자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총탄에 맞은 사람들’은 한동안 음악을 들으며 충격에 빠졌던 관객들이고, 이들을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수거해간다’는 언표는 이들이 일상의 도시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도시가 거대한 무덤이 되는 이유는 이미 음악의 총을 맞아 시신이 된 관객들이 돌아가는 세상이란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화자 자신도 한동안 음악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청중석 구석에 자리한 이미 죽은 나’는 음악 연주가 끝난 뒤 충격적인 감동에 젖어 여음을 음미하고 있는 화자 자신이다. 그는 그 음악이 ‘누군가를 저격하고 있을지도 모를 은빛의 빛나는 총알’로, 또는 ‘사랑 혹은 문명을 복제하고 있을 음표들’로 인식한다. 이것은 음악에 감동한 끝에 얻은 화자의 감회를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음악을 들으며 충격적인 감동에 젖는 과정을 감각적인 비유를 동원하여 형상화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언어 구사에서 강영은 시인이 얼마만큼 유미주의의 미적 감정에 심취되어 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강영은의 시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시적 관심은 현대 도시 문명의 그늘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의식의 표출이다. 문명의 그늘에서 겪게 되는 현대인의 불안, 공포, 상실감, 유혹의 심리현상 등을 구체적 소재를 통하여 구현한다.
오빠 지금 한가하지? 나 화끈하게 벗었어
궁금하면 눌러봐,
휴대폰의 액정 화면 속으로
문자가, 들어왔다
문자를, 눌러볼 시간은 넉넉했지만
문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문자의, 벗은 몸이 보고 싶지만
문자에게, 쉽게 속을 보이는 것 같았다
문자의, 눈치를 적당히 보다가
문자를, 눌러보았다
문자가,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문자를, 보긴 했지만
문자가, 누구인지 모르므로
문자의, 말을 씹어버렸다
문자는, 날마다 찾아왔다
문자가, 내 속도를 노크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났다
문자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
문자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
문자의, 세상으로 들어가
뜨겁게 나를 던져봐?
죽어도 좋아, 정사 신이나 펼쳐봐?
-문자의 세상-전문
시 「문자의 세상」은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생활에서 흔히 겪는 일을 소재로 한다. 간혹 황당한 익명의 문자를 받고, 당황하거나 낯을 붉히는 경험을 우리는 한다. 휴대폰 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생긴 현대의 풍속도인데, 이 시는 이런 풍속의 단면을 통하여 현대인의 미묘하면서도 미세한 심리의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황당한 문자를 받고 얼른 덮어버린다.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리고 부끄러워서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시치미를 떼지만, 이런 내용의 문자는 수시로 들어오면서 호기심을 자극하게 된다. 그러나 ‘벗은 몸이 보고 싶지만’ ‘쉽게 속을 보이는 것'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다가 문자의 지시대로 눌러본다. 나긋나긋한 속삭임이 들려오고, 거기에 대응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무심한 척 말을 씹어버린다. 그러나 그 때부터 같은 내용의 문자는 계속 들어오는데, 왠지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아 겁이 나고, 머리가 빙빙 돌 정도로 불안하다. 그러면서도 또 한쪽에서는 정사의 신을 펼쳐보고 싶은 뜨거운 욕망으로 문자의 세상을 기웃거리게 되는 이중 심리를 이 시는 경쾌한 터치로 표현한다. 이렇게 이 시는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이며 이율배반적인 현대인의 내면의식을 적나라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 때 시인은 현상을 현상으로만 볼뿐 섣부른 윤리관을 내세워 대상을 비판하거나 풍자하지 않는다. 화자 자신도 그 현상과 일정 부분 동류에 속해 있고, 그래서 강영은의 시는 자기 고백적 성격이 강하다. 그만큼 시에서 자의식을 강하게 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시가 본질적으로 자기 탐구의 양식이란 것은 이미 정설이 되고 있다. 강영은의 시에서는 그가 직접 목격했거나 경험했던 객관적 사실, 또는 자연 현상까지도 주관화 되어 나타난다. 의인법이나 활유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 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의 시에서 객관적 외부 세계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지렛대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길모퉁이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낡은 휴대폰을 본다
몸 구석구석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다 가파르게 높아져 가는
음계를 헛디뎠는지 그녀의 날개가 부셔져 있다
지상의 어떤 말보다 천배나 더 정밀한 성감대인
허공 속에서 익화翼化된 제 울음만 받아먹는 동안
그녀의 몸은 깊은 동굴이거나 버려진 폐광이 되고 만 것일까
더 이상 발신음도 수신음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
네 몸은 더 이상 진화될 수 없어,
너는 이미 날개를 달았거든,
오래전 수신된 까만 문자메시지만이
화석박쥐의 동처럼 굳게 새겨져 있는
음속의 캄캄한 길을 뚫고 외마디 초음파를
던져보는 그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그를 향해
고감도의 안테나를 세웠던
그녀는 정말이지, 머나먼 신생대의 밤을 향해 돌진했던
한 마리 눈먼 박쥐가 아니었을까
저기 창자가 흘러나온 채 버려져 있는,
-버려진 휴대폰-전문
시 「버려진 휴대폰」은 ‘길모퉁이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낡은 휴대폰’을 통해 문명의 한계 같은 절망을 말하고 있다. 이 시에서 버려진 휴대폰은 그녀로 의인화 되어 인간의 덧없는 욕망과 그 좌절을 함의한다.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다 가파르게 높아져 가는 음계를 헛디뎠는지 그녀의 날개가 부셔져 있다’ 는 이런 의미를 함축한다. ‘높아져 가는 음계’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상승과 관련이 있고, ‘날개가 부셔져 있다’는 한계에 부딪쳐 좌절된 절망을 암시한다. 한 때는 ‘지상의 어떤 말보다 천배나 더 정밀한 성감대’를 가지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교감의 극치를 누리는 듯 했으나 이미 문명의 이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휴대폰은 ‘깊은 동굴이거나 버려진 폐광’과 다를 바가 없다. ‘발신음도 수신음도 들리지 않는 적막’만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더 이상 진화될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돌아본 휴대폰의 이 때까지의 삶은 ‘고감도의 안테나를 세우고’ 무모하게 돌진했던 ‘눈먼 박쥐’ 의 삶과 닮은꼴이다. 한 때, 기계문명의 총아로서 각광을 받는 듯 했지만 ‘오래전 수신된 까만 문자메시지만이/ 화석박쥐의 동처럼 굳게 새겨져 있는’ 체 버려져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다. 사람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던 ‘문자메시지’가 이제 화석이 되어 정체되어 있는 모습은 허무한 삶의 자기모순을 환기시킨다. 이 시는 겉으로는 휴대폰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기실은 산업자본에 의하여 맹목적으로 달려온 기계 문명이나, 그런 물질문화를 맹신하며 살고 있는 인간의 자가당착을 형상화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욕망을 앞세운 인간의 맹목적인 삶이 안고 있는, 그 끝의 한계성과 허무를 아이러니컬하게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욕망과 그 한계, 그리고 부조화 속에 평정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의 내면세계를 시 「버려진 휴대폰」은 함의하고 있다.
강영은의 시집『녹색비단구렁이』를 일독하고 난 뒤 떠오른 것이 칸트가 판단력 비판으로 설명하는 미학의 원리였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능력을 오성悟性, 판단력判斷力, 이성理性으로 구분한바 있다. 이중 판단력은 특수한 사례를 보편 속에 포함시키는 사유능력이라 했다. 그러한 판단력에는 규칙, 원리. 법칙과 같은 보편적인 것이 제시되고 그 밑에 특수적인 것을 포함시키는 결정적 판단과 그와 반대로 먼저 특수적인 것이 제시되고 그것을 포함할 보편적인 것을 발견할 때 이를 반성적 판단이라고 했다. 미적 판단은 이 반성적 판단에 속한다. 미적 판단은 상상력을 가지고 표상을 주관화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주관이란 쾌. 불쾌의 감정이나 정서의 의미를 내포한다. 예술창작은 주로 주관적인 상상력의 기능에 의존한다. 상상력은 감각과 오성을 결합하여 현실적인 인식을 성립시킨다. 그럼으로써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미적 쾌락에 도달하게 한다. 상상의 감정은 인식의 능력에 활력을 주어 시로 하여금 직접적인 생명감으로 독자에게 와 닿게 한다.
강영은의 시들은 시적 사유에 있어서나, 시를 구성하는 원리에 있어서 꽤 자유분방하다. 그의 시가 기존의 일반화된 가치관이나 어떤 선입관으로 사물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몸을 통한 감각적 인식이 선행하기 때문에 그의 시는 항상 구체성을 지닌다. 그 이면에 현실이나 세계를 인식한 의미내용들이 함축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강영은의 시에 등장하는 구체적 표상들은 인간의 내면적 욕구나 실현되지 않은 꿈의 현상학과 동일 선상에 있고, 추상적인 의미나 관념들을 내포시키는 시적 상상력은 칸트가 말한 미적 쾌락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가령 시 「건빵의 휴가」에서 ‘건빵’은 모진 군대생활을 환유하는 구체적 사물이다. 이 시에서 ‘단단한 건빵’이 군인의 ‘각진 부동자세’에서 ‘뜨거운 배로 속에서 구워질 대로 구워진 목숨의 한 끝’으로 의미의 필연적 연결을 이루는 힘은 시인의 상상력에서 나온다. 말랑한 밀가루가 부글부글 끓고 달구어져서 이루어 진 단단한 건빵과 ‘어디로 튈지 몰라 부글부글 끓던 젊음’이 모진 훈련과 군기로 빳빳하게 굳어져 있는 군인의 모습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상상력이 이 시의 골격이다. 이런 골격을 바탕으로 건빵을 굽는 ‘거대한 혼합기’는 군영, 곧 막사나 참호와 동일 의미가 되고, ‘각지고 네모난’은 건빵의 외형인 동시에 규율에 적응된 군인의 형상이고, 훈련이란 모진 역경으로 점철된 한 때의 시간까지를 함의한다. 이런 상상의 연장선상에서 ‘건빵’은 이 땅의 아들과 동의어가 되고, 남자들의 추억의 표상으로, 여자들의 기다림, 부모들의 안타깝게 부서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대변하며 물질적 차원을 뛰어넘어 정서적 의미를 구현한다. 칸트가 말한 상상력에 의한 표상의 주관화에 이른 것이다.
서정시의 본령은 자기 존재의 구현에 있다. 그런 면에서 솔직성은 시인의 중요한 덕목이 다. 시의 감동은 절실한 자기의식을 솔직히 들어냈을 때 주어진다. 이 때 지나치게 윤리적으로 도색하여 미화하거나 치장한 장식적인 의식은 시의 진정성을 희석시킨다. 한편 시는 인간의 꿈과 미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나 이완, 또는 갈등이 시의 자리에 놓인다. 시에서 미적 상상력은 언어 운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가 메타적 언어를 주요 수단으로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상상력을 확장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시의 기능이 카타르시스에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비극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지만 시가 그런 정화작용을 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강영은의 시집을 읽으면서 이런 시의 명제들을 다시 생각해 봤다. 그의 메타적 언어가 불러일으키는 상상의 심미적 세계나 비극적 감정에 몰입했다. 온몸의 감각을 동원하여 치열하게 세계와 교감하며 삶의 의미들을 인식하고 확장해가는 시의 전개과정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최휘웅시인
1982년 월간 <현대시학>으로 등단.
현재 계간 <시와 사상> 편집인
시집: <설화-사막의 도시>외 3권
평론집:<억압. 꿈. 해방. 자유. 상상력>
2008, 다시올문학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