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바다의 등

그리운 칠판

너머의 새 2015. 10. 22. 21:44

그리운 칠판/ 강영은 

 

 

1927년, 북간도 명동 촌에 봄이 왔습니다

흙먼지 이는 운동장에 파릇파릇 글자가 돋아납니다

벌판 끝 아지랑이는 모락모락 글자를 완성합니다

송판 내음 향긋한 문을 열면 코흘리개 몇이 목청 높여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 모국어를 일으킵니다

삐뚤빼뚤 글자가 신이 납니다

운동장 넘어 콩밭에선 아낙네가 사샤서셔소쇼수슈스시,

들판을 건너오는 바람소리를 심습니다

산모퉁이 길이 따라 읽느라 하루해를 훌쩍 넘깁니다

콧등을 훔치고 간 소매 자락 위에는

지지 않는 해가 반들거립니다

10년, 50년, 80년이 지나도

조선족 최초의 명동 소학교는 문을 닫지 않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부르는 출석부는

그때 그대로입니다

소학교 벽에 걸린 칠판도 여전히

손발을 깨끗이 씻자,

금주의 할일을 일러줍니다

옥수수 잎을 흔들다 온 바람이 그리운 이름들을

호명 합니다

 

청소당번 문익환 / 구구단 못 외우는 학생 김옥분 /

떠드는 학생 송몽규 / 지각생 윤동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