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새 2015. 10. 22. 22:11

녹두/강영은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

​녹두라는 말이 좋았다

​녹두 밭 한 뙈기가

​헐어있는 입 속을 경작했던 것인데

녹두하고 부를 때마다

​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

​녹두꽃 지는 거기가 저승이어서

​녹두는 보이지 않았다

녹두가 너무 많은 곳

​녹두가 너무 많아 내가 보이지 않는 곳

​나는 어떻게 인간이 되나

​녹두를 생각하는 동안

​초록이나 연두가 희망을 쏟아냈지만 희망이란

녹두의 유전자를 지닌 말, 

가시 돋친 들판의 약속 같은 것이어서

여물지 않은 입안에 가시가 돋고

​단단하게 여문 가시가 혓바닥을 찔렀다.

눈을 뜨면 ​젊은 어머니가 앉아계셨다

녹두꽃만 보이던 그때,

​나는 진정 아픈 빛깔에 시중들고 싶었다

​젖은 이마의 미열을 짚어내던 어머니처럼

​푸르죽죽한 세상을 받쳐 드는

​죽그릇이 되고 싶었다

​오후 여섯시에 찾아든 파랑새처럼

​녹두밭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