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다는 것의 의미 : 나(몸)에게서 너(세계-텍스트)에게로 /김석준(평론가)
나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든 남을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남을 미워하면 나의 존재 공간이 그만큼 좁혀지고 위축되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나의 존재를 온 우주에 확장해 보고자 한다. 루소,『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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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의 금번 상재된 『녹색비단구렁이』를 읽어 내려 가다보면, 문득 춘추전국시대의 양주와 묵적이 겹쳐진다. 물론 유아론자인 양주와 휴머니스트인 묵자는 상호 대극의 지점에 서서 한 세대를 풍미하기는 했지만, 시인은 이 양자의 인식적 관점을 교묘하게 이접시켜 나의 나됨을 너에게로 확장시켜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강영은의 시말운동은 자신에게 속한 몸-문자를 집요하게 그려내면서 그 문양을 세계-텍스트로 치환시켜가고 있다. 하여 강영은의 시말은 양주적인 나에 관한 의식에서 이타적인 묵적으로 이행하고 있다. 그것은 ‘나-읽기’를 ‘너-읽기’로 역전시켜 세계를 텍스트화하는 행위이자, 시인의 시적 의식의 확장적 국면이다. 이를테면 몸성에 관한 담론적 사유를 극한으로 몰고 가다가, 그것을 이내 삶-시간-세계의 의미로 발화시켜 나의 외연을 확장시키고 있다.
강영은의 『녹색비단구렁이』는 루소적인 몽상을 체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의 몸에 관한 담론적 사유는 ‘자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 결과이자, 시인 자신의 ‘존재를 온 우주에 확장’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허나 여기에는 통과제의와 같은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시인의 몸에 관한 사유는 “눈먼 사랑”(「제논의 화살」일부)에 상처받고 “존재의 불꽃”(「비누論」일부)에 데인 상흔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몸은 슬픔의 지대에서 배회하는 시인 자신이거나 “탯줄”(「호박」일부)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학적 운명이다. 하여 시인의 시적 사유가 몸의 수인에 갇혀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자신의 몸-문자를 읽어 세계-기호의 해독의 지점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읽는다. 몸-기호를 감각적으로 읽고 인간학적으로 읽으면서 나에게 속한 운명적인 몸-기호를 너로 치환 승화시킨다. 몸-문자의 세계-문자로의 치환. 이것이 바로 강영은 시의 매력이자, 그가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놀란 흙 밖에 서 있는,
나는 노을을 들춘 마른 번개,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지나가지
나는 자줏빛 스카프를 두른 여자, 당신의 목덜미에 휘감기지
나는 무덤 속의 고요, 눈썹 아래 당신을 끌어안지
나는 어두운 숲 속의 은사시나무, 바람의 귓바퀴에 대고 속삭이지
나는 한낮의 어지러움, 촘촘히 볼우물에 고이지
나는 젖몸살 앓는 싹눈, 장미 빛 말을 머금지
나는 독침, 말랑거리는 혀에 착지하지
나는 높새바람, 당신의 쇄골 부드러운 능선을 파고 들지
나는 저장해둔 감자, 당신의 심장부에 핀 푸른 솔라닌
치명적인 꽃이지,
-「감자의 9가지 변주」전문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나의 몸-기호는 너의 몸-기호다. 너와 내가 상호 치환되거나 동일시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시가 도달하는 저 동감同感의 순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하여 시란 너에게로 다가가 너를 읽어 너에게 동화되는 아도르노의 서정적 미메시스의 순간이다. 시란 변주다. 시란 “단 한 줄의 문장으로 당신”을 읽는 행위이다. 시란 “당신을 끌어안”아 나의 영혼이 변이되는 순간이다. 강영은의 「감자의 9가지 변주」는 너를 나로 치환시켜 삶-시간-세계의 의미를 예인 중인데, 그것은 삶을 살아낸 시간의 흔적에 관한 동일시이다. 내가 너로 변화되는 순간, 내가 널브러진 감자로 변신하는 순간, 나는 나인 동시에 너이다. 나는 너의 대리표상이다. 나는 너를 산자이다. 비록 시인이 알뿌리를 드러낸 감자의 형상을 나로 치환시켜 소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심층에서 읽어 그것을 자기화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강영은의 시말의 소생점은 타자의 몸-문자를 시인의 문자로 읽어 그것을 의미화하고 있다.
나를 읽어 너에게로 가기. 나를 읽어 세상의 텍스트 기호를 의미의 지대로 이끌기. 시 「감자의 9가지 변주」는 감각적으로 촉지된 삶의 문양을 다양하게 변주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읽어내고 있는데, 그것은 나의 몸-문자를 당신(감자)의 몸-문자로 읽어 당신에게 이르는 길이다. 하여 나는 너의 나이고, 너는 나의 너이다. 서정적 동감의 순간은 “치명적인” 합일의 순간이기도 한데, 그것은 “마른번개”치는 저 벌판을 맨 몸으로 건너면서 “젖몸살 앓는” 고통의 지대의 경유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강영은이 읽은 나는 너를 읽어 나의 삶(혹은 사랑)의 지대를 반추하는 행위를 감행하고 있다. 나의 나는 “장미 빛 말”을 몽상하면서 너의 당신에게로 달려가는데, 그것은 고통의 동일시이자, 사랑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허나 헤맨다. “한낮의 어지러움”을 느끼고 “무덤” 같은 고요의 지대를 건너면서 저 어두운 숲을 헤맨다. 독침 하나 키우고 있다
①피를 토하는 어느 명창의 넋이 들어 있는지
박연폭포 한 소절 폭포수로 쏟아내는데
목구멍에 걸린 울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해
매미 시편 붙들고 땀을 흘린다 「매미 시편」일부
②상자 속에 내던지는 존재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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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똥 바슐라르의 촛불, 조금씩 녹아내리는 문장이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 같은 「비누論」일부
③문자는, 날마다 찾아왔다
문자가, 내 속도를 노크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났다
문자에게, 목덜미를 잡힌 것 같았다
문자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 것 같았다
문자의, 세상 속으로 들어가 「문자의 세상」일부
읽는다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이다. 읽는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주체의 의식 작용이다. 읽는다는 것은 미지의 기호를 의식의 힘으로 전유하는 행위인데, 강영은 시인은 “은유에서 흩날리는”(「오래된 유적」일부) 기호들을 시말로 받아 적으면서 문자의 외연과 내포를 동시에 길어 올린다. 말하자면 읽는다는 것은 물자체가 발하는 대상가능성의 촉지법인데, 그것은 은유에 의한 은유의 작용이다.
시말의 발화점. 대상의 행간을 읽어, 의미를 발화시키기. 시란 그 자체로 읽기이다. 시란 그 자체로 읽고 말하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①은 시인의 시말공간이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말은 읽어 닿는 저 심연의 지점에서 소생한다. 하여 시인은 “소리의 깊이”를 헤아리면서 소리의 심연, 즉 칠흑 같은 땅 속에 파묻혔던 애벌레 시절도 동시에 떠올린다. 허나 “제대로 읽”혀지지 않는다. “자음과 모음”은 “엇박자”로 뒹굴 뿐, 소리는 시말이 되고 시가 되지 못한다. 한편의 시를 완결한다는 것이 그리 녹녹하지 않음을 고백하면서 강영은 시인은 읽음 위에 마음을 얹혀 시쓰기가 도달하여야 하는 지점을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시쓰기란 읽음 위에 얹힌 마음이다. 시쓰기란 대상을 읽어 마음의 자리에 가 닿기이다. 바로 이 지점이 강영은 시의 강점이자 그의 시가 매력적인 이유이다. 제대로 읽기 위해 진력하기. 제대로 읽어 대상가능성을 온전하게 현시하기. 이를테면 강영은의 시말운동은 시인의 감각에 촉지된 의미의 가락을 혹은 “짧고 굵은 생애의 절창”을 이 세상에 흩뿌려 동감의 순간을 구현하는데 있다. 따라서 강영은의 몸-감각은 새로운 우주로 변환되어 하나의 “완결편”으로 거듭 태어난다.
②는 읽기의 차원을 조금 더 고양시켜 창조적 몽상의 세계로 빨려들고 있다. 비누에서 촛불로 비약하기. 아니 바슐라르적 물질적 상상력의 차원에서 볼 때, 비누는 촛불과 같다. 이를테면 타들어가는 촛불을 응시하면서 자아를 통찰하는 것과 몸을 정화시켜는 주는 비누는 시인의 읽기 방식에서 볼 때, 동일하다. “제 몸을 내던지는 존재의 불꽃”은 “몸의 궤적” 속에 기입된 “녹아내리는 문장”에 다름 아니다. 녹아 소멸하는 것과 타들어가 소멸하는 것을 동일하게 병치시키면서 시인은 생에의 비애 또한 읽어 내려가는데, 그것은 삶-시간-세계가 펼쳐놓은 인간학적 사태(고통 혹은 통곡)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 위무 중이다.
③은 읽기의 읽기, 즉 이중의 읽기를 시말 속에 응고시켜 문자읽기와 문자에 읽힌 나를 교묘하게 이접시키고 있다. 문자 밑에 가라앉은 리비도를 촉발시키기. 하여 문자는 “나 화끈하게 벗었어”이고 “정사 신”이다. 허나 읽힌 것은 문자가 아니라, 시인의 내면 속에 잠재해 있는 욕망의 지대이다. 도발하는 문자와 도발되는 나를 매개시키는 디지털 공간 속을 혼돈스럽게 내달리면서 시인은 문자의 문자성을 읽어 내려가는데, 문자는 이 시대의 문화적 징후이자, 쾌락의 지대이다. 오염된 스팸문자. 허나 그 문자에 도발되고 싶은 욕망의 지대. 문자는 뜨거움이다. 문자는 “벗은 몸”이다. 문자는 말이 아니라, 행위이다. 문자는 “죽어도 좋아”이다. 문자를 읽는 나(시인 자신)를 문자에 읽혀진 나로 역전시키면서 강영은은 세상에 흩뿌려진 문자의 다층적인 모습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①심장이 찢겨지고 팔다리가 잘려도
발더둥 치며 나아가는 텍스트로는
죽음을 다 읽어낼 수 없다
-「설법 한 접시」일부
②우글거리는 말의 행방을 찾아
불과 물과 바람의 길을 지나 온 귀가
제 몸 속에 관 하나 남긴 것일까
- 「벌레들의 지구-이명耳鳴에 들다」
③누가,
누가 되지 않고 지나갈 수 있을 것인가
긴 문장을 완성하는 누 떼의 행렬 사이
누에게 길을 묻는
햇빛의 발자국이 간간이 섞인다
- 「작시법作詩法」일부
읽는다는 것은 삶의 특정한 한 국면에 관한 의미적 읽기이다. 이를테면 읽기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내푸른 전설의 22페이지」일부)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 그것을 삶으로 치환시키는 행위이다. 하여 읽기는 삶-시간-세계의 본질적 국면을 정확하게 현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읽기는 특발적인 사건이거나 물질적 상상력의 한 국면에 관한 지극히 주관화된 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읽기는 텍스트의 운동이다. 읽기는 ①에서 보여준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읽어낼 수 없다. 읽기는 “사생결단의 길”이다. 읽기는 텍스트의 지대에 남겨진 잔여 부분에 관한 읽기이다. 하여 읽기는 해체이면서 건설이고 건설하면서 또 다른 해체로 향하는 텍스트의 무한한 운동이다. 읽기는 찢겨 해체된 “산 낙지 한 접시”이다. 읽기는 산 낙지에 얹혀 있는 설법이다. 읽기는 “다 읽어낼 수 없”는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강영은이 읽기의 궁극적인 지대는 삶-시간-세계 너머에서 작동하는 그 무엇인가를 읽어내는 것인데, 그것은 결코 읽혀질 수 없는 그 무엇이거나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절대적 타자이다. 허나 읽는다. 허나 읽고 “몸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시인은 “제 몸을 넘는/법”을 추적 중이다.
②는 이제까지와는 방식을 조금 달리하여 읽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을 통해서 공간과 시간여행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 이를테면 웜홀(Warm hole)이라는 가상의 물리적 공간을 “벌레구멍”과 병치시키면서 시인은 “말의 행방”을 추적 중이다. 이때 말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삶을 살아낸 흔적들이거나 “소리의 무덤”이다. 하여 말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다. 말은 지나 온 길이다. 허나 “말의 행방”이 묘연하여 찾을 길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블랙홀과 화이트홀 사이에 웜홀이라는 제3의 가상공간을 연결시켜 삶-시간-세계의 흔적, 즉 과거 시간으로 회귀해 들어가고 있다. 공간과 시간의 이동을 통해 “지나 온” “평생” 들여다보기. 하여 말의 행방 찾기. 허나 찾아지지 않는다. 허나 말은 死角의 지대에 위치해 있다. 하여 시인의 말찾기는 인고의 읽기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은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도달하는 궁극의 지점, 즉 시인의 시에 관한 형상화 전략이 노출되어 있다. 읽는다는 것은 시쓰기다. 읽는다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을 정확하게 읽어 그것을 이 세계에 현시하는 시말운동이다. 이를테면 시인에게 시란 누떼가 평원을 달리는 것처럼 지나온 길이거나 “지나는 길”에 새겨진 “생의 행간”인데, 강영은은 그것을 정치하게 읽어 “긴 문장을 완성”시킨다. 하나의 서사적 사태가 기입된 시말. 생이었고, 새로운 생일 수 있는 시말. 시인의 “작시법”은 생의 의미적 읽기이다. 하여 강영은의 읽기는 나에게 새겨진 몸-문자의 외연을 확장하여 세계-문자를 읽어내는 행위이다. 루소가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말한 것처럼, 강영은의 『녹색비단구렁이』는 너무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몸성에 관한 담론적 사유를 광활한 우주 공간으로 확대하여 소우주를 대우주로 변이시켜가고 있다. 그것은 읽기의 확장적 국면인데, 시인의 읽기는 나와 너를 포월하여 ‘우리’라는 인간학적 운명의 지대로 옮겨가고 있다.
①벼랑 끝까지 기어오르는 기막힌 한 줄의 문장文章으로
나는 나를 넘고 싶다
-「담쟁이」일부
②저, 적요의 기표와 기의 사이에
소통되지 않는 어떤 세상이 있어
그 까칠한 침묵들이
몸의 안과 밖을 차단하는 것일까
- 「소나무 자폐증」일부
나는 나를 넘어설 수 없다. 나는 상승을 지향하지만 이내 몰락을 승인하는 이율배반이다. 하여 인간학은 ①에서 묘파된 “허물어진 생의 틈바구니”거나 “슬픔”이다. 나는 “상처”다. 나는 “-싶다”이다. 나는 소망충족을 항상 유예시킬 수밖에 없는 “-싶다”이다. “기막힌 한 줄의 문장文章”으로 삶-시간-세계의 의미를 증명하고 싶지만, 그것은 다만 “-싶다”로 존재할 뿐이다. “손에 넣고, 뿌리 내리고, 나를 넘고 싶”지만, 나는 나를 손에 넣지 못하고, 뿌리 내리지 못하고, 나 또한 넘을 수 없다. 하여 지상의 모든 것들은 슬픔의 지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강영은이 읽은 읽는다는 것의 의미는 결국 말로는 읽혀질 수 없는 지대가 아닐까. 말의 행방을 찾아 대상 세계의 의미읽기를 감행하지만, 그가 읽은 것은 읽히지 않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②는 의미로 읽히지 않는 부분을 시말 속에 응고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의미의 거부이거나 의미화가 불가능한 지대를 읽어 내려가면서, 또 다른 읽기를 감행하는 하나의 새로운 읽기의 전형인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말, 즉 “말하지 못하고 할 말도 없으면서 계속 말하는” 시말을 상호텍스트로 이접시켜 “제 안의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읽기에 이르고자 한다. 허나 읽히지 않는다. 허나 읽히기를 거부하는 지대에 상호 “소통되지 않는 세상”, 즉 “기표와 기의”가 존재한다.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라고 권고했지만, 강영은은 “까칠한 침묵”을 읽고 말하면서 시말의 소생점을 추적하는데, 그것은 시인의 임무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시인이라는 부류의 인간형은 말할 수 있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말들을 의미적으로 읽어 그것을 유혹하는 저주받은 인간이다. 하여 시인은 말할 수 없는 말을 한다. 시인 접신에 들려 방언을 뇌까리는 영매이다. 하여 시인은 말의 극한에 도달하여 말-우주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는 자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과 생명을 맞바꾸면서 말에 저당 잡힌 말의 노예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예가 바로 시인이다. 허나 여기에는 미묘한 역설이 지배하는데, 자고로 시인이란 자기를 기화시켜 말을 승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사라진 빈 지대에서 시말이 소생하는데,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운명을 살아낸 시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은 모든 시인의 소망이자, 강영은 시인이 도달하고 싶은 시말의 절대점인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만져지지 않는 옷으로 남는다
-「양파론」일부
시로 여는 세상 2009,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