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비단구렁이에 들다/김혜영(시인)
허공 모텔/강영은
녹색비단구렁이에 들다/김혜영(시인)
겨울비가 바닷가에 내린다. 오랫만에 내리는 겨울비, 삼십년 전 어느 겨울 날 기와 지붕에 내리던 비인지 모른다. 능소화가 담장을 넘어가던 그 지, 겨울비가 남쪽 바다에도 내린다. 늙어가는 여자들 늙어가며 더 청순해지는 여자들.............................. 그녀는 녹색 비단 구렁이를 닮았다. 늙어서 더 화사해지는 뱀, 진초록에 지쳐 먼 허공에 그물을 치는 여자를 훔쳐보았다. 검은 미니 모자를 쓰고 검은 원피스의 왼쪽 가슴에는 붉은 무늬가 수놓아진 것 같았다. 커다란 가방을 여는데 그녀를 훔쳐보는 시선이 머문 곳은 하얀 팔목에 있는 검은 팔찌였다.
한국 시단에 존재하는 무수한 여자들.........................그녀들은 아줌마이기도 하고, 늙은 처녀이기도 하고, 문단에 갓 발을 담근 아가씨이기도 하다. 문학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시인들이 무수히 쏟아지는 별처럼 많아진다. 그리움에 목이 말라 허공에 거미줄을 치는 거미처럼, 보이지 않는 거미들.......................... 그 거미줄에 걸린 사내들.......................
강영은의 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녀의 시가 가진 독특한 리듬때문이다. 시에서 이미지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지만 시적 리듬은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시라는 몸이 주는 체취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강영은의 시는 리듬이 아주 아름답게 살아 번뜩인다. 번뜩이는 사유나 독특하고 기괴한 상상이력이 아닌 세상을 살아본 여자만이 느낄수 있는 진한 여운이 담긴 리듬을 그녀가 전해준다. <허공 모텔>이란 시를 입으로 외워 낭송하는 그녀를 보고 놀랐다. 새삼 시가 종이에 쓴 글이 아니라 입으로 구전되는 양식이란 느낌이 선연하게 다가왔다.
가시거미가 지어놓은 그물을 모텔이라는 자본주의 속성을 대변하는 대상과 결합해서 파생시키는 시적 상황이 신선하다. 숲 속을 가다가 마주친 거미줄, 우연히 오래전 마주친 폐가의 거미줄을 떠 올리지 세속적인 사랑의 은신처로서의 모텔을 연상하기 쉽지 않다. 거미가 짓는 아름다운 비단실과 그 속에 걸려든 먹이의 운명을 겹치면서 시의 폭을 확장시킨다. 에로틱한 죽음을 갈망하는 티나토스를 떠 올리게 한다. 사랑의 절정에서 차라리 죽고 싶은 욕망, 성적 욕망과 죽음의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을 날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4연의 끝 부분에서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란 인식은 감동적이다. 욕망의 끝까지 밀고나가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순간, 문득, 시인이란 존재의 위대함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죽음 충동의 그 막다른 골목까지 언어를 밀고간 뒤, 시를 옴의 언어로 육화시키기 때문이다. 햇빛에 반사되는 아득한 바다의 알몸을 바라보면 문득 그 바다로 뛰어들고 싶어진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차라리 죽고 싶은 이중적인 심리를 내포하고 있다.
시의 끝부분에서는 거미의 죽음을 승천에 관한 비전으로 시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빵을 뜯어먹는 이미지는 예수의 몸인 성체를 떠올리게 한다. 가장 사랑하는 영혼의 몸을 먹음으로써 그와 하나가 되어, 부활할 수 잇다는 믿음을 떠올리게 한다. 영생의 몸으로 승화된다는 종교적 비전을 담고 있다.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의 옷을 걸치고 저 허공모텔에 들고 싶은 시인의 소박한 마음이 보석처럼 빛난다. 지상의 구차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바람처럼 거미줄에 들고 싶어하는 詩心이 세속에 얽매인 독자에게 평온한 안식을 선물한다. 시를 읽는 즐거움에 겨울이 따스하다. 봄빛이 바다 너머에서 나의 서재로 밀려올 것이다.김혜영 시인/ 경남 고성에서 출생 1997년「현대시」로 등단 부산대 영어영문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 2004년 시집「거울은 천 개의 귀를 연다」천년의시작. 평론집「메두사와 거울」계간 [시와 사상] 편집위원 , 현재 신라대 강사
시와 사상 2009, 봄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