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마음속“뒤꼍”들여다보기 / 조유리(시인)

너머의 새 2015. 11. 19. 09:10

두레문학 봄, 특선단평 4 

오래 남는 눈 /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워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강영은 시집「녹색비단구렁이」

 

 

 

마음속“뒤꼍”들여다보기 / 조유리(시인)



한 문장 한 문장 가슴에 필사되는 시가 있다.  화자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나도 따라 걸음을 멈춘 채서늘한 바람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울먹울먹 들여다보게 되는그런 시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뒤꼍”이란 단어 하나에 나는 오래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붙박였다.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라든가 쪼그려 앉아 우는 여자 아이에 대한 단상들이 내 성장기의 한 시절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어릴 적 살던 가난한 한옥집 뒤꼍엔 우물이 있었고, 뒷간이라 불리는 화장실이 있었고, 고추장 된장이 제 맛을 내기 위해 지독한 살부림을 참아내던 장독대가 있었다. 나에게도 “뒤꼍”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숨어서 혼자 삭히고 들여다보며 울기 좋은 곳이었다.  그때는 왜 태생도 모르는 고아처럼 기댈 곳 없이 쓸쓸하고 암울하기만 했던지.그럴 때마다 웅크려 앉은 내 등을 가만가만 받쳐주던 “뒤꼍”의 담장은 내 고독의 은신처였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불쑥불쑥 마음에 그늘로 옮겨 앉던 곳.돌아보면, 살아오는 동안 내가 서성였던 자리마다 움푹움푹 짙은 그늘이 패였다. 첫 사랑이었던 남자 부모님께 인사드리던 날,  내 얼굴에 그늘이 져 보인다며 마땅치 않아 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이후, 내게 온 사랑은 한 번도 볕을 보지 못했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그늘을 품은 채 온몸 웅크려 앉아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동질의 파동으로 함께 출렁여 준 “뒤꼍”이 내게 없었다면, 나는 어쩌면마흔이 넘은 나이에 시인이 되겠다고 악착같이 밤을 지새우지 못했을 것이다.그늘짐과 우울함과 희끗희끗한 상처들 속을 헤집는 동안, 내 유소년기의 그늘에서 오래도록 결빙된 채 남아있는 잔설의 기억들이 시가 되어 주었다. 나를 시인으로 살게 해 주었다.


나는 이 시를 통해 내 나름 좋은 시에 대한 규정을 해 본다.시를 쓰는 화자는 유형의 사물이든 무형의 감각이든 그 내면의 본질을 지그시 응시할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 무엇이라고 독자에게 선명하게 제시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이 작품엔 “뒤꼍”이라는 한 단어 속에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차곡차곡 압착되어 있다.  독자는 그저 이 시의 메타포인 “뒤꼍” 여기저기를 산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시인이  말 하고자 하는 “뒤꼍”과 독자가 읽는 “뒤꼍”은 반드시 같은 시공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쯤 서성이다 보면 화자와 독자의 시선이 딱 마주치는 순간이 있게 된다.“뒤꼍”에 담겨진 질료들을 독자가 제대로 알아보게 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눈 맞춤을 통해 내 마음속 뒤꼍을 향해 한결 깊어지는 중이다.  이제야 심장에 한 장쯤 볕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