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등 바다의 등
킬힐 바이러스
너머의 새
2016. 3. 7. 19:48
킬힐 바이러스/강영은
푸른 숲이 사라졌다
숲 속의 나뭇잎, 잎 속에 귀를 묻은 잎사귀가 사라졌다
사슴뿔에 걸린 모자, 모자 속의 비둘기, 비둘기로 만든 장미꽃이 사라졌다
모자를 뒤집어도 장미는 더 이상 장미가 아니다
에스 라인이 아니다 절정이 아니다
뾰족한 굽을 받쳐 든 장미가 넘어진다
엉덩이를 뒤로 뺀 장미가 뒤따라 넘어진다
구두도 허리가 휜다는 걸 깜빡했다
하이 힐! 하고 불러 보지만 찌그러진 구두는 더 이상
장미를 태우지 않는다
장미는 톱모델이지만 구두는 콜택시가 아니다
쓰러져도 울지 않는 장미는 마술사가 아니다
장미는 장미일 뿐
구두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장미의 세상이 달라졌을까
장미가 킬러 힐을 벗어 던진다
나지막해진 세상은 삿대도 아니 달고 돛대도 펼치지 않는
구두라는 걸 겨우 깨달은 눈치다
세상의 모든 무대에게 굽 낮은 구두를 신겨주기로 한
장미, 붉은 장미, 10센티미터 밖으로 우아하게 퇴장한다
장미의 계절이 지나가는 중이다
*킬힐 바이러스/모델이 높은 구두를 신고 워킹을 하다가 넘어지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