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계절의 시읽기
병산 수묵화/강영은
어둠이 붓을 친다 병산이 수묵화로 펼쳐진다 먹물 몇 점 떨구며 날아가는 새한 마
리, 풍경 속으로 사라진다
만대루 넘어 가느다란 달빛, 먼 데 바다를 풀어 놓는지 강물을 파묵(破墨)치는 필선
이 우련하다. 흐르는 것들은 경계가 없다 담담하다
비워냄으로써 완성되는 수묵 깊이에서 마음만 저 홀로 붉은낙관을 찍는 것일까
화폭 밖으로 걸어 나간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밑그림도 없고 되 물릴 수순도 없는
첩첩 산, 겹겹 물.
한지 밖 그대와 내가 만나는 경계는 골 깊은 먹빛, 굵은 일획으로도 메울 수 없는
몰골법*이다.
*몰골법 윤곽이나, 쌍선을 그리지 않고, 먹이나 채색을 찍어서 한 붓에 그리는 법.
ㅡ <문학과 창작>2010년 가을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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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축복같이 투명한 가을 날씨다. 지구 온난화다. 심각한 아열대화다. 102년 만의 가을 폭우다..........며 유난했던 올해 날씨에 아우성들이었지만 어김없이 다가오는 계절과 절기 앞에서는 다시 겸허해질수 밖에 없는 시간,
동물학자 최재천 박사에 의하면 낙조가 장한 가을날 쯤의 저물녘에는 침팬지도 저녁거리로 들고가던 파파야 열매를 발밑에 내려놓고 하늘이 찍는 아름다움의 '낙관' 을 저물도록 바라보다 파파야도 잊고 고개를 숙인 채 숲으로 들어간단다.
저무는 계절인 가을과 저무는 시간인 어스름엔 이렇게 깊고 진한 마력이 있는 것이다. 이 계절 이 시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 강영은 시인의 '병산 수묵화'가 아닌가 싶다. 먹물 들이기 좋은 시간과 청묵빛 그리움이 빚어낸 여백 많은 그림 한 점 말이다. 유화의 짙고 집요한 향기도 없고 수채화의 섬세한 밑 선과 공교로운 채색도 없지만 '비워냄으로써 완성되는 수묵 깊이'가 시인의 표현대로 우련하다.
예술의 여러 방면의 소양이 두루 일천하지만 특히나 그림에 대해선 문외한인 필자에게 다소 생소한 수묵화의 용어와 그 세계도 짐작만 하는 대로도 신선하고 흥미롭다. 밑 선도 윤곽도 없이 일필휘지하여 그림의 형체도 번짐도 두루 나타내는 '몰골법' 이라니 얼마나 내공 깊은 사랑과 그리움이면 이런 경계일까. '첩첩 산 겹겹 물'만 가지고도 짚어지는 한 사람의 뼛(骨)속 깊은 고뇌와 그리움과 그의 한숨과 진퇴양난 ......... 말이다. 말과 사설을 줄이면서 詩의 뼈와 근육을 단단히 하듯 여백과 생략을 늘이면서 그림에 생기와 비의가 감도는 것이다. 그림인 듯 시 한편 잘빚은 시인은 이제 " 붉은 낙관 " 한 점 찍어도 되겠다./ 안차애 (시인)
ㅡ<시산맥> 2010년 겨울호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