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소망의 메시지ㅡ권택명 시집 『예루살렘의 노을 』을 읽고 ㅡ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 강영은
ㅡ권택명 시집 『예루살렘의 노을 』을 읽고 ㅡ
세계의 '과정'을 '신의 경험'이라고 말한 영국의 수학자 화이트헤드의 사상 체계에서 신은 세계의 구조와 대칭하여 거울상을 이룬다고 한다. 세계는 그 자체로는 미완의 것이고, 그 본성상 완결적이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의 기체에 있는 하나의 존재로서의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세계와 신은 서로 반대의 방향을 가지며, 모든 현실적 존재들을 지배하는 원리들은 신에게 있어서는 반대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시간적 세계의 존재들은 여건으로써의 계기들에 대한 물리적 파악과 함께 발생하고, 개념적 파악으로 나아가지만, 신은 비시간적 영역의 영원한 객체들에 대한 개념적 파악으로부터 생겨나서 시간적 세계의 현실적 존재들에 대한 물리적 파악으로 나아간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이론에서 보면 신과 세계는 분명히 대립적이다. 그러나 바로 그 대립 때문에 세계는 다양성과 통일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신과 세계는 대비된 대립자이며, 이 대립자에 의해서 창조성은 대비 속에 다양성을 갖는 합생적 통일로 변형시키는 그 최상의 임무를 수행한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바다 쪽으로 해가 기울고 있다
해는 보이지 않고
구름만 붉다
새가 몇 마리 서쪽으로 날아갔다
고층 아파트 단지 테니스장
벌써 조명등을 밝히고
누군가가 테니스를 치고 있다
방음창이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고기가 헤엄치듯
토키가 죽어버린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휴일 하오
혼자서 창 너머로 바라보는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명암
문득 무엇인가가 한 없이 그리워진다
나는 창가에서 돌아선다
ㅡ <풍경 A>전문-
시집의 1부에서 맨 앞장에 자리한 ‘풍경 A’를 읽는다. 이미지를 밝히고 있는 시어들이 고즈넉하다. 마치 생명체가 준동하지 않는 태초의 풍경처럼 창 너머로 바라보이는 세상은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명암’에 잠긴, 현실이면서 비현실의 내면을 두루 성찰하는 것처럼 보인다. 웅변 속의 침묵처럼 다가오는 저물녘의 스케치 속에서 시적 화자는 문득 무엇인가 그리워져 ‘위장된 평안을/ 등피 안에 가두고 있는’ 알코올램프처럼 내면을 조용히 응시한다. 내면을 밝히는 것은 ‘수 억 광년의 거리를 지나/ 순간의 빛으로 다가오는/명왕성보다 더 먼 별’, 시인의 존재와 삶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다름 아닌 우주적 존재임을 드러낸다.
영원한 객체의 셋트에 대한 제약 없는 가치평가가 최초에 일어난 사실이 바로 신이라면, 신은 영원한 객체의 다양성 전체에 대한 가치평가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가치평가는 영원한 객체들의 비시간적 영역에 대해 신의 원초적 본성(the primordial nature of God)을 부여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요한복음 1장1절에 기록되어진 성구에서 보듯 말, 곧 말씀이 신의 원초적 본성을 나타내는 것인지 모른다. 이에 대해 시인은 자신을 도구로 하는 시적 발화 속에서 신의 말을 들려준다. "바싹 말라 오그라든 꽃잎과 대궁 위로 / 오늘따라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ㅡ<춘란 꽃대를 자르면서>ㅡ에서 보듯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들어나는 일상 속 모습을 성찰히거나 자연과의 교감을 진솔하게 표현하면서 믿음과 소망의 메시지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아카시아 숲
성긴 그늘 사이에 서면
다시 돌아온 새 봄의 은총 속에
5월은
먼 그리움처럼 수줍게 와 있다
지난 겨울
남몰래 흘린 눈물 자국들
기약대로 돌아온 다사로운 은혜 속에서
더러는 꽃눈으로
더러는 잎으로 맺혀
꽃샘바람 속에
피고 이울고
꽃 진 자리마다
상실의 흔적 지우는
푸른 꿈이 혼곤하다
눈보라 견딘 가지가지마다
푸르고 푸른 잎새로 뒤덮이고
보리물결 위로 솟구치는
새들의 전언까지
잡음 없이 수신 되는 이 계절에
내 좁은 가슴에도
부활의 메시지는
해마다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ㅡ<오월>전문ㅡ
그에게 있어 신은 세계의 충만함을 향하여 이끌어내는 무한한 비밀이며, 희망의 영원한 샘이다. 신과 세계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극한 지점을 세계의 신격화라 한다면, 신과 세계의 화해가 남김없이 현실화되는 그 평화의 세계를 향한 신의 구원의 드라마가 지향하는 세계일 것이다. 시인의 이러한 각성과 성찰의 세계는 시어의 선택에 있어서도 맑은 시심을 드러내는 선별적 인식을 갖는다. 이에 대해 김수복 교수는 “자기 성찰에서 우러나온 언어의 숙성을 지키는, 모호함이 배제된 명징한 언어 인식이 돋보인다”고 해설에서 말한 바 있다. “첫 눈 내린 날”이라는 제목을 가진 연작시들은 함축과 생략이라는 기법의 미덕을 살린 시편들로써, 눈이라는 깨끗한 이미지를 통하여 평화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그의 염원이다. 그 중 한 편을 보기로 하자.
첫 눈 내린
새벽길
발자국 두 개
걸어서
하늘나라까지 갔을 것이다.
ㅡ<첫 눈 내린 날1>전문ㅡ
눈 중에서도 첫 눈은 새로움을 뜻한다. 모두 다 잠든 새벽, 깨끗하고 하얀 눈 위에 첫 발자국을 낸 그 길이 하늘나라로 직행하는 길임을 터득한 영성이 돋보인다. 갑년을 맞은 의미의 이 시집은 그래서 더 특별한 것 같다. 거슬리는 바가 없고, 아는 것이 지극한 경지가 되는 이순에 이르러 이렇듯 귀가 순해져 신 새벽의 첫 눈과 같은 심성과 영성을 보여주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이제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완성을 가름하는 불혹의 나이를 지나, 하늘의 뜻을 알아듣는 지천명의 나이도 지났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하늘의 원리, 곧 유교의 최고 덕목인 성인의 도[聖人之道]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하늘의 주재자인 신의 섭리에 따라 사는 복된 삶을 누려왔음을 보여주는 이번의 시편들은 시인의 말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과 통하는 데 가감 없이 진솔하다. “육신의 날은 짧아지는데 영혼의 그릇 또한 빈약하기 그지없으니 그저 아득하게만 보인다”고 말하는 시말의 움직임은 신성 앞에 겸허함과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반성의 미학을 보여준다. 그 행위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어쩐지 부끄러운 바람이 불고/기도하듯이 손” 모아 “소리 없이 지는 잎 새”처럼 숨죽여 먼 나라의 이야기(천상의 이야기)를 듣거나 말하는데 있다.
꽃이 피는 이야기를 하자/사랑하는 이여/잎이 피는 이야기를 하자/사모하는 이여/그 나라에는 이별이 없고/그 나라에는 눈물이 없고/사시사철 사랑의 바람이 부는 나라/ 사시사철 행복의 눈송이가 내리는 나라/ 그런 나라의 이야기를 하자/ 그런 나라의 노래를 부르자/ 사랑은 가고 없어도/사랑은 남아 있는데/ 꽃 피고 잎 피고/ 이별과 눈물이 없는/ 그런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자/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는/그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자/ 긴 세월 못 다할/ 그런 이야기를 하자/ 사랑하는 이여 -<먼 나라 이야기>-전문
이별과 눈물이 없는 곳, 꽃 피고 잎 피는 곳, 사시사철 사랑의 바람과 행복의 눈송이만 있는 곳, 그 먼 나라야말로 신과 세계의 화해가 남김없이 현실화되는 평화의 세계, 성속의 세계일 것이다. 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그의 시적 인식은 현실의 삶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창조자인 신의 호명에 부응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피창조자의 절대적 사명임을 다시금 인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시 속에 나타나는 페르소나는 갈릴리 바다나 무화과나무 그늘, 예루살렘의 노을 속이거나 양화진, 가시면류관이나 새벽별, 성탄 전야처럼 장소와 때를 불문하고 존재한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예수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흔드는 종려나무 가지에서 이미
배신의 웃음은 떨어지고 있었다
빌라도 법정에서
죄 없는 그를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 사이에서
한없이 몸을 떨었을
우리들의 마리아
울지 말자
올리브 숲에 잠기는
예루살렘 고성에 지는 노을
-<예루살렘의 노을>전문-
표제 시<예루살렘의 노을 >은 인류의 구원자로 지칭되는 신의 페르소나에 도전하는 인간의 죄악과 그 고통에 동참하는 마리아를 대비시킴으로써, 파노라마처럼 폭넓은 스토리를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에 새겨진 성화처럼 아름다운 이미지로 형성하는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 시적 내용과 주체가 균형감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감정을 절제하므로써, 드러냄보다 감추임을 미덕으로 하는 시의 서정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오랜 시적도정에서 연마된 솜씨는 깨어지기 쉬운 언어의 유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세공의 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시집을 읽는 내내, 일본 열도에 밀어닥친 지진과 쓰나미, 문명이 개진된 이래 지속적인 발전을 유지해왔던 인간의 삶이 그동안의 공과도 헛되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충격적인 영상이 연달아 도착한다. 쓰나미의 횡포가 인간의 문명으로 해결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의 발현적 현상처럼 보인다. 물질과 정신의 교차점에 있는 인간이 생각할 때에 자연계에 있는 것은 모두 인과(因果)의 법칙에 의해서 지배되므로 인과관계를 더듬어서 점차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후에는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목적이나 의장(意匠)을 창출한 신이 존재하는 곳, 어쩌면 세계는 절대자인 신의 의지의 일방적인 실현의 장소일지 모른다.
"베드로의 등 뒤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화염을/ 깊숙한 두 눈동자 가득 담고/고통 받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베드로가 떠나온 로마로 들어간다고/ 다시 십자가를 지러 가신다고/주님이 나지막이 말씀하신다.... 중략..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 맨 마지막 장에 수록된 시 '가시면류관'을 읽고 책장을 덮는다. 흔들림 없는 믿음 안에서 절대자의 세계로 나아가는 그의 시편들이야말로 신의 창조성을 통하여 삼라만상에 깃든 존재와 본질을 탐구하는 복음서이며 그 은총에 감사하는 묵상의 기도서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하나... 문득 눈앞이 개진되는 큰 위로를 느껴본다.
문학과 창작, 2011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