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뉴스

고경숙이 만난 시인/경인예술신문

너머의 새 2016. 4. 4. 15:02





제주 어느 바다를 거닐고 있던 그녀의 편지에 온통 ‘촉’이 박혀있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긴 문장을 완성하고 지금 그녀가 앓고 있다는 통증은, 몸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감각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쏘아대는 활의 관성은 아닐까?

불과 물의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탐미주의자, 치명적 독성을 내장한 ‘녹색비단구렁이’는 바닷바람에 휘청거리며 보일 듯 말 듯한 형체를 찾아, 오늘도 느린 시간에 엎드려 읍소한다.
아주 하찮지만 그래서 소중한 가치들을 위해......



풀등, 바다의 등
강 영 은



풀등이란 말, 풀에게도 등이 있다는 말
입에 풀칠을 하거나 입을 다문 소식에 우표를 붙이거나
늙어가는 입술에 착착 달라붙는 말 같아서 참, 좋다
풀여치가 밟고 가고 실잠자리가 알을 낳는 등
사는 동안 그보다 가벼운 등은 못 만났지만
제 몸보다 커다란 짐승의 발자국은 그냥 눈감아버리고
가냘픈 등에게만 허락하는 말 같아서 참, 따뜻하다
밭고랑에 박혀 일만 하던 어머니도
학자금을 빌리러 가던 아버지도
멀리서 보면 한 포기 풀, 이제는 풀만 무성한 무덤가에서
살랑대는 말 같아서 참, 쓸쓸하다
연인들이 반지를 교환하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풀등
참, 좋고 따뜻하고 쓸쓸한 등이 있다는
대이작도로 간다
풀반지로 족할 사랑 하나 만날 수 있다면
그 등에 기대어
파도와 몸을 섞는 이름 없는 풀이어도 좋겠다
제자리를 떠날 수 없는 풀들이
섬의 안쪽을 파랗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휘어질수록 물보라를 날리는 물빛 등만 출렁일 뿐
풀등은 보이지 않는다
풀등은 모래바람 날리는, 모래로만 말하는 등
물고기의 뼈가 삭아져 내린 바다의 등
바닷바람에 휘청거리던 내 등이 펴진 건
은갈치 떼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등을 본 직후였다

25억 1천만 년 전에 수장된 나를 다시 보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풀등 : 대이작도, 바다 한가운데 길게 펼쳐진 모래섬.



- 경인예술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