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화(音畵), 문이 된 몸의 바코드/김륭
음화(音畵), 문이 된 몸의 바코드/김륭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이다. —롤랑 바르트
1. 음화(音畵)와 음화(陰畵) 사이
강영은은 지금 세상을 둘로 읽고 있는 중이다. 관념마저 사물처럼 투명하게 어루만지는 시선으로 그녀는 일단 자신의 몸부터 둘로 나눈다. 롤랑 바르트가 “두 종류의 밤을, 하나는 좋은 것이고 하나는 나쁜 그런 밤을 차례로 체험” (『사랑의 단상』- 「그리하여 밤이 밤을 밝히었다」부분)하듯, 그러나 “내 욕망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독자들 앞에 선다. 음화(音畵)와 음화(陰畵) 사이에 바코드가 찍힌 내 몸이 놓여있고, 그것은 자연의 일부로 편입된 존재론적 욕망 혹은 “내가 모르는 음역”(「피아노」부분)에 대한 탐색이라고 선언한다.
강영은은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사용한다. 오직 바코드가 찍힌 자기 몸 안의 고유 언어만을 유통시킨다는 뜻이다. 강영은이란 텍스트의 진정성은 여기서 나온다. 이를테면 그녀의 글쓰기는 몸의 부름에 스스로 답하는 시간의 기록으로 「피아노」, 「몇 겹의 늪」 등의 표지로 이미지화 된다. 그녀는 자연친화적인 일상의 시간을 망토처럼 몸에 휘감고 과거와 미래를 드나든다. 따라서 강영은이 독자들에게 보여준 존재론적 욕망에 대한 탐색은 시적변주가 아니라 어떤 기억의 형식을 빌린 ‘곡예’일지 모른다. 쉽게 말해 그녀는 시적주체와 하나로 봉합될 수 없는 불온한 세계를 몸으로 ‘때워’(?) 감싸 안는다. 짙은 서정 위에 뼈대를 세운 그녀의 여성성은 분명 ‘육식’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공감과 이해를 불러일으키는 까닭이다. 언어로 사용하는 몸과의 결합을 통해 보다 새롭고 구체적인 것으로 재정의 하고 싶은 여성성이 허황하지도 오만하지도 않은 시선으로 독자들이 슬쩍 숨긴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까지 어루만져내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뺨에 볼우물을 판 첫 사랑처럼 무엇이나 삼키는 혀의 혀 같아 소리의 촉수를 잡아 뺀 순간 입술이 뱉어낸 것은
쏙, 이라는 말,
딱딱한 등을 숨긴 개펄의 가슴팍에 한 주먹 소금을 뿌려주면 튀어나오는 말하자면, 개펄에 박혀있는 가장 짧은 말,
내가 흘린 눈물 중, 허옇게 말라붙은 지척을 십리나 들어가게 만든 가장 배고픈 말도 그 말이어서
수평선 밖으로 밀려나간 썰물을 기다리는 폐 염전의 그림자처럼 네 눈동자 속으로 스며드는 말,
등껍질이 발갛게 타들어가는 생의 비의는 왜 그리 달콤한지 솟구치는 말의 물결 속에서 구워지는 말, 갯가재의 잘 익은 몸속에서 빠져나오는 분홍빛 말,
—「쏙」부분
쏙, 이라는 말을 두고 강영은은 그것을 “내가 흘린 눈물 중, 허옇게 말라붙은 지척을 십리나 들어가게 만든 가장 배고픈 말도 그 말이어서” “수평선 밖으로 밀려나간 썰물을 기다리는 폐 염전의 그림자처럼 네 눈동자 속으로 스며드는 말,” 이라고 고백한다. 감각적으로 형상화된 이 관념의 세계는 독자들에게 스스로 형용하기 힘든 내부의 뜨거움을 느끼게 하며 그것을 몸 바깥으로 추인하게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울음’은 너무 투박한 것이 아닐까?” 롤랑바르트의 이 물음에 강영은은 일단 동의한다. 그리고 “등껍질이 발갛게 타들어가는 생의 비의” 속에서 구워지는 울음을 쏙이란 말로 환치한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거나 밖으로 볼록하게 내미는 모양, 쉽게 밀어 넣거나 뽑아내는 모양, 대번에 빠지거나 터지는 모양, 어떤 것에 매우 탐닉하는 모양으로 꺼내놓는다. 그렇다. “말, 그것은 무엇인가?/한 방울의 눈물도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얘기하리라.” (롤랑바르트,「눈물의 찬가」부분)는 아포리즘 앞에서 그녀는 “시의 마중물로 삼고 싶어 딱딱한 사전을 삼킬 때면 순식간에 흰 갈기를 날리는 단말마, 말의 단애를 뛰어넘는 모국어 중에서 가장 걸음이 빠른 말,”(「쏙」부분)을 간절하게 떠올렸는지 모른다. 다소 관념적이고 산문적으로 읽히는 강영은의 언술은 기존의 문법과 어법에 충실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다. 다만 고정된 의미망을 벗어나려는 그녀의 욕망이 내부에서 울컥거리는 감성을 흰 갈기를 날리는 단말마처럼 풀어놓을 때의 당혹감은 평자가 아니라 독자들의 몫이다.
2. 젖은 봉투 속의 피아노
서정시 자체의 존재의의와 의미를 현대적으로, 새로운 어법으로 재규정하려는 강영은의 의지는 이번 시편 곳곳에서 묻어난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서정의 속성을 몸으로 뒤집으려는 그녀의 시도는 “내면의, 간절한 그 무엇이, 소리를 젖게 했는지/축축한 외피에 손을 얹지 않아도/밑둥치가 잘린 나무의 사연을 읽어낼 것 같다” (「젖은 봉투」) “나무를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찢어진다.”는 등의 진술로도 엿볼 수 있다. 이른바 주체와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행복한 서정시와 양자가 끊임없이 어긋나며 불화하는 불행한 서정시 사이, 그녀는 몸을 낮추고 서정시의 내용물은 원래 둘로 나눠진 하나라고 말한다. 불행은 행복에, 반대로 행복은 불행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녀의 진술은 자신의 몸 안쪽으로 풍경을 끌어당기는 힘에서 나와 단절된 외부마저 끌어안으려는 몸짓으로 재생산되면서 보다 깊고 울림이 있는 생의 단면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처럼 강영은이란 텍스트가 일관되고 추구해온 존재론적 욕망에 대한 탐색은 「피아노」와 「젖은 봉투」속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이를테면 “허공이/들어가는 문인지 나가는 문인지/궁금해질 때가 있다”(「피아노」)는 구절에서 허공을 몸으로 슬쩍, 바꿔놓고 강영은에게 생을 물으면 뭐라 답할까? 어쩌면 이미 오래 전에 답을 했는지도 모른다. “허공이 꽃피는”(「제논의 화살」부분) 일이라고. 인간의 사랑이 시작되고 눈물 또한 시작되는 지점이다. 바로 여기가 우리의 욕망이 분열되고 파편화되는 곳으로, 보다 시적으로 말하면 생은 불가능한 공간으로부터 시작된 시간의 육체이자 음화(音畵)라는 그녀의 시적인식이 잠행하는 영역이다.
허공이
들어가는 문인지 나가는 문인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딱딱하게 굳은 페달을 한꺼번에
밟는 종아리와
관 속을 기웃거리는 다리,
희고 검은 건반들은
더 빨리, 더 높이,
소리가 되길 원하지만
내가 모르는 음역이 있는 것인지
당신은 푸르스름하다
—「피아노」부분
하지만 그것은 오래 전 이야기, 숲의 미간에서
새어나오는 비명은 고요하다
내면의, 간절한 그 무엇이, 소리를 젖게 했는지
축축한 외피에 손을 얹지 않아도
밑둥치가 잘린 나무의 사연을 읽어낼 것 같다
수취인이 누군지, 소인이 지워진 봉투의 등,
서서히 찢어지는 슬픔을 나도 한때
가졌던 적이 있다
—「젖은 봉투」부분
3. 가면 그리고 암호
가면의 본질적 기능은 표정을 바꾸는 데 있다. 백과사전의 말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표정이 아니라 몸을 바꾸고 싶은 욕망의 두꺼운 표지다. 인간은 스스로가 단순한 자연물로 그치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내면에 어떤 초월적 대상을 느끼고자 한다. 가면은 이처럼 모순된 이중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그 상징적 대상과 인간 사이를 잇는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가면을 쓴 사람은 암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아니 사용할 필요가 없다. 현란한 수사와 말장난은 거추장스러운 장식에 불과하다. 『스스로 우는 꽃잎』 『나는 구름에 넘어진 적이 있다』 『녹색비단구렁이』 등 이미 세 권의 시집을 낸 강영은의 언어가 요란하게 뒤틀리거나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호하고 불확정한 기호로 변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
강영은이 보여주는 가면은 사전적 의미와는 조금 다른 겹이 있다. 14세기 이집트 왕으로 1922년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된 무덤으로 유명한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살별에 대한 함의서」)이나 악어가 쓴 가면(「몇 겹의 늪」)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소유한 삶의 표지, 이를테면 주체와 세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와 단절을 함의하고 있다.
그녀는 상징적 대상과 인간 사이를 있는 매체역할을 하는 가면이 아니라 투탕카멘의 얼굴에 황금가면을 씌운 사람들의 말하기 방식과 기억의 형식에 주목한다. 그리고 카페 휘가로에서 악어가면을 쓴 사람이 아니라 “사람가면을 쓴 악어”를 본다. 언어를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사용하는 그녀의 관심이 서정에서 사회현실로 옮겨오면서 그녀의 시는 구체성이 흐트러지지 않을 만큼의 환상성을 확보한다. 자본주의세계 곳곳에서 가면처럼 발견되는 완강하면서도 처절한 타자의 생생한 얼굴까지 몸으로 담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투탕카멘의 얼굴에 황금 가면을 씌운 사람들의 말하기 방식이며 죽음의 키스에 달콤하게 무너진 왕조의 짐을 싸는 일이다.
깨어진 유리는 없었지만 시간에 반사된 사람들이 사막을 지나갔다.
이것은 모래가 써내려간 연애편지, 강물의 깊이를 묻지 않는 눈의 보고서, 몇 개의 별을 뒷문으로 날랐던
당신과 나와 투탕카멘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의 형식이다
당신과 나는 강가의 별빛을 주워 무덤을 쌓았다 죽음을 삶이라고 번역하는 오류는 없었지만 삼각형 꼭대기에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미래를 피뢰침으로 얹어 놓았다
—「살별에 대한 함의서」부분
완강한 턱 속의 긴 혓바닥이 쉬지 않고 늪지대를 쏟아냈다.
아무리 지도를 들여다 봐도 찾을 수 없는 오지였지만
금화처럼 빛나는 물결을 토해낸다는 가 본 적 없는
늪의 황금 律이 왼쪽과 오른쪽이 다른 옆얼굴을 보이며
거침없이 탁자 사이를 흘러 다녔다.
어두워가는 늪지대가 가면 속에서 이글거렸다.
창가에 놓인 맨드라미 화분은 피 빛으로 만발했다.
타조백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잡아먹고 죽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악어가 출몰했다는 소문이 카페 휘가로를 달구었지만
사람 가면을 쓴 악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여전히 카운터에 한 손을 고인 채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사랑 따위나 마시라 지,
침과 눈물로 더렵혀진 가면이 입 근육이 마비된 채
현관에 남아 있었다.
—「몇 겹의 늪」부분
현대시의 환상성이 언어의 불확정성에 연유한다는 측면에서 강영은의 이번 시편들은 보다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다. 여성시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환상이 왜곡된 가족관계나 성적인 차별을 고발하기 위해 차용된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렇다.
강영은은 현실의 영역에서 환상을 바라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영역으로 환상을 불러들인다. 강영은의 시적욕망이 객관적이고 아름답게 발화하는 지점이다. 그러니까 강영은이란 텍스트는 현실의 영역이 환상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환상이 삶을 다스린다는 것이다. 결국 현실과 환상 사이의 장막은 나아가 몇 겹 늪으로 진화한다. 이것은 일종의 시적‘주술’이다. 환상이 현실을 들여다보는 순간의 눈은 카메라보다 더 논리적이고 객관적일 수 있다. 추측컨대 현실이 몇 겹의 늪임을 시의 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영은은 환상을 시적화자의 몸속으로 불러들여 현실세계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악어가 출몰했다는 소문이 카페 휘가로를 달구었지만 사람 가면을 쓴 악어를 보지 못한, 여전히 카운터에 한 손을 고인 채 블랙커피를 주문하는 사람들에게 강영은은 “휘핑크림을 잔뜩 얹은 사랑 따위나 마시라”고 비웃지만 결코 일탈의 공간을 넘어서지는 않는다. 이는 ‘시는 놀이나 게임이 아니다’는 명제를 앞세운 그녀의 세계관이 들끓는 감정을 통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강영은의 몸은 결국 하나의 문으로 열리고 닫힌다. 여기서 말하는 문은, 지금까지 그녀의 시를 놓고 일부 시인들과 평자들이 말하는 기호와는 다른 의미다. 시적주체는 이 문을 통해 세계로 나아가기도 하며 사물을 포함한 세계가 편입되어 재구성된다. 강영은의 시에서 허위와 허상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물론 서사적인 공간이 다소 부족하고 평면적으로 읽히는 한계 또한 이와 맞물린다. 몸도 어딘가 허물어진 곳이 있어야 문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도 자신의 몸 안에 조용히 앉아 시적주체를 둘로 나누고 있을 강영은이란 텍스트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거는 일은 즐겁다. 롤랑 바르트처럼 나 또한 자주 내 욕망의 어둠 그 자체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빛보다 역동적일 것 같은 기억의 스펙트럼이 몸을 통해 재생되는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한다. 경이롭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의 모든 문은 우리 몸 안쪽에 달려있는지 모른다. / 김륭
김 륭(본명 김영건)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07년 한국문화예술위 창작기금 수혜,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