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관성에서 벗어나, 사물의 전체를 보는 시선/장무령

너머의 새 2019. 1. 8. 13:39

 

 관성에서 벗어나, 사물의 전체를 보는 시선/장무령(시인,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인간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관성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성이 삶의 질곡을 헤쳐 나가는 데 가장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힘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인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만약 시를 쓰는 행위의 특수한 의미를 인정한다면, 시인의 특별함이란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의 문제를 보는 관성에서 벗어나 생명의 문제를 향하는 것, 그때 나타나는 생명의 문제를 시의 언어로 형상화된 생명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만만치 않은 일일 것인데, 관성을 따를 때만이 비로소 현실이 강제하는 원리에 편입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막을 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관성에서 벗어난 것은 곧 현실과의 전면적인 대립을 지향하는 길에 나선다는 의미에 가깝다. 결국 시를 쓰는 것은 관성을 벗어난 언어,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가리지 않은 맨 모습이 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관성에 가려진 곳마저 밝혀 세계의 ‘전면적’ 아름다움에 다가서기, 이때 ‘전면적’이란 바로 관성의 경계를 뛰어 넘어 새롭게 직조되는 세계의 전체를 의미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것’을 말하되 ‘그것’을 넘어서 ‘그것 아닌 것’을 밝히는 언어의 묘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시들이 이 같은 경우라 할 것이다.

   

 

 

 

   말에 붙잡혀 사는 자,

   꽃들에게 나무들에게 새 이름을 붙여주고 있다

    K에게도 미루나무 담록색 이파리 같은 시절이 있었다

    내일은 언제나 새로운 기차처럼 다가왔다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말에 붙들려 들떠 있는 자,

    언제나 낡은 정거장에 홀로 중얼거리며 서 있는 기분이다

    이 기차를 놓치면 다음 기차가 오겠지 그러나

    내일은 더 이상 이름 그대로의 햇것이 아닌

    꼬질꼬질 때 묻은 것, 이미 구겨진 것

   

    말을 부리려다 말에 부림을 당하는 자,

    기껏 사물에다 때 낀 이름이나 붙여주고 있다

    붙여주는 것이 아니라 새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울증 환자처럼 도박꾼처럼 늘 정거장에 멍하니 서 있어야 하는 것

    구겨진 이름이나마 붙이며 존재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것

    때로는 구겨진 말이 칙칙한 나뭇잎 속으로

    욜랑욜랑 파고들기도 한다는 것

    -최서림, 「욜랑거리다」, 『현대시』(2011년 12월호)

 

  “말”은 인간의 삶의 표피이다. “말”을 통해 인간은 자신을 현현하고 또한 외물을 규정한다. 단단한 말의 외피 안쪽에 ‘진짜’가 있다. 말은 ‘진짜’를 지향하나, 말의 겹이 두꺼워질수록 그것은 ‘진짜’로부터 멀어지는 것. 결국 그러한 말은 “꼬질 고질 때 묻은 것, 이미 구겨진 것”의 차원으로 전락한 “내일”을 이야기하는 “말”이며, 그때 인간은 말을 부리는 자가 아닌 오히려 “말의 부림을 당하는 자”로 전락할 터이다. 그러데 「욜랑 거리다」가 재미있는 이유는 이러한 “구겨진 말”에서 “때낀 이름” 이상의 의미를 읽어내는 통찰력 때문이다. 달리말하자면 “구겨진 말”이 “칙칙한 나뭇잎”을 “욜랑 욜랑”파고드는 생명의 신호라는 것까지 묘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낡은 정거장” 같은 현재를 반복하게 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현실을 견디는 가장 구체적인 힘 또한 “말”이라는 것을 직시하기. 결국 말은 세계의 ‘진짜’ 그대로의 “햇것”으로부터 인간을 멀어지게 하는 것이며 그러나 동시에 “존재 이유”를 찾게 하는 근거라는 양면성을 시인은 모두 본 것이다. 이는 사물의 한 단면이 아닌 그것의 전체를 볼 줄 아는 ‘큰 눈’를 시인이 가졌기에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큰 눈’으로 세계를 말하는 시만이 새로운 아름다움에 빠져드는 재미를 우리가 맛보게 할 것인데, 다음의 시도 마찬가지이다.

 

  젊은 정원사의 돌연사로 정원은 폐쇄되었다

  새 정원사 자리를 염탐하는 사내들

  정원은 불면으로 물컹거렸다

  구름 사이를 들락거리며 밤을 지키는 달,

  발소리 죽이는 사내들 꽁무니에 푸른 가시광선을 찔러 놓는다

  그런 밤, 죽은 정원사와 숨박꼭질도

  제 그림자와 엎치락거리는 혼잣말로 끝났다

 

  (거기 바깥은 봄인가요?)

 

  꽃 멀미가 밀어 올리는 수액에 몸이 뜨겁다

  죽은 정원사가 버려둔 가위에 녹물이 스밀 때

  도드라진 유두의 발기, 붉은 기억들, 안에서 밖으로 진저리친다

  가까스로 울음의 주위를 조절하던 그녀의 뒤꿈치 같은 시간

  어디에다 감추어 둘까

 

  마른 가랑잎 들추어보는 거기, 봄조차 길을 잃었는데

  담장 밖 콘크리트 심장에 죽은 정원사 속옷 겹쳐 입은

  담쟁이넝쿨 시커먼 그림자로 기어 붙는다.

  - 성은경, 「바리케이드」, 『시로여는세상』(2011 겨울호)

 

 「바리케이드」에서 “죽은”은 “정원”을 “폐쇄”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의 정신을 강렬하게 “발기”시키는 하나의 작용이다. “정원사”가 죽음으로써 “정원사”는 그리고 그의 “정원”은 비로소 완성된다. 이때의 완성은 마침표를 찍는 자리가 아니라, “유두”를 도드라지게 하는 발기의 힘으로 “그녀의 뒤꿈치 같은 시간”이 “죽은 정원사”에게 “기어 붙는” 시작임을 노래한다는 점에, 「바리케이드」를 읽는 이유가 있다. 즉 한 존재의 죽음은 존재의 발기점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 비로소 존재의 완전한 의미가 현현된다는 것, 이를 말하는 데에 「바리케이드」의 재미가 있다.

 

  襃祿의 계절이어서 당신은 바늘로 꽉 찬 상자를 들고 있네 상자가 열릴 때마다 물 속 풍경이 바늘을 품는 가을이어서 수면 위로 내려앉던 실잠자리가 눈썹 같은 針에 꿰여 오래도록 물위에 자수를 놓네 동그란 파문을 일으키는 수틀 곁에서 등을 찌르는 바늘 끝이 아파왔지만 수틀을 건너는 당신의 手작업은 보이는 것도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천변을 거니는 귀가 물구나무서네

 

  붉은 혹은 갈색의 아름다운 바늘이 나를 불러 종일토록 당신 곁을 서성였네. 은장도를 꺼낸 햇살이 나이테를 그을 때마다 잿빛 몸피에서 떨어지는 직립의 바늘 아래 나는 상처를 숨긴 구절초 한 송이로 피어 있었던 거였네 모호한 꽃잎은 양재川으로 흐르고 잠실로 떠나지 못한 당신의 오래된 비석처럼 나는 나무의 입에서 강물의 입으로 흘러간 푸른 말들을 지우네.

 

  당신의 볼 언저리에 흐르는 강물을 口碑文學이라 불러도 될까 창가에 박혀 운적 있는 당신도 나도 미늘 같은 바늘 하나로 강물을 건너고 말았으니 등이 아픈 사랑은 혀끝에 새겨진 碑文을 침 발라 넘기는 거라고, 그냥 저냥 떠도는 바람의 箜篌引이나 들어도 될까

- 강영은, 「양재 川邊의 메타세콰이어」(『시와 표현』 2011 겨울호)

 

  “포록”의 계절은 수다스런 말의 성찬으로는 결코 불가능 한 것이다. 그것은 시인에 따르면 “등을 찌르는 바늘 끝”을 견디며 일관되게 행하는 “자수”를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특별한 것은 “물위에 자수”를 놓는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데 있다. 물위에 수를 놓는 것은 “바늘을 품은 가을”을 천변에 수놓으며 무한한 소망을 끊임없이 흘러가게 하는 차원에 해당되는데, 이때 그것이 가 닿는 자리는 최종의 그리움일 것이다. 결국 인간을 그리워하게 하는 것이란, 그리고 그 주변을 서성이게 하는 것은 아픔을 견디며 수놓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무늬라는 것을 말하기가 「양재 川邊의 메타세콰이어」의 요체이다. 이때 시인의 자세는 진실을 구현하는 자인 당신의 삶에 겹쳐지는 것, 그리고 다름 아닌 “천변”을 거닐며 “물구나무 서”는 귀를 가지는 것이며 이를 통해 시인의 언어는 “입 속에 새겨진 비문”의 내력을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에 안겨 썬그라스 쓰고 가는 아이 썬그라스 쓰고 빨리 가는 어머니에 안겨 사라져 버린 여자 아이 어머니가 되기 위해 빨리 걸어 보이지 않는 세계로 한 획을 그으며 멀어지는 흔적의 아이 바다로 늘어진 그림자 밟으며 어머니를 만나 떠오르는 시간 시간을 품고 가는 살진 가방 남자가 되어버린 아이 저기 걸어가는 그녀 여자 그 아이

 

  조용하게 꼬여 기억과 물결을 낳는다 이제 서로 나란하니

 

  너를 본다 잠에 들어 머리를 젖히고 눈을 감은 시간 본다 숨결 본다 손을 모으고 앉아 다리를 뻗고 몸을 낮추어 세상에 나를 버리고 어둠으로 접어든 너를 본다 짙은 머리 가는 손길 땅에 박은 다리까지 자라는 하늘 너를 본다 머리는 한 쪽으로 기울어 다시 세우나 감긴 눈과 코와 입술 속으로 너를 본다 사라지는 길로 가고 가던 내일 본다 산과 겨울의 한 저녁 지나던 비포장 본다 저 세상으로부터 다가오던 시간들 어둠에 잠기던 잎사귀들

-박승, 「모든 손을 뒤집고」, 『시평』(2011년 겨울호)

 

  박승의 「모든 손을 뒤집고」를 관통하는 것은 “나를 버리고” 가는 “아이”의 여정이다. 시인은 ‘멀어지는 흔적/되어 버린/사라져버린’ 아이의 길을 더듬는 자인데, 이 작품이 주목되는 이유는 “나를 버리고” 가는 “아이”를 나의 옆에 존재하게 하기 때문이다. 즉 “나”와 마찬가지로 “조용하게 꼬여 기억과 물결을 낳”으며 “어둠에 접어든” 존재로서의 “너”이며 그러므로 이때의 “너”란 또 다른 나의 현재이며 비(非)현재라는 것. 이를 직시하는 시인이기에 “아이”의 여정을 훈계하는 조의 민망한 언와는 격을 달리하는 “산과 겨울의 한 저녁 지나던 비포장” 길로 몰려오는 “어둠”이 묻어나는 언어를 시인은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11년 12월호(2011, Decmber)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