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 세계를 건너는 아프고 따뜻한 시선/이승희
비극적 세계를 건너는 아프고 따뜻한 시선/이승희
- 강영은 시집 『최초의 그늘』(시안, 2011)
진정성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시인 스스로 자신이 쓴 시에 대해 얼마나 정직한가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정성의 출발점은 절실함에 있다고 믿는다. 기본적으로 시 쓰기가 나와 세계의 관계맺음에서 생기는 다양한 삶의 모습들에 대하여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시 쓰기의 진정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시세계를 가장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또한 진정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시인으로서의 일관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가 중요한 것은 시 속에서 자신의 내밀한 목소리를 통해 자신과 부딪치는 세계에 대해 얼마나 정직하게 반응하는가의 문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성 있는 시라는 것이 시인의 세계를 단순하게 그려내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즉, 쉬운 시, 누구나 공감하는 정도를 두고 진정성을 말할 수는 없다. 시적 진정성의 문제는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즉, 진정성을 말할 때 시적 표현의 방법보다는 시인 자신이 부딪치는 세계에 대해 얼마나 가식 없이 반응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강영은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최초의 그늘」은 시인이 맞닥뜨린 자신의 세계에 대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이 시인에게 있어 물론 새로운 것은 아니다. 세 번째 시집인 「녹색비단구렁이」에서 집중적으로 그려졌던 자신의 존재성과 자의식의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이 쉼 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자신의 몸을 더욱 낮춤으로써 내면을 강화하여 세계를 건너고자 하는 날카로움은 더욱 단단해졌다. 불화에 대응하는 절실함으로 자신만의 언어의 집을 만들어가는 시인의 고단한 여정을 살펴본다.
가혹한 세상에 던지는 다정한 시선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4부를 제외한 시편들에서는 시인 특유의 다층적인 언어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입체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한 입체적인 풍경들 속에서 시인의 존재는 한없이 낮고 조용하다. 물어뜯고 격렬한 싸움을 벌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며, 가혹한 세상에 대해서는 다정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 없는 순응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자신의 존재찾기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마르는 법을 터득한 나는 얼룩진 흔적을 훔쳐 서늘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이름 속에 태양을 들인 유래를 찾네/무성한 숲의 일렬횡대 혹은 종대, 정렬해 있는 그늘의 배열 방식과 그늘의 권력에 대해 눈이 멎었을 뿐, 낯익은 얼굴을 만난 것처럼 물이 결핍된 계절을 탓하진 않았네
-「여름궁전」부분
뜨거운 폭염 아래에서의 그늘은 누구에게나 마땅히 쉴 곳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그 그늘은 쉴 수 없는 곳이거나 오히려 나를 무너뜨리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시인은 분명 그러한 인식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마르는 법을 터득해가는 중이다. 태양의 연금술이 백양나무 잎사귀를 펼치거나 무성한 숲의 일렬횡대 혹은 종대라는 세상의 방식에도 한없이 조용하고 나지막하다. 그늘조차도 안전하지 못한 세상 속에서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으며 걷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밤 나무는 유정하게 부풀어 크고 흰 빵이다/ 두 사람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빵이 된 것처럼/ 죽음의 달콤한 풍미마저 풍긴다/ 나무를 집어 삼키는/ 허공의/ 저토록 깊은 허기가// 이별을 나누는 이 별의 방식이라면 채워지지 않는 나의 허기는 빵을 굽는 일, 화장터의 연기처럼 새어나오는 빵 냄새를 맡으며 이 별에서 한 발짝 멀어지는 이별을 배부르게 먹는 일일 것이다// 유리창의 미각이 딱딱하게 굳은 밤의 풍경을 꺼내 먹는 동안 하얀 덩어리가 부풀어 오른다 뜨거운 빵틀에서 구워지는 빵, 잘 익은 슬픔 속으로 허기를 밀어 넣는 이 모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 슬픔의 미각 부분
끊임없이 자신을 밀어내는 가혹한 세계임에도 시인은 그 다정함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죽음의 냄새조차 달콤하고 ‘유정하게 부풀어 크고 흰 빵’이라는 인식은 시인 스스로 세계 속에 속한 유한한 존재라는 인식과 더불어 세상을 보는 거둘 수 없는 따뜻함에 있다. ‘나의 허기는 빵을 굽는 일’이고, 그것으로 ‘이별을 배부르게 먹이는 일’은 자기연민이 아닌 보다 적극적인 자기 존재의 확인이다. 더불어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질문과 확인을 통해 자신을 극한으로 소리 없이 몰아가는 일은 불편하고 가혹한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인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스스로 묻고 질문하는 과정을 통한 화해의 방식을 보여준다.
벼랑을 넘어 가는 바람을 따라가는 길에서
꽃이 핀다는 것은 극단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극단조차 또 다른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어쩌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시작이 된다. 다시 피어나든 썩어가든 끝에 이르고서야 시작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람의 행보는 벼랑을 넘으면서 시작 된다 관계의 사이에 서식하는, 사랑합니다, 사랑합시다, 라는 종결형 어미에 대하여 대답하는/행간에 머리를 들이민 바람의 눈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문장은 마른 풀 쓸리는 벌판, 수백만 마리의 새떼가 날아가는 장면은 그 다음에 목격 된다/ 고도 높은 울음이 통과할 때마다 피기를 반복하는 북북서의 허공을 바람은 꽃으로 이해한다 사타구니를 오므렸다 펴는 바람의 편집증에 대하여 여러 번 죽어 본 새들은 안다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 「바람의 금지구역」부분
벼랑은 말 그대로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곳이지만 그곳을 넘어서야 또 다른 세계에 닿을 수 있는 경계이기도 하다. 벼랑에 서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끝내 벼랑 너머의 것을 볼 수 없다. 바람의 행보가 벼랑을 넘어 시작된다는 것은 이미 세상이 시인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는 말이고,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단절되어 있음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모든 관계의 종결형 어미에 대한 대답이라면 시인이 느끼는 존재의 고독이 얼마나 비장한 것인지 느낄 수 있다. 그런 비장함을 풀어 놓기에는 어떤 문장도 부족하다. 뿐만 아니라 세계는 그런 고통스런 울음조차 꽃으로 이해하거나 받아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여러 번 죽어 본 새들은’ 다시 한 번 고통스럽게 깨닫는다. 그리고 ‘허공은 날개가 넘어야할 겹겹 벼랑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벼랑 너머를 보게된다. 시인은 이를 통해 세계와 자신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에 동의한다. 비록 이 또한 화해의 다른 방식이라 하더라도 세계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자신의 절대고독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 벌어지지 않는 입술과/ 깊이 모를 눈동자로/ 서로의 벽을 고스란히 끌어안는 중이다// 손은 없고 가슴만 있는/ 눈은 없고 눈물만 있는 벽의 힘으로/ 면벽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관계여,// 방금 지팡이를 내려놓은 노인의 입으로/ 더 이상 짖을 수 없는 개의 입으로/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門의 입으로/ 말하건대,// 나에게도 부수고 싶지 않은 벽이 있다/ 등이 허물어 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
- 「침묵의 벽」 부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우선 상대를 똑바로 볼 수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바로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똑바로 설 수 있어야 한다. ‘서로의 벽을 고스란히 끌어안는’일은 그래서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고 먼 길이었는지, ‘손은 없고 가슴만 있으며’ ‘눈은 없고 눈물만’ 있지만, 오히려 그것의 힘으로, 그것의 진정성으로 ‘면벽의 등을 쓰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자신의 세계에 대해, 고독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내면에게 건네는 위로이다.
최초의 그늘 혹은 자유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최초의 그늘’은 원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치 선악과처럼 그로 인하여 세계의 비극에 닿고 말았지만 그러한 모든 과정들 또한 시인의 세계관을 만들어 가는 하나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내면의 강화이기도 하다. 최초의 그늘로부터 시작된 비극적 인식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시선으로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직시하는 사유와 의미의 확장을 이루어냈기 때문이다.
내가 이미 뿌리에 놓였으니 당신은 꽃을 보려고 하지 마라/ 꽃턱이 자란 열매는 꽃을 보여주느니 꽃 보다 먼저/ 자진할 것이다// 하지 마, 하지 마, 두 마리의 짐승이 잎사귀를 흔드는 저녁/ 손바닥보다 작은 잎사귀는 극단을 가린/ 최초의 그늘 혹은// 벌거벗은 서녘이 사슴뿔에 걸릴 때/ 당신이라는 페이지 속에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툭, 터졌다 - 무화과 부분
그러한 비극의 세계를 건너는 동안의 상처는 자신의 전 존재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진을 해서라도 두 번은 건너고 싶지 않은 강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말을 찾아가는 길이 되기도 하였다. 최초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이러한 비극적 세계로부터 그만큼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존재의 자유로움은 이제 스스로조차 내려놓을 만큼 가벼워지고 있다.
섣달 그믐날, 총체를 들고 먼지를 턴다// 하나로 묶인 말꼬리 속, 유리창의 투명 얼굴이 털려 나가고 책갈피 속의 자음과 모음이 털려 나가고 피아노의 흑백계단이 털려 나가고 커튼자락 주름 잡힌 고뇌가 털려 나가고 냉장고 위 두껍게 쌓인 침묵이 털려 나간다// 햇빛 속, 보이지 않던 세상이 화엄을 이룬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먼지화엄경을 다시 읽는다// 나를 이루고 있는 접속사와 감탄부호, 수납장 속의 바퀴벌레처럼 먼지로 남아 있는 모든 것, 내가 이름 지은 거머리별과 이름을 갖고 싶어하는 뭇별들, 진화 중인 먼지까지 모조리 품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구름 바다 속// 나는 총체적인 먼지다- 먼지 화엄경 전문
먼지는 고요함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런 고요함은 세상과 나 모두 그러해야 가능하다. 세상과 나를 연결 짓는 어떤 관계를 비롯하여 나 자신의 욕망의 근원들에 대해서조차 탈탈 털어내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만은 스스로 놓음으로써 새롭게 찾아낸 세상은 또 다른 화엄의 세상이다. 최초의 그늘은 나를 이루는, 나를 이룬다고 생각해 왔던 것들의 가벼움에 대하여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얻어 낸 자유가 아닌가 싶다.
자신이 발 딛고 선 세계와 그 세계와 연결된 ‘나’라는 존재. 그리고 그런 나와 연결된 무수한 관계에 대하여 한걸음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자유를 가능케 했던 내면의 강화, 그리고 그러한 내면의 강화의 대척점에 서 있는 비극적인 세계인식의 관계 속에서 일관되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시인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시인에게 있어서는 시적 진정성이 아닌가 싶다.
- 『시선』201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