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비의를 유목하다
생의 비의를 유목하다 /강영은
-이향란시집 『 한켤레의 즐거운 상상』을 읽고
이향란 시인이 금번 상재한‘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은 들뢰즈의 노마드와 겹쳐진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새로이 자리매김한 용어인 노마드(nomad)는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이전의 의미와 달리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즉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 한다. 이러한 창조적 행위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는 시인의 삶과 결코 무관치 않다.‘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를 ‘詩眼을 지닌 자의 세계’라고 한정을 짓는다면,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이야말로 시각이 돌아다닌 유목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적 공간이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향란 시인은 표제 시가 되는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을 통해 “울퉁불퉁한 과거는 지우고 길 위의 욕망, 절망을 두드리고 잇던 -중략-짐승의 진부한 역사는 덮고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되는 일이라고, 토로한다.‘한 켤레가 의미하는 제유는 사유의 원천이 되는 행동력을 표상해준다.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되기 위한 도구이자 제유라 할 수 있는 신발이 몇 켤레가 되었든 그 숫자적 의미는 기실 중요치 않다. ‘한 켤레’가 지닌 메타포적 의미는 성찰과 사유의 상상력을 덧입히는 진정성의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간접의 체험 위에서 진정성이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것이라 할 때,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은 시작업의 고통과 그에 따른 성과도 담담하게 비우고 독자의 심판을 받겠다는 개인적 패러다임이 견과처럼 숨어 있다. 그것은 “푸른 즙으로 흘러나와 식물처럼 눈뜨는” 詩에 대한 시인의 믿음이며 그 길을 고독하게 걸어왔던 행보를 위무하는 방법이자 유폐된 내면을 되짚는 정직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1, 균열 없는 서정의 완미함
J.콕토는 말한다. "시란 진리며 단순성이다. 그것은 대상에 덮여 있던 상징과 암유(暗喩)의 때를 벗겨서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고, 비정하고 순수하게 될 정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고, 서정시의 본질이 자아와 세계를 동일화 하는 데에 있는 것이고 보면, 그녀의 서정은 J.콕토의 그러한 말에 응답이나 하듯 균열 없는 완미함을 보여준다.
꼿꼿이 날을 세워
단 한 번일지라도 짧게 깊숙이,
울음 방울 함부로 새지 않도록
붉은 폐부를 향해 정확히
시퍼렇게 뒤집혀 발버둥치는 것이 사랑의 역설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그러나 너무 아프지는 않게
휘청대는 이에게 전할 위로를 바람에게 들은 후
하늘을 찌르는 날카로운 묵언을 훔친다
새조차 떠난 침엽수림에서
어떻게 하면 쑥쑥 뱉을 수 있을까
침엽수 가지 위로 펄펄 눈 내리기 전에
ㅡ(침엽수림 위에서)전문ㅡ
시인이라면 누구나 촌철살인과도 같은 한 줄의 말이나 문장이 자신을 대변해주기를 원한다. 시인이라는 虛名에 기대어 한 편의 좋은 시를 낳기를 소망한다. 위 시는 그러한 시인의 소망을 염결하게 드러낸다. 시의 심장을 향해 “꼿꼿이 날을 세워/단 한 번일지라도 짧게 깊숙이,/울음 방울 함부로 새지 않도록/붉은 폐부를 향해 정확히” 바늘잎을 세운 비유는 예리하다. “그러나 너무 아프지는 않게” 날카로움을 전복시키는 다정한 목소리가‘시퍼렇게 뒤집혀 발버둥 치는’시작의 고단함을 위로해준다. 날카로우면서도 또 한 끝,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완곡함 속에 ‘어떻게 하면 쑥쑥 내뱉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시인의 내면과 대면하다보면 사유의 폐부를 찌르는 침엽수림이 어디인지, 거기 가면 어떤 전언이라도 들을 수 있는지, 묻고 싶어진다.
2, 파토스적인 세계관
가을 저녁
저 멀리에서 날아와 비껴가는 부메랑
날아드는 순간이 황홀하였으므로
차라리 비수처럼 가슴깊이 꽂힐 것이지
비껴가는 것,
그것이 머무는 것보다 더 아프다
-「머무는 것보다 비껴가는 것이 더 아프다」전문
비껴가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생의 절정에 선자만이 느끼는 감정이며 감각이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에게 나타나는 파토스 [pathos]의 세계, 정념(情念) ·충동 ·정열 등으로 번역되는 그 황홀감은 생의 절정에 선 자의 관조이자 여유이다. 파토스의 의미를 넓게 풀어 쓴다면 어떤 사물이 ‘받은 변화상태’를 의미하고, 협의로는 특별히 ‘인간의 마음이 받은 상태’를 의미한다. 각성적 의식보다도 의식하의 근원충동에 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상상력은 파토스의 본질이 그러하듯 인간 존재의 근원 성을 표방한다. “줄곧 발 없는 울음이 온몸으로 기어올라/ 못으로 종지부를 찍던 벽/ 그 벽에서 나무의 푸른 계절이 흘러나오고” 죽은 나무의 벽화」에서, 또는 뭔가가 이미 담겨져 있거나 담길만한 것에는 뚜껑이 있다/주스 병을 따면 주스가/콜라병을 따면 어김없이 콜라가 나온다/밀봉됐던 냄새를 풍기며 탱탱하게 살아있다”「뚜껑」에서, 보듯 시집 곳곳에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3, 물의 상상력
심층에 유폐되어 있는 기억 속에서 찬란한 발화를 시작하는 존재들은 물처럼 유려하게 흐르면서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사유를 의장한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된 이후
물은 원래의 성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화학적 방법이 아니라면 물은
영원히 물이다
수소와 산소, 있지만 없다 없지만 있다
손을 넣어 놀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쏟아 부어도
물위 그 어떤 무늬도 건져낼 수 없을 만큼
적시며 흐르며 물은 버틴다
맑은 힘, 그에 대해서는 끝내 말해주지 않는다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날이 있다
뒷걸음질 쳐 다다른 숲에게
물고기를 낚게 해준 그 강에게
종일 세상을 말리다가 지는 태양에게
그러나 건너가 박히고자 하는 것들을 통째 삼키며
물렁해지기를, 숨어 흐를 수 있기를 바라지만
쓸쓸하게도 나는 흠집이 나있거나 부서진 자리로
매번 환원한다
되돌아가지 않고 분리되지도 않는 단단한 물
그 무엇으로도 해부되지 않는 고집이
어느 날은 꽝꽝 얼어
세상 모든 것을 철썩, 달라붙게 한다
-「물의 해부학」전문-
물이 지닌 속성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물은 흐름을 표방하는 원천적인 힘을 지닌다. 흐름은 소통을 전제로 하지만 물은 物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수증기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기도 하며 화학적 성분인 수소와 산소라는 기체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기온이 내려가면 고체의 몸이 되기도 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유폐되어 있는 기억 속에서 물의 회귀성, 물의 원천성을 표방하지는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이 시시때때 변화하는 것은 물이 지닌 본성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 역시, 물인 것처럼 그녀의 시말들은 오래 응축되고 오래 품어온 말들이다. 그 내부에는 "중심에 스며들어, 찬란하게 박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고자 몸부림쳐보는“ 상상력이 준동한다. “영영 살아보지 못한 것이 수많은 영혼의 가시로 박힌다면 물 위의 세상, 그 한 겹의 비리지 않은 황홀경에 주둥이를 띄우다가 퍼더덕! 마지막 숨을 매달아도 기뻐 눈물 나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그녀의 고백이 생의 비의를 유목하는 순간, 상상력은 “지구 밖 우주를 경험하듯이, 그런 신비와 내통하”는 기쁨을 안겨준다.
4, 에필로그
‘스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이 되기 위해’ 꼿꼿이 날을 세운 언어의 침엽수림에 가서 바늘잎처럼 예리하게 폐부에 박히는 시 한 편을 음미해본다.
휘청거리며 한쪽으로 기우는 여자를 본다/새들이 떼 지어 울음을 몰던 곳/꽃들이 마지막 향기의 모가지를 떨구던 곳으로/다 닳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는 여자/환히 열렸던 몸 구석구석으로 어둠이 깃들 무렵/가느다란 그녀의 눈매에 주름 접히듯 스며드는 한 시절//여자가 누웠던 눅눅한 자리/ 꿈으로 얼룩졌다가 어느새 별 뜨는 그 자리엔/붉은 추억이 흥건하다/ 부서지고 살점이 드러난 채 여전히 울울울 밀려오는 것들// 그 하늘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후/여자는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악보 없이 긴 목을 타고 아주 희미한 노래만이 새어 나왔다/고백성사를 하듯//한 여자가 저문다/한 여자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든다/천둥과 번개를 묻고 어두워져가는 아가리 속에서//한 여자의 심지가 훌쩍이듯 타들어간다 ㅡ「서녘여자」전문 ㅡ
시의 존위가 상상력에 있다면, 감성과 오성(悟性)을 매개로 하여 인식을 성립시키는 그녀의 능력은 일정한 위치에 다다른 시인으로서의 모습임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천둥과, 번개, 핏빛 노을이 아가리를 벌린 죽음 너머까지 한 켤레의 상상을 밀고 가는 시적 행보는 비단, 이 시집 뿐 만 아니라 앞으로도 생의 비의를 꿰는 화엄지경으로 오래오래 눈부시기를 기원해본다.
- 『주변인과 시 』2011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