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단평

착한 미소/송명진

너머의 새 2019. 1. 18. 00:54

착한 미소/송명진

 

 

도솔천궁이 여기 있나이다

비로자나불 석가불 노사나불 약사불 아미타불

연초록 말씀으로 진리를 깨우치면

관음자장 미소로

삼생을 살아 도솔천에 닿기까지 오랜 기쁨입니다

돌아돌아 나무였다면 연초록 진리였을 것이고

돌아돌아 바람이었다면 유혹의 바람이었을 것이고

돌아돌아 소문이었다면 반천년의 묵언이었을 것입니다

돌고돌아 이리도 가벼운 존재, 그게 나일 줄이야

세상사 조용히 흐르는 나무이거나 바람이거나

마음의 풍경 속 착한 미소 되어

마음의 휑한 곳 죽비 내립니다 

 

선정(禪定)의 미학/강영은

국보 제296호 칠장사오불화괘불탱을 소재로 한 송명진 시인의 시 <착한 미소>를 읽는 동안 정각의 길로 들어선 탈속 과정의 참 인간의 모습을 본다.  괘불과 일체가 된 불타의 세상이 죽비 되어 내리는 공간, "도솔천궁이 여기 있나이다" 라는 화두는 불화의 직접적인 묘사이면서 시적 화자의 현세적 상황과 내면 풍경을 두루 아우르는 발심의 표현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도솔천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 중의 제4천, 그 내원(內院)은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다. 본존불인 석가모니 역시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이 시에서 두드러지게 양각된 숫자는 3이다. 시 구조 역시 3연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삼신불과 삼세불, 삼단구조의 괘불, 그리고 삼생을 연상시키는 의도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를 통틀어 살아 부처가 되기 위해 다다르는 과정, 즉 "삼생을 살아 도솔천에 닿기까지 오랜 기쁨"이라 말하고 있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불(佛:불타)이란 산스크리트·팔리어(語)의 보통명사로, 각성(覺性)한 사람, 깨달은 자를 지칭하는 특정한 말이다. 모든 사물에 불성을 부여하는 불교의 교리가 아니더라도 무엇이나 부처에 도달할 수 있다는 논리는 물활론의 한 속성처럼 자아가 타아가 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신의 영역에 도달케 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말씀으로 에둘러진 2연은 윤회의 길을 돌고 도는 물아일체의 세계이며 지난 생을 겸손하게 되돌아보는 과정이다. 연초록 잎 새를 틔우는 나무처럼 싱그러움을 찬양했던 젊은 시절과 몰아치는 바람처럼 휘청거렸던 중년의 세월, 돌부처처럼 묵언정진의 도를 깨치던 장년의 성숙함이 묻어나는 기표 속의 의미는 마하반야바라밀다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가 아닐까.


 3연에서 드러나는 마음의 풍경은 상대세계를 벗어나 절대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에 의하면, 절대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제나'(自我)와 육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몸나'에서 벗어나 참다운 자아인 '얼나'(靈我, 영적인 나, 불교에서 말하는 法身)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세상사 조용히 흐르는 나무이거나 바람이거나 마음의 풍경 속 착한 미소"는 이 '얼나'(法身)를 찾아 참다운 자아에 이름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면, 시인은  절대세계와 하나가 되어 생사(生死)를 넘어서는 참다운 자유를 얻은 것이 아닐까, 탐진치(貪瞋痴)로 사는 '나'(自我)는 '수성(獸性)의 나이기 때문에 '거짓된 나'이며 이러한 수성을 벗어나 '참다운 나'에 이르러 절대존재(니르바나님)와 이어진다는 깨우침이 담겨 있다.  이 같은 시인의 심상을 선정의 미학이라 여기고 싶다. 

 선정은 마음의 집중에서 올 것이란 생각이다. 선정에서 생긴 지혜는 신비적 직관이 아니라 자유로운 여실지견이지 않겠는가? 선정을 통하여 얻은 지혜는 진리와 일체가 되어 확고부동한 청정심이나 부동심이 될 것인데, 심마적 공포나 외부 세계의 어떤 충격, 나아가서는 들끓는 애욕에도 산란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가 육신을 통제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 한 편의 시를 읽고 보니 삼천불탑을 쌓는 과정을 지켜 본 심정이다.

 

정신과 표현 2009,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