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산문

상처위에 꽃 핀 환상의 소우주

너머의 새 2019. 1. 19. 18:54

상처위에 꽃 핀 환상의 소우주/ 강영은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서 씻어내고 싶은 고통스러운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과거에 생겨나 미처 해결되지 못한 상처들이다.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트라우마(trauma)라 불리는 ‘그 무엇’은 일생을 뒤 따라다니며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간섭하기도 한다.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무의식 속에 들어앉아 과민반응을 일으키는 우리 자신이다.  이 때, 우리의 무의식은 기억, 꿈, 환각으로 재현되는 상처에 대해 정상적인 감정반응은 소실된다. 그 흔적은 타락, 분노, 피해의식, 수치심을 지닌 상(傷)이 되어 무수한 상(像)을 만들어낸다.

 



 

 

지난 해 가을, 서울 태평로 삼성미술관 플라토(옛 로댕갤러리)에서 장-미셸 오토니엘의 작품들을 보았다. 상(傷)이 만들어낸 상(像), 그 이미지들은 자기보존본능과 성적 본능 사이에서 생겨난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하는 지 말하는 것 같았다. 198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대규모 유리 설치작업까지작가만의 폭넓고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지녔다는 작가에 대한 관심보다 유리 매체의 조형성을 시 쓰기와 어떻게 연관 지을까 하는 생각에 구미가 당겼다고나 할까, 좋은 전시회가 있으니 함께 가보자는 모 시인의 연락을 받고 막연히 따라나섰던 길이었다. 로댕의 '지옥의 문' 을 열고 전시회장으로 들어가 첫 작품을 만나는 순간 피상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전시된 이미지들이 던져주는 무음에 신중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난 장-미셸 오토니엘 (1964년 생테티엔 출생)은 스물여덟에 세계적 미술축제인 카셀 도큐멘타(1992) 초대작가로 주목 받을 정도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한국의 대중들에겐 그다지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닐지 모른다.  이글은 그의 전시회인 <MY WAY>를 감상하는 내내 상처라는 화두가 던진 그의 작품들에 대해  오감의 촉을 세워 몰입해 본 단편적인 기록이다. 내의식이 반응하는 감상문이며 무의식의 저편에 들어 앉아 있는 내 상처에 대한 자구책으로 씌어 진 글이기도 하다.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                                                       


 

         


1, 상 속으로 들어가기 




 전시장의 맨 앞자리에 위치한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이라는 작품과 그 옆에 큼지막하게 걸린 사제복이 첫 눈에 들어온다.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은 비극적 죽음을 맞은 연인에 대한 애도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사제복을 입고 모델이 되어 찍은 사진 작품이다. 작가가 진정한 첫 작품이라 여겨지는 이면에는 비극적인 사건이 숨어 있다. 어린 시절, 작가는 사제의 길을 꿈꾸었던 한 남성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 연인이 사랑과 성직 사이에서 갈등하던 나머지 자살을 해 버린다. 그 비극이 자신의 예술적 운명을 결정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 비극이 낳은 정신적 상처(트라우마)라 할 것이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에 의한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불린다. 몸에 생기는 상처와 달리 신체적인 데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충격적인 체험에 의한 쇼크는 뇌 속에 영속적인 화학적 변화를 가져온다. 경험을 상기시키는 어떤 압력을 받게 되면 그 경험이 뇌리에 플래시백 되는 형태로 소생하는데 그러한 기억이 예술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 작가의 말을 생각해보면 상처가 지닌 역동성에 대하여 그 아이러니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옆에는 실제 크기의 사제복이 걸려 있다. 사진 속의 사제복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이 사제복은 작가가 22살 때 린넨으로 직접 디자인하고 누나가 재봉질을 했다고 한다. <사제복을 입은 자화상>이 상실의 고통과 상처에 대한 모놀로그라면, 사제복은 상처에 대한 승화이자 갱생을 꿈꾸는 결과물로 여겨진다. 죽음을 넘어 부활을 꿈꾸는 상징을 나타내는 의장(儀狀)이다. 무의식속에 들어 있는 이드가 자아의 방어기전에 의해 의식되지 않도록 억압되거나 의의 있는 형태로 승화되듯 이 두 전시물은 예술로 나아가는 상처의 향방을 암시하는 듯하다. 연인의 비극적인 죽음은 누구에게나 쉽게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낳는다. 세상의 편견과 맞서야 하는 성적 소수자이고 보면, 그 상실감은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극심했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상처의 근원을 찾아가는 과정은 타나토스로 가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생의 본능(에로스)과 마찬가지로 죽음의 본능(타나토스) 역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에너지가 이합집산 되는 동안  상처는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는 두 얼굴을 지닌다. 독이 되거나 약이 되기도 하는 그것을 상처의 힘이라 부른다면, 외면 받고, 거부당하고, 누락당한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냄으로써 고통을 장악하는 힘이야말로 상처가 지닌 상처의 역동적인 힘이며 상처의 긍정적인 얼굴이 아닐까,






 

 


 

               <유두회화> 부분 확대

 


2, 상처 드러내기 

 

 그의 작품들은 유혹과 혐오의 개념을 넘어 육체에 대한 깊은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미적인 가치로 전환시키는 속성을 드러낸다. 상실의 고통과 상처, 부재하는 신체에 대한 갈망과 집착, 등 편향성을 지녔지만 정직한 그 이미지들은 상처를 드러내는데 철저한 자기의식을 보여준다. 내밀한 상처의 고통들로 고립되어 있으면서도 그 상처를 굴절 없이 보여주는 한편,  고정적인 재료를 벗어나 유동적인 변형체로 활용되는 재료들을 활용하여 성의 경계를 넘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욕망을 표방한다. 감광성 물질을 조사하다 발견한 유황, 화산 용암이 식으면서 생성되는 유리인 흑요석, 성냥에 불을 지피는 인 등은 없는 육체, 보편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신체에 대한 갈망과 집착을 은유적이거나 추상적으로 보여준다. <유두회화>, <미끼들>, <자웅동체>, <매우 긴 고통의 시작>등의 작품들은 성기모양이거나 항문 같은 신체의 일부를 노출시키고 있다. 붉은 유황으로 그려진 유두회화는 젖꼭지 위에 문질러진 정액처럼 보이기도 한다. 재료의 아름다움과 혐오감 사이에 놓인 이러한 섹슈얼 코드는 타인과의 공감과 소통을 별로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1990년대의 몸 담론이나 성 정체성 논의와 같은 맥락에 놓이면서도 작가가 경험하고 인내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공감하게 한다. <내 작품은 모두 자화상이다. 첫 번째 자화상은 절망의 노래였다. 나는 미술계에 내 노래를 들려줬고, 그걸로 구조될 수 있었다>라는 작가의 말을 기억해본다.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방식은 본질적 원천성(源泉性), 이를테면 상처의 깊은 늪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일지 모른다. 실제로 드러내기 방식은 잠재적 트라우마의 심각성을 없애는데 아주 유효하다고 한다. 방출되지 않는 에너지의 형태는 불안감, 공포감에 떨거나 강한 초조감에 일을 그르치거나 분노를 자주 표출하게 된다. 혹은 심각한 정신적 침체로 인하여 감정이 둔해지거나 정신적으로 과민해지게 되는데, 상처가 깊어지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상실되고 고통으로 인하여 서서히 인격이 바뀌는 등, 자신이 파멸될 뿐 아니라 성폭력자이거나 살인마처럼 폭력성을 띤, 사회악의 존재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가 사용해온 유황이나 인, 왁스나 보석처럼 반짝이지만 깨어지기 쉬운 유리와 같이 예측할 수 없는 민감한 재료들은 보편적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으로서 상처가 예견된 형태의 갈망을 보여준다. 몸이란 상처를 포장한 박스이다. 하지만 외부의 영향에 따라 끈적거리는 검은 액으로 흘러내리고 마는 25그램의 무게를 지닌 영혼을 포장했을 뿐, 달콤한 초콜릿 상자가 아니다. 상처를 드러내는 일은 그 영혼에 장미꽃을 바치는 일, 자신을 긍정적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이다. 드러냄의 방식은 상처를 객관화시킬 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을 위무하는 예술을 보여준다.

 


 

 


    <글로리아 홀>


 

3, 상처, 엿보기

 

 전시장의 중간쯤에서 <글로리아 홀>을 만난다. 글로리아 홀(쾌락의 구멍)의 본래적 의미는 공공 화장실의 칸막이에 뚫린 구멍을 의미하는 성적 은어로서 관음증의 행위와 관련이 있으며 주로 동성애자 포노그래피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한 미술 평론가는 <오토니엘은 순결한 흰색 실크위에 뚫린 구멍의 가장자리를 화려한 색으로 정교하게 수를 놓아 '쾌락의 구멍' 을 퇴폐와 쾌락주의의 상징이 아닌 순수한 소통의 통로로서 재현하고 있다. 그의 저급함과 혐오감을 드러낸 예술적 충동은 초기 작업 전면에 걸쳐 부재하는 신체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을 드러낸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흰색실크 위에 눈동자만한 구멍을 여러 개 뚫어놓은 작품을 대하니 작가의 진정성이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기보다는 욕망과 그리움의 출구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그 구멍을 통하여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외면당하거나 이미 당해왔을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대하여, 그 정당성에 대하여, 비대칭을 이룬 세상에 대해 무언의 항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편협 된 세상과 화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구멍에 눈을 박고 둘러보는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얀 천이 나를 숨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면 속의 생을 사는 것처럼 숨겨진 얼굴 속에, 또 마음속에 드러나지 않는 상처가 있는 것이 엿보인다. 상처는 때때로 흉기가 되어 목숨을 노린다. 원망과 분노, 피해망상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찌르거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흉기를 감추는 일은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고 은밀한 구멍에 눈을 박는 글로리아 홀을 제 몸에 지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자신의 운명에 씌워진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질 줄 아는 용기야말로 상처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임을 깨닫는다. 상처라는 비극적 감성에 함몰하는 대신 솔직하고 담대한 시선으로 오히려 세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 용기일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엿보는 이들을 두루 통찰하는 자신감이야말로 상처를 이겨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무제>

 

4, 상처, 어루만지기

 

  유리 조형물들이 다소 초현실적인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다음 코너로 간다. 눈에 익숙한 모양이 있어서 드려다 보니 <무제>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등칡꽃을 닮아 있는 그 조형물은 앞에서 보면 여자의 음부 같고 옆에서 보면 남자의 양물 같은 등칡꽃 모양이다. 누구나 다 알만한 꽃모양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작가의 익살스런 방법으로 보여 진다. 이미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작가가 초기의 작품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이탈리아 무라노産 유리로 만든 오색찬란한 구슬들은 영롱하게 빛나지만 반투명 상태인 구슬의 이중성은 마치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동시에 타인에게는 그 상처가 아름답게 비쳐지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나는 살아남고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작업으로 나 자신을 위해 제작한 작은 시적 오브제들을 제시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처란 희망이라는 별빛을 무수히 감추고 있는 소우주일지도 모른다. 편향성을 지닌 초기 작품들과 달리 새로이 보여주는 유리 조형물 등은 자신의 상처를 벗어나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 아름답다. 첫 번 째 유리작품이었던 <상처-목걸이>(1997)가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에이즈로 사망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1000개의 목걸이 중 하나라는 설명이 옆에 붙어있다. 작가는 파리의 <게이 퍼레이드>의 행사에서 이 목걸이를 착용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비밀스러운 상처를 안고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나가고 있다. 이 목걸이는 또 다른 세계를 응시한 작가의 성찰이 자신의 상처가 아닌 세계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유리조형물 <눈물들>은 물이 가득 채워진 60개의 유리병들로 이루어져 있다. 병 안에는 갈고리, 하트, 별, 목걸이 등 2000여 개의 다양한 모형들이 떠있는데, 커다란 유리구슬 마개와 병들의 독특한 형태는 작가가 작품제작을 위해 방문했던 멕시코의 전통 유리 공예품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 지속적인 여행과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예술적 자양분을 얻은 작가는 유리라는 화려한 색채의 오브제들을 통해 25년간 작업해왔던 상실과 소멸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아름다움과 환상의 세계로 복원함으로써 상처위에 꽃 핀 환상의 소우주를 선사한 것이다. 

 



  

       <라캉의 매듭>

 

5, 상처, 매듭짓기

 

 다양한 유리구슬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매듭을 짓고 있는 마지막 공간에서<라캉의 매듭>을 만난다. 초기작품인<사제복을 입은 자화상>(1986)에서 자신이 경험한 상실감, 절망을 이야기 하였다면 최근작인 <라캉의 매듭(2009)>을 통화여 작가는 실재가 표상되고 말해지는 단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말하기의 위상을 나타내는데, 말하는 행위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방향을 제시한 것처럼 보여 진다. 첫째는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정립되어 있다는 것(실재계), 둘째는 상징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는(상징계)와 보르매우스의 매듭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상상계), 라캉의 가설에 의하면 실재, 상상, 상징이라는 세 가지 질서는 상호 의존하면서 상징적 질서는 억압을 낳고 금지는 위반에의 욕망을 낳지만,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가져다주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다. 욕망의 공허함, 실재라는 심연과의 만남을 회피하게 하는 보호막, 즉 매듭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라캉의 매듭>은 고리가 하나로 이루어져 하나가 끊어지면 전체가 해체되어 버리는 상호의존성,즉 상처의 커다란 순환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 깊이 잠재하고 있는 상징계, 상상계, 그리고 실재계의 상호의존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매듭 작품들은 이제 <스스로 서 있는 매듭>, <커다란 두 개의 라캉의 매듭>에서 보여 지는 상처의 연동성을 지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머리맡에 두면 악몽을 물리쳐준다는 ‘드림 캐처’에서 의도한 <행복한 일기>에서처럼 일상 속 내밀한 감정들을 기록한다.  행복과 불행과의 관습적인 대립을 넘어설 때, 상처는 타자의 시선을 안아주는 마법이 되는 것이다.  

 



 

 <소원을 비는 벽>

 

 에필로그 


 

 출구로 향한다. 입구이기도 한 그곳에 커다란 갈색 벽이 서 았다. 그 앞에 큐레이터가 멈추어서더니 성냥 한 개비 씩 나눠준다. 이름 하여 <소원을 비는 벽>으로 들어갈 때 작품인 줄 몰라 스쳐 지나갔던 곳이다. 1995년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되었던 작품으로써 일시적 설치물이다. 인이 칠해진 대규모 벽면으로 함께 비치된 성냥개비를 벽 표면에 긁어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비는 일종의 퍼포먼스격인 설치 미술로써,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와 관객 사이의 친밀한 교감을 유도하며 하나의 '치유'의 과정으로 선사된다고 한다. 전시기간 동안 관객들이 참여로 벽면에 남겨지는 '상처'의 흔적들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드로잉으로 재탄생된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예술가로서 나는 세상에 마법을 걸고 싶다. 많은 기준들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적 순간에 자연의 아름다움, 재료의 경이로움, 감정의 진실함과 같은 기본적인 것을 발견하게 하고 싶다>고, 그 벽면에 무수히 긁힌 상처가 나 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성냥개비로 벽면을 긁자 파란 불빛이 한 순간 타올랐다 사라진다. 벽에 긁힌 상처가 늘어가고 바닥에 성냥이 쌓여갈수록, 그의 상처는 완전해질 것이다. <소원을 비는 벽>에 상처를 내며 조용히 소원을 빌어본다. (상처의 힘이여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무해줄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상처의 긍정적 진화가 보여준 궁극은 상처를 치유한다. 

 

-『시와 미학』 201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