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 홀>
3, 상처, 엿보기
전시장의 중간쯤에서 <글로리아 홀>을 만난다. 글로리아 홀(쾌락의 구멍)의 본래적 의미는 공공 화장실의 칸막이에 뚫린 구멍을 의미하는 성적 은어로서 관음증의 행위와 관련이 있으며 주로 동성애자 포노그래피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다. 한 미술 평론가는 <오토니엘은 순결한 흰색 실크위에 뚫린 구멍의 가장자리를 화려한 색으로 정교하게 수를 놓아 '쾌락의 구멍' 을 퇴폐와 쾌락주의의 상징이 아닌 순수한 소통의 통로로서 재현하고 있다. 그의 저급함과 혐오감을 드러낸 예술적 충동은 초기 작업 전면에 걸쳐 부재하는 신체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을 드러낸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흰색실크 위에 눈동자만한 구멍을 여러 개 뚫어놓은 작품을 대하니 작가의 진정성이 가슴에 먼저 와 닿는다.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객관적 상관물이기보다는 욕망과 그리움의 출구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그 구멍을 통하여 자신과 같은 상처를 지닌 이들을 주목했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여 외면당하거나 이미 당해왔을 불가항력적인 운명에 대하여, 그 정당성에 대하여, 비대칭을 이룬 세상에 대해 무언의 항변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편협 된 세상과 화해를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 구멍에 눈을 박고 둘러보는 동안 얼굴을 가리고 있는 하얀 천이 나를 숨기고 있음을 깨닫는다. 가면 속의 생을 사는 것처럼 숨겨진 얼굴 속에, 또 마음속에 드러나지 않는 상처가 있는 것이 엿보인다. 상처는 때때로 흉기가 되어 목숨을 노린다. 원망과 분노, 피해망상이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찌르거나 목숨까지 위협하는 흉기를 감추는 일은 부끄러운 얼굴을 가리고 은밀한 구멍에 눈을 박는 글로리아 홀을 제 몸에 지니는 것과 다름 아니다. 자신의 운명에 씌워진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질 줄 아는 용기야말로 상처를 극복하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원천임을 깨닫는다. 상처라는 비극적 감성에 함몰하는 대신 솔직하고 담대한 시선으로 오히려 세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그 용기일 것이다. 자신과 자신을 엿보는 이들을 두루 통찰하는 자신감이야말로 상처를 이겨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힘일 것이다.
<무제>
4, 상처, 어루만지기
유리 조형물들이 다소 초현실적인 모습으로 매달려 있는 다음 코너로 간다. 눈에 익숙한 모양이 있어서 드려다 보니 <무제>라는 제목이 달려있다. 등칡꽃을 닮아 있는 그 조형물은 앞에서 보면 여자의 음부 같고 옆에서 보면 남자의 양물 같은 등칡꽃 모양이다. 누구나 다 알만한 꽃모양에 <무제>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작가의 익살스런 방법으로 보여 진다. 이미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작가가 초기의 작품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말이다. 이탈리아 무라노産 유리로 만든 오색찬란한 구슬들은 영롱하게 빛나지만 반투명 상태인 구슬의 이중성은 마치 상처를 드러내면서도 감추고 동시에 타인에게는 그 상처가 아름답게 비쳐지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나는 살아남고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작업으로 나 자신을 위해 제작한 작은 시적 오브제들을 제시했다>고 작가는 말한다. 상처란 희망이라는 별빛을 무수히 감추고 있는 소우주일지도 모른다. 편향성을 지닌 초기 작품들과 달리 새로이 보여주는 유리 조형물 등은 자신의 상처를 벗어나 타인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듯 아름답다. 첫 번 째 유리작품이었던 <상처-목걸이>(1997)가 한켠에 전시되어 있다. 에이즈로 사망한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제작한 1000개의 목걸이 중 하나라는 설명이 옆에 붙어있다. 작가는 파리의 <게이 퍼레이드>의 행사에서 이 목걸이를 착용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비밀스러운 상처를 안고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자신의 삶을 쌓아나가고 있다. 이 목걸이는 또 다른 세계를 응시한 작가의 성찰이 자신의 상처가 아닌 세계의 상처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유리조형물 <눈물들>은 물이 가득 채워진 60개의 유리병들로 이루어져 있다. 병 안에는 갈고리, 하트, 별, 목걸이 등 2000여 개의 다양한 모형들이 떠있는데, 커다란 유리구슬 마개와 병들의 독특한 형태는 작가가 작품제작을 위해 방문했던 멕시코의 전통 유리 공예품을 모방한 것이라 한다. 지속적인 여행과 우연한 만남들을 통해 예술적 자양분을 얻은 작가는 유리라는 화려한 색채의 오브제들을 통해 25년간 작업해왔던 상실과 소멸에 대한 애도의 감정을 아름다움과 환상의 세계로 복원함으로써 상처위에 꽃 핀 환상의 소우주를 선사한 것이다.
<라캉의 매듭>
5, 상처, 매듭짓기
다양한 유리구슬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매듭을 짓고 있는 마지막 공간에서<라캉의 매듭>을 만난다. 초기작품인<사제복을 입은 자화상>(1986)에서 자신이 경험한 상실감, 절망을 이야기 하였다면 최근작인 <라캉의 매듭(2009)>을 통화여 작가는 실재가 표상되고 말해지는 단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말하기의 위상을 나타내는데, 말하는 행위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방향을 제시한 것처럼 보여 진다. 첫째는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존재한다는 것, 무엇인가 정립되어 있다는 것(실재계), 둘째는 상징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는 어떤 것도 말해질 수 없는(상징계)와 보르매우스의 매듭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상상계), 라캉의 가설에 의하면 실재, 상상, 상징이라는 세 가지 질서는 상호 의존하면서 상징적 질서는 억압을 낳고 금지는 위반에의 욕망을 낳지만, 욕망의 완전한 충족을 가져다주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다. 욕망의 공허함, 실재라는 심연과의 만남을 회피하게 하는 보호막, 즉 매듭의 형상으로 이루어진 <라캉의 매듭>은 고리가 하나로 이루어져 하나가 끊어지면 전체가 해체되어 버리는 상호의존성,즉 상처의 커다란 순환계를 의미한다. 인간의 욕망 깊이 잠재하고 있는 상징계, 상상계, 그리고 실재계의 상호의존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매듭 작품들은 이제 <스스로 서 있는 매듭>, <커다란 두 개의 라캉의 매듭>에서 보여 지는 상처의 연동성을 지나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머리맡에 두면 악몽을 물리쳐준다는 ‘드림 캐처’에서 의도한 <행복한 일기>에서처럼 일상 속 내밀한 감정들을 기록한다. 행복과 불행과의 관습적인 대립을 넘어설 때, 상처는 타자의 시선을 안아주는 마법이 되는 것이다.
<소원을 비는 벽>
에필로그
출구로 향한다. 입구이기도 한 그곳에 커다란 갈색 벽이 서 았다. 그 앞에 큐레이터가 멈추어서더니 성냥 한 개비 씩 나눠준다. 이름 하여 <소원을 비는 벽>으로 들어갈 때 작품인 줄 몰라 스쳐 지나갔던 곳이다. 1995년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되었던 작품으로써 일시적 설치물이다. 인이 칠해진 대규모 벽면으로 함께 비치된 성냥개비를 벽 표면에 긁어 불을 붙이고 소원을 비는 일종의 퍼포먼스격인 설치 미술로써, 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작가와 관객 사이의 친밀한 교감을 유도하며 하나의 '치유'의 과정으로 선사된다고 한다. 전시기간 동안 관객들이 참여로 벽면에 남겨지는 '상처'의 흔적들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드로잉으로 재탄생된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예술가로서 나는 세상에 마법을 걸고 싶다. 많은 기준들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적 순간에 자연의 아름다움, 재료의 경이로움, 감정의 진실함과 같은 기본적인 것을 발견하게 하고 싶다>고, 그 벽면에 무수히 긁힌 상처가 나 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성냥개비로 벽면을 긁자 파란 불빛이 한 순간 타올랐다 사라진다. 벽에 긁힌 상처가 늘어가고 바닥에 성냥이 쌓여갈수록, 그의 상처는 완전해질 것이다. <소원을 비는 벽>에 상처를 내며 조용히 소원을 빌어본다. (상처의 힘이여 상처받은 영혼들을 위무해줄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상처의 긍정적 진화가 보여준 궁극은 상처를 치유한다.
-『시와 미학』 2012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