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강영은이 "육명심의 사진"에서 읽은 것들/ 사진예술 6월호
시인 강영은이 "육명심의 사진"에서 읽은 것들/ 사진예술 6월호
자연의 시간과 동질적으로 조화를 이룬 인간에 주목해온 육명심의 사진첩 <백민>과 <검은 모살 뜸><예술가의 초상>을 보았다. 피사체들을 일별하는 동안 무언가 벅찬 감동이 인다. 에로스(삶의 본능)에서 타나토스(죽음의 본능)로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사진 속의 시간을 찾아 본다. 우리는 흔히 시간을 흐른다고 표현한다. 흐른다는 것은 정지된 어느 정점의 끊임없는 변화 작용을 의미한다. 인간이 외부 세계와 접하는 접점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간의 순서를 이야기 할 때 우리는 대부분 과거, 미래, 현재를 차례로 거론한다. 그것은 현재만이 리얼한 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뜻한다. 미래와 과거는 부수적인 시간으로 모두 현재를 위해서 고려된 시간 태라는 의미를 지닌다. 렌즈가 재현해낸 시간은 순서 없이 구현되고 있는 전지적 시간이다. 시간의 흐름을 고요히 담고 있는 피사체에 붙잡혀 무언가 할 말은 있으나 말하지 못하고, 할 말도 없으면서 계속 말해야 할 것만 같은 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그들이 내게 들려줄 말을 기다려 본다. 기다림 속의 시간들, 이 글은 세권의 사진첩을 통해 피사체에 담긴 시간과 피사체와의 연동을 읽어낸 짧은 소견이다.
예술가의 초상 문명의 탈을 벗기다
문화적 존재란 인간이 자연을 이용하고 모방하고 고안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인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문화 속에서 인간은 어떤 형태, 어떤 면으로든지 자기를 표현하려고 한다. 특정한 생활 가운데서 그 인간 자체의 퍼스나(persona)를 표현하고 실현하는 양식이 문화이고 보면, 탈을 쓰지 않는 인간의 얼굴은 탈문화, 비문화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술이 문화의 정점에 있는 장르인 것을 감안해보면, <예술가의 초상>은 예술가로써의 탈을 벗어버린 생활인의 표정, 일상인의 얼굴을 포착해낸 사진들은 탈문화로 가는 전조를 보여진다. 육명심이 포착해낸 <예술가의 초상>들은 하나 같이 현재 작고했거나 연로한 연령을 지닌 분들이다. 현재적 입장에서는 이미 없는 과거이며 당대의 입장에서 보면 당도한 미래이다. 흑백 필름을 사용하여 검박하게 기록되어진 이들의 사진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 지닌 순수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이 내재된 사진 속에서 육명심은 예술가가 아니라 사람냄새가 나는 자연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생명적 에너지를 가진 인간이 타나토스로 가는 그 양태는 문명을 벗겨내는 작업라고 볼 수 있다. 육명심은 <문인의 초상>(2007, 열음사) 서문에서 “처음에는 시인이면 시인, 소설가면 소설가로 보였는데 해가 거듭되면서 문인들이 예술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숨길 없는 얼굴, 평범한 일상을 통해 인위적인 모습보다 자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이러한 작업은 자연인 속에 내재된 삶의 진정성을 들추어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사진들이 창조된 직접적인 계기는 어느 외국인 컬럼니스트의 글을 읽는 순간에 생겨났다고 한다. “한국의 여인들은 전부 어머니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직업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삶의 흔적, 즉 탈의 이미지를 지닌다는 그 때의 깨우침은 시각의 변화와 대상을 영상화하는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상화된 예술가의 얼굴에서 문명이라는 탈을 벗겨내는 일은 피사체의 솔직한 진 목면을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예술가의 초상>에서 보여 지는 시간은 문명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시간이며 그러한 일체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세계로써 근원을 향해 흐르는 시간의 변환으로 보여진다
1983,3, 강원도, 강릉
백민 자연 속의 인간을 드러내다
문명이라는 탈을 벗겨낸 육명심은 이제 보다 더 사람 냄새가 나는, 자연인의 모습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포착해낸다. 박수나 무당, 농부, 동자승, 촌노 부부와 같이 자연과 하나가 된 사람들, 기층민인 백민의 이미지 속에서 보다 원초적인 생명에너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듣기에 다소 생소한 백민이란 단어에 대해 육명심은 '아무런 벼슬이나 감투를 쓰지 아니한 일반 백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의 머리글자인 白자와 民자를 하나로 압축한 단어 속에는 "자연 속에 깊이 파묻히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이 나라 우리 풍토의 땅 기운이 뼈 속까지 스며든 그런 사람을 찍고 싶었다"는 희구가 함축되어 있다. 우리의 뿌리, 사라져가는 토박이들의 모습을 담은 <백민> 속에서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이라는 글로벌 시대의 패러다임을 새삼 확인해 본다. 검정 고무신, 흰 고무신, 대나무로 만든 투망, 촌노의 베잠방이, 제법 멋을 낸 시골부부의 모본단 입새, 렌즈 속에 필사한 사진들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시간들이다. 때문에 <백민>은 근대화 과정 속에 잊혀져가는 우리의 정서와 전통을 되살리는 중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 개화기 이래 급격하게 변화된 우리 사회는 이제 이러한 전통과 문화를 찾아볼래야 쉽게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백민>을 통해 그것들을 다시 불러 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정겨운 장면마다 오래 곰삭은 우리의 맛과 향기가 배여있다. 육명심은 "장아찌처럼 잘 익은 농부의 얼굴은 누구보다 잘 익은 자연의 얼굴이며 자연을 생성하는 장인이고 프로중의 프로" 라는 말을 한다. 농부들이야말로 자연을 비롯한 삼라만상의 이치를 가장 잘 읽는 자이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이야말로 모방자가 아닌 창조자가 아닌가, 예술의 본질이 세계를 구현하고 재현하는 것이라면 자연을 객관적 상관물로 삼아 시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시인으로서 귀가 열리는 순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내 자신의 시 쓰기가 반성되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진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모든 면에서 상상의 원동이자 뿌리가 되는 자연, 실재하는 풍경의 소산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된 원융무애의 세계임을 사진 속에서 흥감해본다.
사진 스물 여덟 Plates 28 제주 삼양 , Cheju sanyang, 1983,8
검은 모살뜸 흙으로 돌아가다
회귀적이며, 나선적인 시간은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반복(천체의 운행, 동식물의 생활사, 계절의 순환 등)을 토대로 구축되어진다. 이러한 순환 고리를 따라 이동하는 시간은 우르보스의 꼬리처럼 물고 물리는 시간으로 생성된다. 과거를 향한 기억도 카메라 앵글처럼 돌아간다. 시간을 거꾸로 항진 시키는<검은 모살 뜸>은 나에게 있어서도 추억을 가져오는 마술을 부린다. 사진의 공간적 배경인 삼양, 이호, 공천포 해수욕장은 어린 시절 자주 다녔던 곳이다. 태어나고 자란 곳이 제주도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햇볕이 이글거리는 여름철, 연례행사처럼 어른들을 따라 검은 모살(모래의 제주도 방언)로 가득 찬 바닷가를 찾아가곤 했다. 태양 볕에 잘 구워진 모살을 밟을 때면 발바닥이 델 것처럼 뜨겁지만 모래를 파다보면 서늘하면서도 물기 촉촉한 모래가 쌓이면서 봉분을 이룬다. 파헤쳐진 모래를 이불처럼 덮고 누우면 적당한 물기와 온기를 가진 어머니의 자궁처럼 아늑하여 어느새 잠이 들곤 했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아득하게 흘러가곤 했던 날들, 꿈꾸는 것 같은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것들은 이제 사진첩 속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검은 모살뜸>속의 피사체들은 혼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곤히 잠들어 있다. 검은 모살 속에 영혼마저 놓아버린 듯한 모습들은 육신이 다만 껍데기임을 보여준다. 삶의 본능인 에로스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바뀌는 순간처럼 보인다. 문명에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인간이 마침내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말하는 듯하다. 서로 중화를 이루기도 하고, 대체되기도 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을 탐구해온 육명심의 시리즈는 1960년대 후반 ‘인상’시리즈, 70년대부터 ‘예술가’ 시리즈, 70년대 ‘백민’ 시리즈, 80년대 ‘장승’시리즈,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까지 ‘히말라야 사람들’ 시리즈 등, 장승 시리즈를 빼고는 거의가 인간에 주목하고 있다. 반생을, 아니 사진에 접한 전생을 인간 시리즈에 바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가의 초상>을 필두로 <백민>과 <검은 모살뜸>을 역 순위로 되짚어 보니 희미하나마 그 해답을 들은 것 같다. 인간에 천착하는 그의 성찰은 문명에서 출발하여 자연의 순진성을 보장하고 육성하는 원초적 시간으로 나아간다. 이는 육명심의 예술세계가 동양의 사상체계에서 비롯되어졌음을 말한다. 인간은 생명적 자연의 일부이며 인간이 지닌 생명 에너지야 말로 에너지의 원형질에 가장 근접한 에너지일 것이다. 자연에 준동하는 에너지의 유장함을 인간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아닐까, 영상 언어를 통해 그러한 생명 에너지를 뜨겁게 언표하는 피사체들은 그러므로 깊은 사유를 불러온다. “변변치 않은 사람일수록 탈 벗기를 싫어한다.소박한 자연 속에서 탈을 벗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며 이중적이며 위선적인 인간들에게 일갈을 하신 선생의내면에 만민평등 사상이 깊숙이 고여 있음을 깨달아본다. 영속적인 시간과 유대를 맺는 그의 세계는 회귀적이며 나선적인 구조를 띠는 동양적 시간 위에 세워진다. 영문학도로서, 사진작가가 될 줄을 꿈에도 몰랐던 대학 시절에 이미 동양학을 접하고 그 진수를 찾아 용맹정진 했다는 육명심은 이미 준비된 작가임에 틀림이 없다. ‘예술가는 마치 창조주처럼 자기가 만드는 작품의 안팎 또는 그 너머 초월적인 곳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스스로를 순화하며 사라지게 한 뒤 초연히 손톱이나 깎고 있는 것이다’라고 <젊은 예술가의 초상>를 쓴 <제임스 조이스>가 말했듯 육명심의 영상언어는 초월적인 시간을 향하여 항진 중인지 모른다. 인간의 외부 세계와의 접점을 시간이라 부른다면, 문명으로부터의 자발적 퇴행은 가장 진화적인 행보가 되는 것, 원융의 세계로 회귀하는 가장 진보적인 모습이 아닐까.
-『사진예술』 201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