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저녁과의 연애 <2015년 시인들이 뽑는 좋은시>

너머의 새 2019. 2. 8. 10:57

<2015년 시인들이 뽑는 좋은시>




저녁과의 연애/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혀 질 메모지처럼 지루한 시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

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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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룬스팰지어자스민은 한 나무에서 세 가지 색을 볼 수 있다. 처음에 진보라색의 향기로운 꽃들이 피어나고, 시간이 가면서 연보라 꽃이 되었다가 흰꽃으로 변한다.  시인이 말하는 저녁은 이 중 어떤 색일까. 아마도 시인은 지금 연보라빛에서 머지않아 맞이할 흰빛을 바라다보는 시점일 것이다.

시인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고 말한다. 이 저녁,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의식을 점유하는 존재감은 사라지고 빛깔을 달리한 꽃처럼 심연의 지층을 더듬는다. 늑대와 개의 시간처럼 모호하기 그지없는 저녁 무렵, 시인은 문득 위로 받을 청춘은 이미 저물었는데 위로해줄 사랑이 남았다는 생각에 휩싸인다. 시인을 둘러싼 시간과 공간 또한 그러하고, 시인의 나이와 마음 역시 이 저녁 시간으로 모여든다.

이 작품의 압권은 마무리 연이다. 그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는 시인의 진술은 처연하다. 어둠의 입자와 같은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시인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이 곧 저녁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시인이 된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그때” 시인은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 저녁을 만난다. 시인이 꿈꾸는 저녁과의 연애가 완성된 것이다. 시인은 이제 브룬스팰지어자스민의 흰색이다. 졍결한 영혼의 자화상은 오래도록 여운을 만들어나간다. 우리는 그 여운 속에서 따스하면서도 힘찬 화해의 손길을 느낀다. “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낯선” 나를 치유했기 때문이다./박제천(시인, 문학 아카데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