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해설

깨달음의 시학, 탈존의 미학

너머의 새 2019. 4. 1. 12:01

 

■ 깨달음의 시학, 탈존의 미학/강영은

 

               -김윤하 신작소시집 조명

 

 

  불가의 우주론은 "이것이 생(生)하면 저것이 생(生)하고, 이것이 멸(滅)하면 저것이 멸(滅)한다."는 만물의 인과관계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모든 존재는 직접적인 요인과 간접적인 요인들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난다는 연기설이 그것이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끝없이 중첩되어 있는 연기적 실상 (重重無盡緣起)‘ 역시, 소박한 연기론을 우주적으로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변화하고 소멸해 가는가? 라는 이 근본적인 물음은 시인의 상상력과 연동하여 하나의 세계(우주)를 탄생케 하는 연금술이 되기도 한다. 금번에 받아본 김윤하의 신작 소 시집은 이 같은 우주관에서 출발하여 범 우주론적 존재로 이입되는 상상력의 접면에서 성찰되어진 수작(秀作)들이다.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본질론에 있어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나 원리로써 세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만물이 생성, 변화, 소멸의 과정 속에서 탐색되어진 정신의 지경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범상치 않은 사유의 깊이와 수려한 묘사로 의장된 시 속의 이미지들은 니르바나에 이르는 구도자의 심상에서 오래 달관된 평화로움을 엿보게 한다. 그녀의 시편들은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가 마치 그물과 같이 서로 얽혀 있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세계관을 통해 설득력을 획득한 가편(佳篇)들로서 말하자면, 가섭의 염화미소 같은 깨달음의 시학이며 그 울림은 구도자의 전언처럼 웅숭깊다.

 

1, 존재를 성찰하는 플래시몹

 

  탁한 연못에서 피어나는데 연꽃처럼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인간이 부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염화미소의 진의이듯 칠성바위라는 구체적 사물과 별이라는 우주적 존재와의 연계 속에서 시인은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여하(如何)한 세계를 성찰하는 수행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저만치 와불을 두고 일곱 개 돌별이 누워 있다/한동안 유성의 방문이 이어졌지만/ 하늘로 돌아가지 않았다/빛이 비춰도 반짝이지 않았고/서로 무릎이 닿을 듯 의지한 채 흩어지지도 않았다//밤마다 하늘에는 밤새도록 별이 흩어졌다 모였다/와불처럼 누운 칠성바위는/ 탈피한 허물을 북두칠성이란 이름으로 밤하늘에 걸어두고/바위 밑으로 뿌리를 키우고 있다

 

                                  -「북두칠성, 플래시몹」부분-

 

 

  밤하늘에 흩어졌다 모이는 별을 바라보는 일은 보편적인 눈의 행위이지만, 플래시몹과 연결시킨 발상의 전환은 참으로 참신하다. 플래시몹이란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이메일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약속된 행동을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흩어지는 모임이나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인터넷을 이용해 현실세계로 나오는 공동체의 경향’으로도 정의되는 것이고 보면, 일곱 개의 돌별을 지닌 칠성바위가 밤마다 흩어졌다 모이는 별의 뿌리라는 것을 찾아낸 시인의 상상력은 우주를 눈앞으로 끌어당기는 허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 사유의 표면에서 준동하는 고감도의 성능은 ‘탈피한 허물을 북두칠성이란 이름으로 밤하늘에 걸어두’는 심미의 극점을 보여준다. ‘슬픔의 탄내’가 사라질 때 까지, ‘가장 크고 밝은 눈으로 나를 끌고’ 가는 것은 그 극점을 가시화 시키는 심미적 깊이에서 파랗게 돋아나는 별빛이다. 그 별빛을 만지는 행위는 니르바나를 체험하는 일이다. 니르바나란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로 꺼서 일체의 번뇌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킨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된다고 한다. 시인은 이를 ‘화마가 지나간 자리에 봄이 꿈틀대는 것‘ 이라 말한다. 그것은 전생과 후생을 잇는 존재의 슬픔을 넘는 일, 어떠한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와불처럼 정좌한 칠성바위, 존재이해 안에서 비로소 존재자가 되는 심연의 깊이를 체험하는 일이다.

 

2, 존재를 변화시키는 소나무이무기

 

  심연의 깊이를 재는 자가 시인이라면, 탈피한 존재를 밤하늘에 걸어두는 행위는 탈 존재로 이행되는 수행을 의미한다. 이를 시인은 소나무와 이무기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갇혀있는 몸과 닫혀있는 정신의 실질적 형상을 벗어나려는 수행의 과정을 아름답게 형상화해낸다. 구체적 행위자는 이무기로 표현된다. 차가운 물속에서 1000년 동안 지내면 용으로 변한 뒤 굉음과 함께 폭풍우를 불러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상의 동물인 이무기는 늙은 소나무의 변용된 모습이기도 하다.

 

 너무 긴 천 년 높이 때문일까/제 꼬리를 움켜잡고 있는 절벽 바위에서/길 잃고 발이 묶인 검누런 이무기/ 마음절벽 끝, 하나가 된 두 그림자로 갇혀/제 고요를 되새김질 하는 늙은 소나무 닮은 한 마리 이무기를 보았다/소나무면서 이무기 비늘 모습인 내 그림자를 보았다.

                                                     -「소나무 이무기」부분-

                                             

 

  ‘금방이라도 소나무의 몸을 틀어 하늘로 올라가고 싶은’ 이무기는 미혹(迷惑)과 집착(執着)을 끊고 일체의 속박에서 해탈(解脫)하려는 존재를 의미한다. 둘이면서 하나인 관계, 육신과 마음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이의 존재를 벗어나 또 다른 존재로 변하려는 소나무 이무기는 해탈을 꿈꾸는 시적자아의 모습이라 할 것이다. 그림자의 형상은 빛, 혹은 진리의 그늘에 가려진 참자아의 내면으로서 막중한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본래적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3, 존재가 열리는 시간, 寅時

 

  인간은 대개 속세적(俗世的)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죽음이라는 물리적 현상으로 귀결 짓곤 한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늘과의 엄연한 소통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지 않고서도 자유롭게 되는 무고안온(無苦安穩)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다. 존재를 성찰하고 존재를 변화시키는 마음의 도량에서 묵언 정진한 공간적인 사유는 ‘사람이 열린다는’ 시간마저 초월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사람의 뼛속까지 양陽의 기운이 들어온다는/12지支의 셋째, 인시/바람의 숨결로 하늘이 깨어나듯/안개의 손길로 숲이 눈을 뜨고 땅이 깨어나듯/나는 힘껏 기지개를 켠다//사람이 열린다는 시간에 내 뇌와 몸이 날 일으켜 세운다/아니, 우주가 날 깨어나게 한다

                                         -「인시寅時에 깨다」부분-

 

  ‘바람의 숨결로 하늘이 깨어나듯/안개의 손길로 숲이 눈을 뜨고 땅이 깨어나듯’ 우주와 만물이 서로 조응하는 시공간 속에서 모든 존재는 만물과 여일한 인과관계를 갖는다. 상호의존성 속에서 초월적 자아가 된다. ‘내 뇌와 몸이 날 일으켜 세’운 ‘나’란 존재는 누구와도 동일시되지 않는 우주이며, 몸과 마음이 지닌 가진 여러 기능과 요인에 의해 행동하는 개체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뼛속까지 양陽의 기운이 들어온다’는 寅時는 우주와 나, 모든 만물이 습합하는 시간이며, 하늘과 온몸으로 통하는 우주의 시간이자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시간임을 시인은 말한다. 이처럼 인간 존재의 본질론에 천착한 시인의 여정은 여행길에서도 빛난다.

 

4, 존재를 불러내는 길의 미학

 

  한 편의 수묵화처럼 그윽한 정경을 자아내는 다음 시를 보자.

 

 

 깊은 곳으로부터 물결치는 서호는/안개 낀 풍경이 제격이다//태양은 저 멀리 안개 뒤에 숨어 서성대고 있다//비파행 나무배를 타고 미끄러지듯/용정찻빛 호수의 안개 속으로 숨어든다/서호의 수면 위로 세 개의 석등이 만드는 삼담인월三潭印月은/아직 불을 켜지 않았다

                                                                                           - 「서호, 비파행」전문-

 



  서호는 중국 화동지방의 명승지다. 원래 전당강(錢塘江)과 서로 연결된 해안의 포구였는데, 진흙·모래로 막혀 육지의 인공호수로 조성된 곳으로 지금은 중국의 10대 명승지 중 하나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뛰어난 절경은 계절마다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백낙천과 소동파를 위시한 많은 문인과 묵객들의 소재로 삼았다 한다. ‘비파행 나무배를 타고 미끄러지듯/용정찻빛 호수의 안개 속으로’ 들어선 시인 역시, ‘물 위에서 들리는 비파소리/운율의 물결을 정중히 받아내‘며 시인이란 존재의 原流를 헤아린다. 어느 가을날 저녁, 우연히 들려오는 비파 소리에 자신의 내면을 대상으로 하여 단숨에 비파행을 쓴 백거이처럼 ’내가 여기에 서 있는 건/오래전부터 시와 술과 거문고 노래가 나를 손짓했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 우리를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낯선 땅에서 다른 시선으로 존재를 받아들이는 시안(詩眼)의 부지런함 탓 일게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라고 한 마르셀푸르스트의 말처럼 모든 존재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여행이야말로 시인에게 있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시적 여정이다.

 

5, 나가면서

 

  다섯 편의 시를 흥감하는 동안 마음이 고요해진다. 그녀의 시 속에서 존재사유를 꿰뚫는 존재와 인간의 공속이 북두칠성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의 사유가 존재의 열려 있음 안에 들어 서 있기 때문이며 그녀의 손끝에서 고졸하고 오묘한 형상으로 구축된 시어들은 시공간을 넘는 불교적 원형의 세계에서 심연의 깊이를 고요하게 자아내주었다. ‘인간의 본질은 존재의 밝음에로의 탈존이다’ 라고 한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이해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한다면 그녀의 시들은 '존재의 밝음 안에로의 탈존'을 의미한다. 그 밝음 안에서 우주의 소리를 듣는 좋은 시는 잘 발효된 맛을 풍긴다. 그녀의 시를 읽는 내내, 잊지 못할 언어의 젓갈을 만난 것처럼 만복감이 차오른다. ‘작은 물고기 한 마리가 풍기는 지옥의 냄새에서/천국의 맛을 만나는’ 풍미야말로 시 쓰는 기쁨이며 시 읽는 보람이 아니겠는가, ‘흐무러진 생선의 몸은 사내의 몸처럼 갈색표정으로 윤기가 돈다/발효된 리엘이 주는 입 속의 천국이 궁금해졌다/천국 맛이 스며드는 혀끝의 행복이 궁금해졌다’ 민물생선 리엘로 담근 <프라혹> 처럼 혀끝에 감도는 시의 맛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 문학과 창작』 2013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