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산문

고통이 변주해낸 시공간

너머의 새 2019. 4. 1. 12:04

고통이 변주해낸 시공간/강영은

 

 자작시집을 엿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필자이자 독자인 두 입장에서 쓰고자 하는 생각과 하고자 하는 말의 불일치가 난감하기 때문이다. “생각과 말은 서로 탐탁치않게 여긴다”고 한 <조르주 상드>의 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쪽을 지향했던 간에 시집이란 시인이 그동안 써온 시의 집이지만,  집을 세우는 데 쓰인 다양한 재료 중에서 어떠한 것을 보다 중요하게 내세워지는 건 나로서는 그리 탐탁하지 않다. 내가 쓰는 시의 대부분은 어떤 목적성에 기반을 두기보담 흘러나오는 대로 받아쓰기에 더 기울어져 있는 까닭이다. 한권의 시집 속에서 탐구되어지는 결과물을 놓고 필자를 택할 것인지 독자를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 필자 쪽을 선택한 나의 자작시집 엿보기는 내 스스로를 엿보는 내면의 항진이 될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이 아닌 언어와 세계를 유람하는 주관적 성과물로써 담담한 기술을 하는 고백에 가까우리라 생각되어 진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호명되어진 그것이 숙명과도 같은 소외와 결핍의 자발적 유폐 속에서 고독이라는 이름 아래 시의 깃발을 내걸었음인가, 스스로의 흐름을 타고 내밀한 풍경과 접합점을 이룬 고독의 잔재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시공의 어느 지점에서 생성되고 결집된 이미지들로써 무연히 떠 있는 구름이었으며 습기에 젖은 시간의 형상처럼 늘 내 곁을 떠돌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몸속에 서천꽃밭이 들어있다. 이름도 낯선 도환생꽃, 웃음웃을꽃, 싸움싸울꽃들로 만발하다. 깨어진 화분에 ​몇 포기의 그늘을 옮겨 심는 나는 그 꽃밭을 가꾸는 꽃 감관

​ 꽃 울음 받아 적는 저물녘이면 새가 날아가는 서쪽 방향에 대해 붉다, 라고 쓴다. ​산담 아래 흩어진 깃털에 대해 쓴다.

-<고독에 대하여> 부분

 다양하게 변주되는 나라는 존재의 근원 탐구는 그동안 상재했던 시집 속의 빠지지 않는 질료였지만 전혀 의도치 않았음에도 과거의 시공간을 원형으로 명시하게 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다. 급격히 나빠진 건강 속에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극단적인 우울증이 나를 공격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어느 날, 고향 제주로의 귀환을 단행했다. 이승을 하직하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타면서 서천 꽃밭을 건너가듯 죽음을 건너려고 했는지 모른다.  제주도를 서천 어디쯤 있는 중간계로 생각하면서 내가 속해 있던 도시와 문명의 온갖 소음을 벗어나고자 했다.

 

사람을 꽃이라 부르는 일도 사람을 흉기라 여기는 일도 그때는 솔깃했으나 모든 비유는 낡아지는 법 내 스스로 산을 그대라 불렀고 바다를 그녀라 불렀으나 지금 나에게 그대도 없고 그녀도 없으니 스스로 젖은 적 없는 저, 산과 바다를 무슨 비유로 노래 할 것인가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尺 길어진다. -<귀거래> 부분

 형편에 닿는 대로 무작정 바닷가 자그마한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찾아갈 곳도 찾아오는 이도 없는 그 바닷가 마을에서 풀을 뽑고 꽃밭을 가꾸며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압박했던 도시의 땟자국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습기에 젖어 오글거리는 은둔과 회피여,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하는 상념의 모습이여

 

 스스로 자른 몸의 마디마디 벽이 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돌덩이가 되었으니 마음의 가장자리를 잃은 나는 일찍이 한 마리 토충(土蟲)일 뿐, 이름을 다투며 남을 누르는 것은 벌레가 할 일이 아니어서 힘써 허공을 썰어낼 뿐.

 

 밀물과 썰물을 가지고 노는 오늘이 천국이어서 나는 다만 천국의 첩경을 대비할 따름이구나 쏟아지며 다정해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죽음은 평등하니 어둠이 와도 한 줄 바다에 용맹을 바친 집어등처럼 나는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 <물계자의 노래> 부분

 바다를 벗 삼아 지내던 어느 순간, 고향 제주는 더 이상 내게 단순히 닫힘의 공간인 섬이 아니라 바다를 향해 무한정 열려있는 곳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고향 제주에 대해 새로운 눈을 갖게 되었다.

 귀신이 발목을 잡아당긴다는 백록담에서 마고의 항아리를 본다 물이 출렁거리는 솥단지, 수천수만 개의 별빛이 쏟아져도 고인 물이 무쇠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연유가 벌써 내 속에 들어온다 귀를 열면 청적색(淸笛色)의 바람, 맑은 피리 같은 바람 하나 들고 등에 지고 온 바닷가 마을은 멀다 

- 「마고(麻姑)의 항아리」 부분

 타향이 되어버린 고향 속에서 과거를 녹여내면서 비로서 나는 미처 만나지 못했던 나를 만나게 되었다. 고통이 변주해낸 내 안의 무한자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고통이 없다면 삶 또한 없는 것임을,  어떠한 수단으로도 지배할 수 없는 절대적 외재성을 지닌 무한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는 시공을 초월한 나, 즉 주체를 구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내 안의 나였다. 그래서였을까, 틈틈이 고전을 찾아 읽는 동안 신화에서 보여주는 문학 이미지는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닌 현실임을 깨달았다. 돌 속에서 위대한 형태를 끄집어내었던 미켈란젤로처럼,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조각 이전에 행해지는 형태에 관한 연구다. 라고 한 모니카 지라르디의 말처럼, 신화로 의장된 무한자는 내 안의 나를 발견하거나 과거 속에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를 읽어내는 근원이었다.

  재탄생된 신화적 풍경은 새로운 형상을 지닌다. 나는 이번 시집의 주춧돌로 신화의 현대적 변용을 삼고 싶어졌다. 가장 완전한 미래란 과거다” 라는 말을 어느 글에서 읽었던 적이 있다. 시인이 된 나의 현재적 모습은 시인이 되고자 했던 과거의 완전한 미래로 존재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어졌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불속의 연꽃처럼/불속의 소처럼 보이는/ 새를 보려고/피아노 뚜껑을 ” 여는 자가 아닌가, 나는 이제 나를 둘러싼 시간과 공간 내가 지닌 나이와 마음이 저녁을 향해 응집되고 있음을 본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저문다는 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내 안의 수많은 얼굴과 화해하는 것, 나는 나로부터 위안 받을 나이가 되었다. 물이 출렁거리는 솥단지, 수천수만 개의 별빛이 쏟아져도 고인 물이 무쇠처럼 뜨거워지지 않는 마고의 항아리처럼,


자작시집 엿보기/『시에』 2015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