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해설

모든 창조물에 존재 하는 통일성과 생명력

너머의 새 2019. 4. 1. 12:07


모든 창조물에 존재 하는 통일성과 생명력/강영은


                            -김영호 시인의 소 시집 해설


1,

시인은 현존하는 세계를 모방하고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멀고 가까운 사물의 구도를 미적으로 구축해냄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설계하는 역할과 기능을 즐겁게 감내해낸다. 이 때, 시인은 배경의 상호 연결성을 통해 지각적 체험을 기술하거나, 내면의 거울에 비쳐진 이미지들을 호명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확대 생산하는 초월적 눈을 지니게 된다. 김영호 시인의 시편들은 시 창작의 지경을 지구화 하고 있다는 시인의 말마따나, 보헤미안적 심미안을 견자의 입장에서 환기시키며 완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인이 시작노트에서 말한 ‘관념과 사실의 차이를 지운’ 시세계’는 시인의 도출해낸 세계로써, 현실적 공간과 심리의 중복을 통하여 우주의 속성을 추출해내는 것으로 보여 진다. 다음의 시를 보도록 하자.

워싱턴의 시애틀 해는 사람들의 꿈이 화산처럼 끓는 우주의 심장이다.

온 몸이 가슴뿐인 해는 초목과 사람들의 뼈 속에 황금피를 부어준다.

겸손한 자들이 이마에 핀 꽃을 꺽어 경배하는 신이다.

가슴속에 촛불을 키고 기도하는 자들의 소망을 별꽃화원으로 가꾸는 원정,

사람들의 맑은 눈에 포도나무 새싹을 모종하고

선함의 키만큼 영혼의 키를 자라게 하는 농부이다.

하늘 역에서 수만 톤의 곡물, 꽃씨, 새 노래, 시집, 성경들을 싣고

지구 역으로 내려오는 태양열차,

집집의 앞마당에 바람과 비가 짐들을 하역한다.

해는 행인들의 모닝커피 잔속으로 들어가 출근 도장을 찍고

노숙자의 텐트 속으로 들어가 잠옷을 입히고 황혼이불을 덮어준다.

하늘을 오래 바라보는 자의 눈에 천국의 창문을 열어준다.

그 사람의 눈에서 별이 노래를 한다.

시애틀 사람의 얼굴은 사과다. 사과가 웃는다.

사람들의 외로운 가슴속이 해의 집,

고독하고 아픈 자들의 방문 앞에 해의 신발이 놓여있다.

대지위에 바다위에 시를 쓰는 태양시인,

그가 풀잎위에 쓴 꽃 시들을 휘파람새가 읽고

파도위에 쓴 시를 물고기들이 낭송한다.

해변의 조약돌에서 날개가 돋아 갈매기 새끼에게 입힌다.

창공에 산야에 수채화를 그리는 대화가,

사슴 떼들이 스키어들처럼 눈 산 위를 뛰놀고

산새들이 구름자전거를 타고 하늘까지 경주한다.

풀벌레가 눈먼 사람에게 저의 노래를 햇살점자로 읽어주게 한다.

귀가 어둔 자의 얼굴을 만져주어

그의 두 귀가 비들기가 치는 새벽종소리를 듣게 하고

크로바꽃 향기가 태평양을 건너 날아오는 소리를 듣게 한다.

불꽃 땀방울 뚝 뚝 떨구며 밭을 갈고 희망을 경작한

고달픈 농부들의 흙발을 금빛석양으로 씻어주고

저들의 기도를 날개 속에 품어 하늘로 퇴근하는 시애틀의 태양,

구원의 불사조, 자비의 인자이다.

. - <워싱턴의 해> 전문

시인은 ‘워싱턴에 뜨는 해’를 ‘우주의 심장’이라고 표현한다. 나아가 ‘겸손한 자들이 경배하는 신(神)’이며 ‘영혼의 키를 자라게 하는 농부’이자 ‘시인’이며 ‘화가’라고 칭송한다. 날마다 변함없이 떠오르는 태양의 가시(可視)감은 ‘구원의 불사조, 자비의 인자’인 존재로 불멸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때문에, 태양 자체를 실감나게 그려낸 이미지라기보다 감각적 또는 지적 표상으로 간접화시킨다. ‘우주적 견자(The Seer)’로써의 눈을 갖는 순간이다. 감각경험의 복사 또는 모사(模寫)이기도 한 ‘워싱턴의 해’는 복사된 이미지들을 통해 태양에 대한 경외심을 노래하는 시인의 심리 상태를 형상화함으로써 이미지의 자발성을 보장한다.

2,

시의 이미지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함으로써 내용을 보다 선명하게 인식하고 시적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유발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이를 엘리엇(T. S Eliot)은 ‘객관적 상관물’이라 말한 바 있다. ‘객관적 상관물’은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의 특징이나 모양, 행동 등에 의미를 부여해서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담아내는 표현 방식이다. 객관적 상관물이라 불리는 언어와 비유의 언어 사이에는 사물의 긴장이 동원되기 마련이다. 일상생활의 개인적 감정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과는 직접적 관계가 없는 어떤 심상, 상징 사건 등이 등가적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김영호 시인은 도처에 ‘객관적 상관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추상적인 것을 구체화 시키는 형식으로 이미지를 완성한다. 이는 사르트르(J. P Sartre) 가 말한 이미지와도 부합된다. 사르트르는 이미지를 사물에 관한 의식의 한 형태로 견지한다. 그러한 사물 인식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며, 그 방법은 비유적인 것에 특징이 있다. 이렇게 보면 김여호 시인이 기술하는 이미지는 비유 언어(figurative language)로써, 작품의 흥미와 완성도를 품위 시키는 요인이 된다.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객관적 상관물들은 인간과 등가의 풍경을 보여준다. 다음의 시에서 그러한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동백꽃 머리에 꽂은 아침 해가 섬사람들과 함께 유람선을 타고

시애틀 다운타운으로 출근을 한다.

섬 갈매기들도 아지랑이꽃을 이고 시장에 팔러 간다.

나무들이 푸른 트레이닝을 입고 바닷가에 조깅을 하고

풀잎들이 가슴이 보이는 엷은 불라우스를 입고 산책을 한다.

강아지들이 사람들의 손을 잡고 걸으며

연인들이 벤치에 앉아 모닝커피와 포옹을 한다.

아이들이 연등에 업혀 공중에서 달리기를 하고

자전거가 우산을 쓰고 해안가를 달린다.

유람선이 동백나무에 핀 봄을 육지로 실어 나르고

왜가리가 수초의 겨울옷을 벗겨 부리에 물고

수평선 너머 동쪽 고향을 향해 바라보고 있다.

민들레가 노란 미소로 길가에서 봄의 수채화를 판다.

물까치새들이 물고기들 합창소리에 월츠춤을 추니

오리들이 따라 레슨을 받고 있다.

저녁노을이 별이 된 사람들과 훼리 유람선을 다시 타고

가까운 섬 집으로 퇴근을 한다.

나그네가 바닷가에 앉아 빈 잔에 달빛을 받아 마시고

동백나무와 포옹을 하고 함께 동백꽃 핀다.

해변에 바위 몸을 하고 서 있는 한 그루 붉는 소나무

동백꽃을 소실로 맞아 살림을 차린 조선 한량 같다.

겨우내 그의 몸에 둥지를 튼 작은 우울 새 한 마리가

봄 바다 연초록 물에 나래를 씻고

커다란 흰머리 독수리가 되어

검은 구름을 찢고 높이 날아오른다.

-<알카이 비치> 전문

시인은 알카이비치(Alki Beach) 섬의 풍경을 세밀하게 스케치 하면서 풍경, 혹은 사물에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위치를 부여한다. 알카이비치가 점하고 있는 시속의 사물들은 하루의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 사물은 그 자체로 파악된다고 하여도 대체로 의미의 애매성 속에 남아 있게 마련이지만 인간을 주체로 강조된 이미지는 역동적인 생명력을 보여준다. ‘나의 종교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그의 말처럼 의인법과 활유법을 활용해 주변의 세부(細部)를 의장시키는 수사법은 휴머니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자유로운 혼의 역동적 창조의 탐험’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3,

이미지화된 사실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통하여 보다 큰 의미의 구조로 확대 된다.비유 또는 기억 속에 일어나는 사실이나 사건은 경계의 담장을 넘는 연속성에서 사물의 테두리를 보다 넓게 열어준다. 이 테두리는 존재하는 것들의 시공간을 넘어서 궁극적으로 존재의 원형을 추구하게 된다. 김영호 시인은 시를 쓰는 일이 ‘나를 떠나 나를 찾는 몽상의 여행이요’, 시(詩)는 ‘방랑의 순례지에서 스스로 찾아오는’ ‘진여(眞如)의 존재’라고 자신의 시론에서 밝힌 바 있다. 시를 쓰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현재의 나이며, ‘현재의 내가 진여임을 본다’는 그의 고백은 진리의 세계에 닿으려는 궁극의 모습이 아닐까,


밀 보리들이 어린이들처럼 동요를 부르고 춤을 춘다/발가벗은 아이들이 뛰어노는 새 에덴동산이다./푸른 알몸의 아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서로 바람막이가 되어 준다/모두가 한 몸이 되어 더불어 산다/너와 내가 없다/나와 너의 선(線)이 없다/너와 나의 금이 없다/모두가 한 몸이 된 우리이다 -<팰로스의 밀밭 초원> 부분


팰로스의 밀밭 초원은 미 워싱턴주 동남부에 펼쳐진 대략 3백km가 넘는 광활한 밑밭이다. 그곳에서 잃어버린 낙원을 발견한다. 인류의 근원이자 회귀의 꿈을 생성케 하는 에덴동산으로 지칭한다. 이를 다양한 이미지로 변용한다. 평등의 손수건, 일원(一元)의 상형문자, 평민의 자유 시장(市場), 민초의 앙상블(ensemble), 정선 오일 장터, 총화의 그림책, 자연이 쓴 성경책, 통일을 연주하는 악기, 휘트먼의 시집 등, 다채롭게 세워진 관념의 조형물과 구체적 형상화는 시인이 바라고 열망하는 원형의 세계일 것이다. ‘나의 몸을 탈출했던 영혼이 이 초원에 와 풀잎이 되어 휘트먼 시인과 함께 소요(逍遙)를 하고 있다/나와 내가 우리가 되어 시의 춤을 추고 있다’ 고 고백한 화자의 전언은 시와 시인을 두루 포섭하는 지경이 된다.

4,

시적 이미지는 인간의 가장 주관적인 표현 형태이고, 바슐라르에 따르면 그 주관성 때문에 이미지가 언어에 선행한다. 인간의 정신 활동이 상상력의 매체인 이미지를 통해 지각-인식-기억-회상의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면, 이번에 받아본 시편들은 시적 이미지의 활용에 있어서 견고한 창조를 한 셈이다. ‘동면하던 씨앗을 깨워 그의 입술에 젖을 물리는’ 행위이다. 그는 이제 보헤미안으로서의 긴 여정을 마치고 오레곤 기차를 타려고 한다. ‘오레곤의 대지에선 고향의 흙 내음이 더욱 짙기 때문이다’ 고향은 어떤 곳인가, 물리적 존재의 탄생지라는 장소적 개념을 벗어나면 존재의 본질이 되는 세계, 타아가 존재하지 않는 진여의 세계 그 곳이 고향일 것이다. ‘오레곤 기차여행은 내가 우주를 순례하고 어린아이로 돌아오는 중생(重生)의 여행 ’태초의 우주 속으로 들어갔다가 /한 마리 양이 되어 오는 우주여행이다‘-<오레곤 기차여행>의 부분


시인이 포괄했던 고향은 시적 진리에 도달하려는 존재의 본향으로서, ’우주‘라는 근원적 공간이다. 그 곳을 향해 부단한 이미지를 선사했던 시인의 시편들을 읽는 동안, ‘시, 우주, 독자는 하나’라는 휘트먼의 목소리를 듣는다. 모든 창조물에 존재 하는 통일성과 생명력을 선포한 사유의 깊이, 시인이 닿으려는 세계의 광활함을 답습하기엔 미력하지만 자신의 시론과 확고히 부합되는 목적성에 충일한 시편을 읽는 것은 나와 같은 후학(後學)에게는 배움이며 새로운 지평이다.



김영호 시인 약력.


. 한국 외국어 대학 영어과 졸업 학사,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 수학,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졸업(석사. 박사),

『현대시학』1991년 시인 등단, 숭실대 영문과 교수(영미시, 비평) 미국 하와이 주립대 초빙교수, 워싱턴 주립대 교환교수

.시집『당신의 초상』『무심천의 미루나무』『잎사귀가 큰 사 람』『『순복』

▪ 저서『한용운과 휘트먼의 문학사『문학과 종교의 만남』, 등

▪ 현재 숭실대학교 영문과 명예교수, 미국 시애틀 형제교회 실버대학(HJI) 시 창작 교수.


 

『문학과 창작』 2017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