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인화(印畵)

너머의 새 2019. 4. 1. 12:19



인화(印畵)/강영은


엄마 입술은 검게 드러나네

엄마가 입은 초록 저고리는 더 검게 봄빛을 드러내네

엄마가 꺾어준 동백꽃 모가지를

뚝뚝 따고 있었지만

산으로 간 외삼촌과 뭍으로 떠난 아버지 사이에서

빼꼼히 내다보는 흰색이 싫어,

엄마 눈 코 입에 돋아나는 흰색이 싫어,

검정 크레용을 꺼내 마구 칠했던 그 봄

찔레꽃 사이사이 숨어들던 외삼촌도

푸른 물결 넘던 아버지도 사진 속에서 사라졌네

한낮의 태양아래 비명 없는 무덤이 출몰했네  

남은 건 검고 울창한 배경뿐인데

움트는 새싹조차 숨을 죽이는 

색맹(色盲)의 계절

엄마 눈가에 흘러내리는 검은 색이 좋아 

엄마 눈물 감추어 주는 검은 봄이 좋아  

엄마가 남긴 흑백사진을 꺼내 보네

해마다 4월이면 지워진 얼굴을 다시 그려넣네

빨갛고 파란 색에 눈이 먼 봄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늙은 팽나무 가지가 참새부리 같은 이파리를 내밀 때

채 피지 못한 그 날의 봄을 다시 그려 보네

동백꽃 붉게 떨어뜨리는 봄비에 젖어 흐느끼는

내 안의 봄을, 만화방창(萬化方暢)

피워보는 것이네


​- 3,1 운동 100주년 기념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