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새 2019. 4. 1. 12:21




이것/강영은

 

     

 이것은 개랑인가 굼뉘인가 노루막이 너테인가 느루느루 흘러가는 뉘누리인가 도린결의 도래샘인가 노해의 마믅소리인가,

 

이것은 볕늬에 잘 익은 보늬인가 소솜 속새에서 새어나오는 새물내인가  손샅 사이 허공 중에 아그데아그데 매달린 열매의 늠인가

 

미음 돌 듯 묏채에 내린 이내 속 이슬 바심, 벼리를 흝어내려 가다 엔담속에서 하냥 다짐하는  

이것은 츠렁바위와 푸서리를 넘는 하늘신폭인가 호요 바람 속에 흩날리는 지저깨비인가 풀쳐생각인가 

한데 누워 해뜩해뜩 밤을 새우는 한늬,

이것은 사람인가 동물인가 개인인가 무리인가 입는 것인가 먹는 것인가 거주하는 곳인가

 

이것은 무엇인가이것이 아니면 그것인가,  이것도 개랑인가.

 



 

나는 선입견을 뛰어넘은 시인이다중에서 열린시학2019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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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노트

 

  나는 담쟁이라는 시에서한 줄의 문장으로 나는 나를 넘고 싶다라는 언표를 한 적이 있다.“나를 넘고 싶다는 말은나의 부재를 위해서 제기된 언어이다. “부재는 모든 나의 재행사(再行使)를 격파한다. 그렇다. 그것은 다만 언어뿐이라는 것의 재빠른 소멸이다. 그리고 그것은 숙명적인 오점이며 헛된 완성이다라고 프랑스 시인 <이브 본프아>가 말한 것처럼, 시를 쓰는 나의 덧없음과 부질없음도 숙명적인 오점임을, 헛된 완성임을 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 두 가지 명제를 향해 방랑하는 순례자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하는 언어를 향해 걸어간다. 그렇게 나는 나를 넘고 싶다. 언어의 소멸과 부활이 나의 몫이라면, 태초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