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과 존재로의 귀거래/성백선(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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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과 존재로의 귀거래/성백선(시인)
-강영은 시집 『마고의 항아리』현대시학
돌무더기 가슴 답답한 날이면 제주행 비행기를 탄다 바닷가 빈 집으로 돌아간다 잡초 무성한 밭을 일구고 밤바다에 어망을 던져두니 물 밖으로 나온 밤낙지처럼 눈이 맑아진다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었던* 서울을 도망치듯 벗어난 일이 그대 탓인가, 물결은 한결같은 문장에 밑줄을 칠 뿐 별빛에도 눈동자에도 가없는 밀물
사람을 꽃이라 부르는 일도 사람을 흉기라 여기는 일도 그때는 솔깃했으나 모든 비유는 낡아지는 법 내 스스로 산을 그대라 불렀고 바다를 그녀라 불렀으나 지금 나에게 그대도 없고 그녀도 없으니 스스로 젖은 적 없는 저, 산과 바다를 무슨 비유로 노래할 것인가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척尺 길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
그 바닷가에서 섬이 된 사람들을 오래 기다렸다
―「귀거래」 전문
강영은 시인이 서울생활을 벗어나 고향 제주로 내려가 시집 『마고의 항아리』를 상재하였다. 시편마다엔 귀소 의식이 빚은 은유의 항아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시집 편편에 담긴 언어의 부림이 웅숭깊고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때가 되면 고향을 향하는가. 고향은 한 개인에게 있어 삶의 근원을 이루는 원초적 공간이다. 현실에서의 삶이 힘겹고 고통스러울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는 더욱 절실해지는 법이다. 시인도 자신을 이루는 원동력으로서의 고향으로 되돌아가 문명에게 다친 마음을 추스르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재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와 정체성을 찾고 자연에서 깨달은 이치를 앞으로의 삶과 시편에 투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집 전체를 가로지르는 주된 맥락이 제주의 자연적 특색과 전통적인 미의식의 내재화에 맞닿아 있다. 즉 제주의 물, 바람, 여자를 제재로 하여 형상화한 시편들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온전히 고향에 귀환했음을 나타내준다. 또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와 같은 한국 고전에서의 시상 발췌를 통해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분투한다는 것이 역력하다.
“정신을 육체의 노예로 만들었던 서울을 도망치듯 벗어”나 안착한 고향엔 무위의 자연이 시인의 정신을 맑게 가다듬어 준다.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자신을 세우고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면서 겸손한 나날에 순응해 나간다. 물결과 함께 하는 시인의 귀거래는 슬픔도 말라 저만치 달아나 있고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과 사람들을 기다리는 일에서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운다.
강영은 시인이 낙향해서 쓰는 시편은 경박하고 물질중심적인 도회의 삶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피폐해져 가는 영혼을 일깨우고자 역설하는 듯하다. 시인의 말대로 “저문다는 건 내 안의 수많은 얼굴과 화해하는 것”이다. 문명이 낳은 갈등 속에서 자신을 제어하고 난삽한 정신으로부터 자연으로의 귀거래를 통해 존재가치를 높이려는 시세계가 깊고 아름답다. 은거하는 듯 발현시키는 시의 형태가 개성 있으면서 설화적 관점에서 취하는 전통적 서정이 한껏 멋스럽다.
『 문학과 창작』 2015년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