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머의 리뷰

틈새를 채우는 화해의 몸짓/이 덕 주 (시인, 평론가)

너머의 새 2019. 6. 21. 22:24

틈새를 채우는 화해의 몸짓/이 덕 주 (시인, 평론가)

            ​ㅡ강영은 시집『마고의 항아리』(『현대시학,2015)』)

 

 

강영은의 시가 존재하는 근원은 무엇일까? 그 점을 궁구하게 하는 시집『마고의 항아리』가 출간되었다. 그는 서문에서 “삶은 때로는 죽음마저도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은유”임을 언술하며 자신을 향해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내 안의 수많은 얼굴과 화해”하는 시적 행위를 지지한다.

 

시적 대상에 동감을 부여하고 그 깊이를 감각하는 강영은이다. 그는 대상을 통찰하며 대상의 본질을 자신이 설정한 구도에 정치한다. 또한 대상을 견인하며 자각과 충일한 성찰을 통해 의도적인 선택과 배치하기를 즐겨한다. 자신만의 독법으로 대상에 대해 균형감각과 시선의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음이다. 그만큼 대상의 내면을 깊게 응시하는 투시력이 원융하게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애증을 적절하게 배분하며 평형을 견지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강영은은 내적으로 견고한 자신의 자유의지를 진술하고 실현하려 한다. 그는 자신의 시를 통해 자신의 부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려 한다. 또한 그 반작용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연하게 재현하려 한다. 그것은 원형을 향한 복원의식이며 자신의 정체를 인식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실재적 삶은 그의 시 속에 존재한다. 본원을 향해가는 강영은의 이성적 탐미의 세계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의 시 편 편에서 독자가 동질감과 친근감을 향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ㅡ「저녁과의 연애」부분

 

저녁은 어둠이 자기 자리로 돌아와 낮과 밤을 구분하게 하는 경계의 시간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에 위치한 화자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못해 순간적으로 단절감에 젖어든다.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다며 빠져드는 그 자리,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고 감각한다. 유리창 속에 남아있는 저녁의 명징한 이미지, 그 잔상을 주시하던 화자는 화자의 마음 속 저녁과 교감하듯 ‘수백 개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혼자라는 위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한다. 교차되고 클로즈업되는 ‘수백 개의 얼굴’은 지금 화자 곁에서 화자에게 연정을 불러일으키듯 친근감으로 다가온다.

 

‘수백 개의 얼굴’은『마고의 항아리』곳곳에서 다양한 양태를 보여주며 출현하는 시인의 천변만화의 모습이다. 그는 “얼굴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괴석의 틈에 끼어 자란 꽃의 표정은 옅은 먹빛”, “그 기이함이 침묵의 참 모습”(「수석유화瘦石幽花」)임을 곳곳에서 투신으로 보여준다. 그의 시적 대상들은 “통곡의 벽을 지나는 사람들”(「석간夕刊」)로 변신하고 “붉은 갈기와 황금빛 눈을 가진 메추리 새끼”(「소지燒紙」)로 환치된다.

그 자리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붉은 심장을 쥔/ 손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악수」)듯이 “흘러내리고 싶은 표정과 터질 듯한 감정으로 어제의 혀를 통역”(「고드름」)하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수백 개의 얼굴’이 머무는 곳은 강영은의 이미지가 은유적 형상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는 자리다. 그곳은 물리적 시공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때론 시인의 상상과 기억이 난무하며 수많은 일탈이 작용한다. 그 형상 내면에 강영은은 자신이 구축하고 고집해온 인식의 장막을 해체하며 세계와 사물의 이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곳은 시적 대상물이 된 세계와 연대감을 형성하며 자신과 합일되는 공간인 것이다.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음하던 말을 쏟아낸다

손에 든 그것이 지구인 줄 모르고

눈에 든 그것이 우주인 줄 모르고 내가 지닌

언어는 코스모스를 운반한다

바람처럼, 햇살처럼

바닥없는 것들이 바닥이 되는 계절이 가을이다

잠자리를 펼치면 당신과 나 사이가 투명해진다

ㅡ「가을의 중력」부분

 

시인의 심연에서 ‘신음하던 말’은 무엇일까. 자신을 궁리하게 만드는 화자의 의문은 폭넓게 보면 자기존재에 대한 물음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공생대각중空生大覺中 여해일구발如海一漚發이라는『능엄경』의 한 구절을 연상하게 한다. ‘허공의 무변한 우주도 근본생명체인 대각大覺에서 비롯되니 마치 큰 바다의 한 물거품과 같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지구와 우주의 무한한 지경도 화자의 마음작용에는 한낮 ‘손에 든 그것이’며 ‘눈에 든 그것’일 뿐이다. 우주의 존재를 인정하며 자아의지에 활력을 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속에서 우주가 화자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려 한다.

화자는 가을의 들판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언어는 코스모스를 운반”하고 있음을 착안하고 이를 형상화한다. ‘코스모스’가 화자가 설정한 우주와 직결됨을 감각하며 우주적 차원 속에 자신을 연결하고 나아가 우주존재의 질서에 대해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자의 ‘언어’는 우주의 질서를 조율하는 ‘언어’로 강영은이 직조한 한 편의 시와 병존한다. 다만 자신이 “지구인 줄 모르”겠다고 고백하듯이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우주인 줄 모르’듯 무한성을 의식하지 못했다고 토로하면서 역설적으로 우주에 닿는 거대한 ‘중력’과 ‘가을’의 연계를 감지하는 것이다.

 

화자에게 ‘바람’과 ‘햇살’은 가을의 구성요인이다. “바닥없는 것들이 바닥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화자에 의해 부여받고 있다. 화자의 시선에는 시적 대상이 “바닥없는 것들이 바닥”으로 존재한다. 화자가 몸을 낮춘 시선으로 대상을 감각하는 것이다. 시적 대상과 한 자리에 머물듯이 “잠자리를 펼치면” 가을의 소재가 된 우주의 모든 존재요소가 된 “당신과 나 사이가 투명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근저에는 강영은이 시적 대상의 무한한 변화가능성에 서로 다름이 없다는 관점으로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의 중력」 인용문면에서 강영은의 시선과 그 깊이는 “바닥에서 보는 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단단한 흉기이냐”(「별똥별」)처럼 우주와의 접면이 그만큼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또한 “죽은 나를 애도하는 국화꽃”(「조문의 방식」)과 “물고기도 아니면서 물고기의 마음을 읽는 것”(「어락도」)과 같이 “바닥없는 것들이 바닥”으로 공존하는 것을 기꺼이 감수한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시적 대상들과 심미적 동감을 일으킨다고 보아진다. 확장해서 보면 그것은 우주에 존재하는 시적 대상을 자타불이自他不二와 불이不異의 시각으로 보여주려는 시적 행위가 상상적 언어로 확산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스로 자른 몸의 마디마디벽이 되고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돌덩이가 되었으니 마음의 가장자리를 잃은 나는 일찍이 한 마리 토충土蟲일 뿐 이름을 다투며 남을 누르는 것은 벌레가 할 일이 아니어서 힘써 허공을 썰어낼 뿐

 

밀물과 썰물을 가지고 노는 오늘이 천국이어서 나는 다만 천국의 첩경을 대비할 따름이구나 쏟아지며 다정해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죽음은 평등하니 어둠이 와도 한 줄 바다에 용맹을 바친 집어등처럼 나는 어두워지지 않는구나

ㅡ「물계자의 노래」부분

 

강영은이『삼국유사』제5권 피은避隱편의「물계자勿稽子」를 시편으로 설정하는 것은 물론 의도적이다. 그만큼 물계자의 생이 자신의 생과 비견하여 예사롭지 않게 접근되기 때문이다. 지면관계상 물계자의 일생을 짧게 요약해본다.

 

 

물계자는 전쟁에서 군공軍功이 제일이었음에도 이를 알아주지 않음도 원망하지 않고 그 이후 다른 전쟁에서 임금의 위태로움에 자신이 목숨을 다해 돌보지 못함을 자신의 불 충으로 돌리고 “이미 충효忠孝를 잃어버렸는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조정과 저자를 왕 래하겠는가.” 통곡하면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거문고를 들고 사체산에 은거했다. 물계자는 은거하면서 대나무의 성벽性癖을 슬퍼하며 이에 가탁해 노래를 짓고 흐르는 물소리에 의 지해 거문고 곡조를 지으며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삼국유사』제5권 피은避隱편「물계자勿稽子」(역해자. 최호, 1991 홍신문화사)

 

화자가 물계자勿稽子의 심중을 “마음의 가장자리를 잃은 나는 일찍이 한 마리 토충土蟲일 뿐”으로 묘사할 만큼 극단적 처절함을 대변한다. 또한 “이름을 다투며 남을 누르는 것은 벌레가 할 일이 아니어서 힘써 허공을 썰어낼 뿐”이라며 마치 화자 자신이 그러하듯 물계자의 결곡하고 고독을 자처한 한 생을 연결한다. 화자가 극한에 처한 물계자의 심사에 가닿는 것은 그만큼 화자가 처한 입장이 그와 다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읽혀진다.

예시한 두 번째 연은「물계자의 노래」마지막 연이다. 화자는 물계자의 입장에서 물계자의 속마음을 가정하며 죽음에 임해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말을 적극적으로 고변한다. 물계자가 은거한 후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그가 혼자 맞는 죽음은 어떠했을까 그 통한을 상상하게 하는 문면이다. “쏟아지며 다정해지는 눈물 속에서 모든 죽음은 평등”한 것으로 죽음에 당면한 자신에게 위안을 보내는 물계자의 심사는 화자에 의해 생사의 초월의식에 젖어 고절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정치되는 것이다.

물계자는 지금 “어둠이 와도 한 줄 바다에 용맹을 바친 집어등처럼 나는 어두워지지 않는”다고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수용하려 한다. 죽음 이후를 “바다에 용맹을 바친 집어등”으로 기억을 환기하는 강영은이 물계자와 동석을 하고 있는 듯 화합을 보여주는 문면이다. 나아가 제주의 바다와 동반 성장한 강영은의 내면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기 위해 불 밝히는 ‘집어등’처럼 시를 밝히는 ‘집어등’이 자신의 근원을 향하길 기원하였을 것이다.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보고 울었다 하네””(「눈물의 이면」)

 

“죽음 앞에 붉 밝힌 내 눈동자는 검게 그을린 잿더미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배롱나무 자서전」)

 

“물결의 이목구비를 보고 말았으니 저 물결은 내 것이 아니어라. 내 것이 아니니 빼앗김도 없어라”(「처용, 풍랑을 다시 읽다」)

 

강영은이 묘파하는『삼국유사』편 편은 자신의 본원을 향한 적극적 지향을 형상화한 절편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를 거슬러『삼국유사』에 몰입하면서 강영은은 다양한 속성을 지닌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으리라 짐작해본다. ‘거울 속의 제 모습’도 ‘죽음 앞에 붉 밝힌 내 눈동자’도 ‘물결의 이목구비’도 모두 강영은의 변신이며 차용된 모습인 것이다. 그는 등장인물들의 절절한 운명에 동감하고 그들을 대신해서 그들 활로의 절연에 대해 연민과 안쓰러움으로 고뇌했을 것이다.

 

강영은이 현시하는『삼국유사』의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시적 행로에는 일상의 행법을 뛰어넘어 세속을 탈각시킨 장면이 연속된다. 강영은은 어쩌면 그들을 통해 자신의 운명이 시험되고 있음을 거듭 확인하며 내면의 도량을 시를 통해 현시하고 싶었을 것이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바다, 나는 언제나 내리면서 녹는 눈송이로 네게 닿고 싶었네 그래, 그래, 나는 떠도는 공기와 물 아니, 허공의 틈새를 채우는 눈

ㅡ「제주, 겨울비」부분

 

바이칼 호수도 태산도 생각 속에 들어 묵상중이네

하나같이 가부좌 튼 부처들이네

...(  )...

아름다운 수형을 지닌 생의 절정은

뺨을 맞거나 어깨 짓밟힌 시간 속에서 걸어 나왔네

싱싱하게 뻗은 결의는 구부러진 시간 속에서 걸어 나갔네

세상을 한 손으로 괸 반가사유상도

제 몸의 직선을 구부린 후에야 미소를 띠었네

여기까지 온 마음이 생각하는 정원이네

여기까지 온 마음이 한 그루 분재네

ㅡ「생각하는 정원*」부분

 

강영은은 고향에 대해서만큼은 무심無心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제주는 강영은의 고향이다. 그가 제주에 주거지를 마련한 곳은 그에게 유년의 적재된 추억을 수시로 환기하게 한다. 그곳은 그가 고향을 떠난 도시생활에서 겪던 차별과 분별의 마음을 비로소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음을 화자에게 인지하게 하는 장소인 것이다. 고향의 외딴 방은 자신의 몸을 눕히며 온전한 자신과 만나며 비우면서 자신을 채워주는 느낌을 받는 비의의 장소였을 것이다.

 

강영은은 비가 내려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비만 오면 젖어버리는 자신의 마음을 떠올린다. “녹는 눈송이로 네게 닿고 싶”은 그 마음과 “허공의 틈새를 채우는 눈”은 다르지만 전혀 다르지 않은 화자의 눈인 것이다. 내면과 외면이 한 몸에서 분신인 듯 하나의 작용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본다.

 

이처럼 마음이 작용하는「생각하는 정원*」은 역설적으로 ‘생각하는 강영은’을 생각하게 한다. 생각은 “구부러진 시간 속에서” 생성되고 있음을 화자는 반복해서 보여주려고 한다. “여기까지 온 마음이 생각하는 정원”이었음을 깨달으며 “여기까지 온 마음이 한 그루 분재”와 같이 화자와 다르지 않다고 비로소 자기 확인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이칼 호수도 태산도” “하나같이 가부좌 튼 부처들이”이라고 보는 강영은이 불이不二와 불이不異의 시각으로 대상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강영은은 시집『마고의 항아리』에서 자신과 대응하는 수많은 대상들을 그는 시적 진술을 통해 존재영역으로 견인해온다. 동시에 상실의 체험을 부재의 이미지를 벗어나 복원을 향한 이미지로 변주하려 한다. 그곳에서 “가짜가 피우는 것은/ 태어난 곳을 잃어버린 헛꽃”(「제주 한란」)이었음을 확인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근원을 환원시키려 한다.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내 안의 수많은 얼굴과 화해”하는 그의 시적 행위는 자신의 복원의식이다. 그의 자유의지가 현현되는 그곳은 “빛과 어둠을 넘어” 삶의 현장인 ‘지금 여기’ 그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다층』 2015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