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연금술과 필사의 방식들/박성현
바람의 연금술과 필사의 방식들
-강영은 시집『마고의 항아리』
박성현(시인, 문학박사)
처마 밑으로 느리고 무거운 바람이 불어온다. 잠들어 있거나 감춰진 것, 혹은 모호한 것들을 들춰내며, 그 냄새 또한 강한 악력握力으로 휘감아버린다. 바람은, 깊이와 높이를 확정하지 않은채, 이 때에 짊어진 풍경의 더미 속에 처마 밑의 흔절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사물은 바람의 내륙
에서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확장되며, 동시에 전에 없던 은밀한 존재로 재탄생하지 않는가,
그 때의 불가사의한 느낌을, 그 차가운 위로와 피로를,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어느 저녁에 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저녁과의 연애). “내가 사라진 자리에 불현듯 찾아오는 수백 개의 얼굴들”이라는 표현 속에서 우리는 놀랍게도 바람의 연금술을 읽을 수 있다.
강영은 시인은 언어를 통해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이 느끼는 감각을 언어로 결집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람이 움켜쥔 소리들의 화음으로, 그것이 일깨우는 언어의 양태와 경이(사소하거나 대범한)가 바로 시의 내면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수사적 은유를 넘어서는 것으로, 화
음에 매혹된 채 장엄하게 울리는 ‘합창’ 이고 고요하고도 순수한 ‘격렬함’이지 않을까,
풀잎피리에 영근 ‘바람의 연금술’
그는 이연금술을 마고麻姑의 손처럼 활용하는 특이한 감성을 가졌다. 특히, 두 사물을 변증하여 전혀 다른 사물로 재탄생시키는 것은 시인이 가진 장기이다. “당신과 나의 입김으로 태어난 모로코나비n-nabi는 단풍잎 아래 파란색 수은주를 멈춘다// 두 날개가 접힌 세계는 벌써 낯설고 먼 지상이다” (석간夕刊)라고 노래할 때, 모로코 나비의 두 날개로 비유된 사물의 감각은 ‘접힘’으로써 낯설고 먼 지상(세계)로 탈바꿈한다. 풀잎피리를 한 마리의 작은 새로 비유하기도 한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 작은 새 한 마리 살았네
입술을 떨게 하고 심장까지 흔드는 새부리에선
거문고 같기도 하고 비파 같기도 한 선율이 울려나오곤 했네
귤 잎사귀를 물면 귤꽃 피는 소리, 감 잎사귀를 물면 풋감 여무는 소리, 갈잎을 물면 갈대 우는 소리
나무가 키우는 온갖 소리가 그 새의 부리에 들어 있었네
- 초적草笛 부분
초적草笛이란 글자 그대로 ‘풀잎피리’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풀잎에 작용하여, 가늘고 긴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들은 기분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소리로 들린다. 자연스러운 물리적 현상이 인간의 감각에 작용하여 음악으로 뒤바뀌는 순간이다.
시인은 우선소리를 내는 조응기관의 유사성을 통해 사람과 풀잎피리의 관계를 ‘새’로 치환한다.(“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 작은 새 한 마리 살았네”) 그리고 그는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서 ‘거문고’나 ‘비파’의 선율을 들으며, 때에 따라서는 ‘귤꽃 피는 소리’ ‘풋감 여무는 소리’ ‘갈대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소리박물관’처럼 세상의 모든 소리로 확대될 수 있다(“ 오래된 고막의 내피를 들추고 모래를 퍼내던 그때였을까,//세상의 모든 파도 소리를 끌어안은/ 당신의 몸이// 소리박물관임을 알았던 것은,”(소리박물관). 풀잎에서 나는 소리는 대부분 비슷할텐데, 놀랍게도 시인은 이파리마다 다른 소리의 결을 듣는 것이다.
무슨 이유일까, 소리에도 근육과 유전인자가 있어 기관을 바꿀 때 마다 소리 또한 달라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람에게만 특별히 허락된 분별력이 있기 때문일까, 그 어떤 경우도 ‘소리’는 그 종이 지켜왔고 유전했던 내력이자 기원일 것이다. 그는 말한다 “나무가 키우는 온갖 소리가 그 새의 부리에 들어 있었네”라고, 그리고 이 문장은 한층 깊어진 시적 사유를 보여주기도 한다.“공중을 방패삼은 이즈음의 나에겐 허공을 건너오는 /모든 문장이 풀잎이어서/ 단검 같이 돋아나는 달빛을 공중에 적어둘 뿐”(여름의 깊이).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시인은 소리의 가치에 대해 그 판단을 유보하거나, 아예 미추美醜를 역전시킨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괴석의 가치는 추함에서 연유한다고 단언하는 <수석유화>나(“괴석의 모양은 오래 전에 죽은 짐승의 골반 뼈처럼 바짝 삭아 손아귀에 조금만 힘을 주면 부스러질 듯 야위었다 구멍까지 뚫려 있으니// 괴석의 가치는 추할수록 아름답다//구멍 뚫린 말, 주름진 말, 혹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말이라 해도 기름기를 쏙 빼야 옹골차게 야윈 입술을 가질 수 있다”) “핏자국이 번진 흰 빛”을 생의 완벽함으로 노래하는 <꽃산딸나무>(“핏자국이 번진 흰 빛은 얼마나 완벽한 생의 비유인가//중략//세상의 수많은 色을 훔쳐 내 속에 묻어 두었으니 오늘은 나도 십자가를 짊어지네 수상한 향기만 남은 나무계단처럼 꽃산딸나무 등에 기대어 찰칵, 나를 못 박네”)등이 있다. 한편, 두 사물에 적용한 변증은 한 사물의 분열이라는 내적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돌담 밖으로 기어 나온
가늘고 긴 몸뚱어리가 희디흰 귓밥 베무는 달빛이다
달빛을 미는 것인지 두드리는 것인지
뱀의 독법으로 읽은
달밤이 깊다
-(퇴고의 형식)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로코나비’의 날개나 두 입술이 변증으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데 비해, 위 시의 ‘뱀’은 하나가 두 개로 분열되는 형식을 취한다. 뱀의 독법에 다르면 뱀은 달빛을 밀기도 하고, 두드리기도 하면서 길을 여는데, 문제는 ‘기다’에서 파생된 동사 ‘밀다’와‘두드리다’는 서로 이질적인 세계로써 전혀 다른 호흡을 갖는다는 것,
강영은의 바람의 연금술에는, 이 같은 사물의 변증과 분열이라는 상반된 두 층위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두 가지 방법은 방향의 문제일 뿐이지, 잠들고 감춰진 세계를 깨우는 것은 동일하다.
필사의 작시법 혹은 무의식적 회귀 본능
『마고의 항아리』가 ‘바람의 연금술’이라는 비의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향한 언어의 내륙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시인은 어떤 작시법으로 이 연금술을 부리고 있는 것일까, 그 어떤 경우에도 시인은 ‘필사’ 라는 고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방식을 고집한다. “붉은 목젖이 서녘을 필사한다”(돋아나는 서녘)는 문장에서 보이듯, 시인은 손끝에서 묻어나오는 언어의 투사-본능을 작시법의 심급으로 삼은 것이다.
우선 시인은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펼쳐진 ‘무의식’을 필사한다. 이것은 몰아沒我의 순간을 언어에 투사하는 작업으로 발화의 씨앗이 된다. 그는 자신이 아닌 곳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그 낯선 시공을 기록한다. 이에 대해 시인은 “얼룩진 손가락을 펴들고 /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신음하던 말을 쏟아낸다/손에 든 그것이 지구인줄 모르고/눈에 든 그것이 우주인줄 모르고 내가 지닌 /언어는 코스모스를 운반한다”(가을의 중력) “그 가방 속에는 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네/ 훔쳐서라도 베끼고 싶은 어제와 내일, 손가락과 마음을 지나는 칼과 망치//중략//문장을 찾아줘, 나를 찾아줘, 거리를 뒤적이는 손가락에선 시간이 자라네/돌고 도는 태엽에선 뮤직 박스가 태어나네”(헤밍웨이의 가방)라는 구절도 결국 그의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둘째, ‘민족공동체의 원형’에 대한 필사다. 이는 몸의 가장 깊숙한 곳에 저장된 집단 무의식을 ‘지금’과 ‘여기’라는 현대적 시공으로 불러들여 해석하고, 개인의 내밀한 언어로 다시 쓰는 작업이다. 특히<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모티프로 한 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수종사 종소리>는 <삼국사기> ‘유리왕’의 황조가를, <물계자의 노래>와 <이른 눈>은 <삼국유사>제5권 피은편거ㅘ 제2권 기이를 모티프로 삼았다. 뿐만 아니다. ‘향가’를 모티프로 삼은 시편도 있다. <그리운 달집>은 <정읍사>를, <돋아나는 서쪽>은 <원왕생가>를, <배롱나무 자서전>은 <제망매가>를 차용한다,
눈물은 어디서 태어나나 당신 눈 속에 괴어있다 꽃으로 피어나나 당신 입속에 잠겨 있다 혀로 돋아나나
(중략)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인 슬픔, 여전히 더듬거리는 눈자위 나는 어디서 흘러온 강물일 까, 밤새 부푼 눈이 나무가지에서 돋네 -<눈물의 이면>
시인은 눈물이 어디에서 태어나는 지를 자문한다. 이 질문은, ‘눈물’을 단순한 생리적 현상이 아니라, 몸의 적극적인 자기표현이란 것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시인은 “당신 눈 속에 괴어있다 꽃으로 피어나나 당신 입속에 잠겨 있다 혀로 돋아나나”라고 노래함으로써,‘눈물; 을 ’꽃‘과 ’언어‘로 치환한다. 그런데 시인은 ’눈물‘을 슬픔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정의한다(아날로그는 사유의 문제다). 몸에서 조금씩 생성되고 축적되는 눈물은, 느리게 흐르지만 마침내 바다로 가고 마는 ’강물‘로 비유된다.『삼국유사의 ’흥덕왕 앵무’편을 서사로 빌려왔지만, 시인은 ‘눈물’의 아날로그적 의미를 되물어봄으로써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끄집어낸다.
이 원형의 탐구는 시적 소재의 확장에 머물지 않고, 고전에서 가장 현대적인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적 사유다. 시인은 문장의 인용이나 구조적 차용에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의 모국어로 다시 쓴다. 그 결과로 생성된 시들은, 원형의 원형, 곧 ‘메타-원형’으로 절정화 된다. 이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문장론을 얻는다. 바로 “고도의 훈련을 마친 문장과 칼은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네”(카자흐의 검독수리 )라는 구절이다.
셋째, 회귀의 필사다. 이것은 시집 마지막 부분에 집중된 것으로, 제주로 돌아간 시인이, 고향의 살과 결을 보듬으며 그때그때 느낀 감정을 시로 형상화 한다. “제 몸의 결과 옹이까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모과나무 기둥, 등신불 같은 요사채 기둥이 목탁소리를 내는 날이면 천불전 뜰 앞, 모과나무생불은 그늘이 깊었다”(어린 아두阿頭)는 문장에서 보이듯, ‘회귀’ 란 ‘제 몸의 결과 옹이’를 찾아내는 것이고, 그 모습이 아득한 ‘생불’과도 같은 것이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이 고향의 발견이란, 단순히 자아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서 현재적인 것을 재발견하는 ‘원형의 필사’와 동일하게 시인의 현재와 과거를 융합하는 것이며, 예술적으로 고양된 자신의 미래를 되살리는 것이다. 시인의 기록했던 ‘발의 행적’이 좀더 단단한 형태로 영그는 곳도 여기다.(“나는 발의 행적을 기록합니다”)(소지素紙). 시인이 다시 발견한 고향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지상에서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편지를 쓰고 있다면
당신은 서귀포에 있는 것이다
떠도는 섬을 당신의 마음속에
붙잡아 앉힌 것이다
-(서귀포)부분
지상의 어떤 말로도 ‘서귀포’를 형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의 걸음걸이나 손바닥의 각도, 혹은 어깨 근육의 미세한 기울기가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서귀포’와 조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가장 참혹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는 잠들어 있는‘서귀포’를 깨우고 존재의 내륙을 재구성한다. 뿐만 아니라 어머니가 쑤어온 ‘녹두죽’을 기억하며 ‘녹두’ 라는 말의 깊이를 되새긴다. 그는, “어머니가 쑤어 온 녹두죽을 먹는 동안/녹두라는 말이 좋았다/녹두 밭 한 뙈기가/헐어있는 입 속을 경작했던 것인데/녹두하고 부를 때마다/문드러진 입천장에 콩 알갱이가 돋아났다”(녹두)고 노래한다. 또한 고향에서 흔하디흔한 현무암의 내력을 기록하며, “진펄 같은 검은 몸체는 한 덩어리 죽음에 불과하지만 화산이 베껴놓은 크고 작은 화첩이어서 생이* 날개에 뱀 모가지를 얹혀 전설을 부풀리거나 제주꼬마팔랑나비가 넘나드는 유곽이 되기도 한다”(죽은 돌)고 쓴다.
창조신화도 갖고 있는 ‘여성거인전승女性巨人傳乘의 한 갈래인 “마고麻姑를 형상한 <마고麻姑의 항아리>, 제주도 서쪽에 위치한 ’판포리‘의 장소적 고유성을 이야기한 <판포>, 그리고회귀하여 아스라한 마음의 색을 노래한 <귀거래歸去來>에 이르기까지’회귀의 필사‘는 명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중에서 <귀거래歸去來>는 백미로, 문장이 너울대는 소리가 지면을 뚫는 듯 하다. ”죽은 귀를 깨우는 파도소리에 나는 다만 혀로 쓰는 붓질과 귀가 잣는 소음과 멀어지고 싶을 뿐 물결과 거래하는 나의 귀거래는 오늘을 말없이 건너는 일, 파랑이는 나를 견디는 일일 것이다 물결이 빠져나간 여는 이미 마른 슬픔, 썰물을 불러들이는 두 다리가 몇 尺 길어진다 언제 올지 모르는 썰물/그 바닷가에서 섬이 된 사람들을 오래 기다렸다 “(귀거래歸去來)
의고체의 모던
시인은 “휘종의 화가들은 詩를 즐겨 그렸다//산 속에 숨은 절을 읊기 위하여 산 아래 물 긷는 중을 그려 절을 그리지 않았고 꽃밭을 달리는 말을 그릴 때에는 말발굽에 나비를 그리고 꽃을 그리지 않았다 몸속에 절을 세우고 나비 속에 꽃을 숨긴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 붓을 묻었다”(묵매墨梅)고 쓸 때, 이 문장의 예스러움에 대해 우리는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까, 의고체라고 해도 무방한 이 문장의 ‘체體’를 단순히 장식으로 치부해야 할까, 혹은 예 것을 통한 ‘낯설게 하기’로 간주해야 할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마고麻姑의 항아리>는 제목부터가 ‘의고체의 모던’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
밤마다 벌레가 운다 밤에 듣는 벌레소리는 겹겹, 젖어드는 적막의 깊이여서 바깥귀로 들으면 사금파리 깨지는 소리지만 속귀에는 물 머금은 별 쏟아지는 소리다
허공의 현을 긋는 별빛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섞이고 흩어지는 잡음에도 우주가 있다는 걸 내 귀가 공명하는 것이다
-(내 귓속의 풀숲)
강영은 시인이 만드는 의고체는 여성 특유의 잔잔목소리로 시작한다. 이것은 풍경에 마음을 담아내는 전통적 방식이지만, 그만큼 오래되었으므로 가장 효과적인 표현법이다. 이를테면, 밤마다 우는 벌레 소리를 “겹겹 젖어드는 적막의 깊이”로 치환하고, 좀 더 나아가“ 물 머금은 별 쏟아지는 소리”로 써서 비유를 완성하는 것이다. 벌레가 우는 풍경이, ‘적막’이라는 마음에 용해되면서 별의 소리로 변용된다. 이를 증명하듯 시인은 “허공의 현을 긋는 별빛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섞이고 흩어지는 잡음에도 우주가 있다는 걸 내 귀가 공명”한다고 말한다.
이 목소리의 수줍음과 격정은 “팽팽해진 달빛을 도록盜錄에 남기는 일이 서간체의 결말이라면, 가늘고 여린 촉을 세워 쓴 허공 한 劃, 그대여, 그대 지나간 자리가 저토록 휘었다”(하현下弦)고 노래하는 <하현下弦>에서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거기서부터 내 몸이 파도친다 나의 神은 그곳에 가장 큰 저승을 들여 놓았다”고 쓴 <고독에 대하여>에서도, 또한 “모란 꽃그늘에 기대어 천만년 피고 지던 어제가 지척인데 길이 끊어지고 마음 가는 곳이 없는 그리움이란, 어떤 발톱 속에 들어 있는 고요한 연장이냐”라고 감탄하는 <이암의 화조묘구도花鳥猫狗圖>에서도 나온다.
이렇듯 강영은 시인의 문장은 “그대가 지닌 침묵의 크기”(수석유화)에서 출발해, “내일이면 흘러내릴 그날의 별빛으로 찰나의 빛이 새기고 산 흉터를”(별똥별) 적극적으로 지워나가는 형식을 갖춤으로써, 완성되지 않았으나 이미 완성된 문장으로 ‘체體’다.
박성현 시인/ 1970년 서울 출생, 포엠포엠 편집위원, 2000년 (중앙일보) 등단, 서울교대 강사
『포엠포엠』 2015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