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그늘

장미 탁본

너머의 새 2020. 12. 16. 22:15

장미 탁본/강영은

 

 

 

고양이 발자국이 골목을 돌아나가며 꽃잎을 흩날린다. 붉은 꽃잎은 태양의 혈족, 꽃잎

무늬를 판각한 저녁이 흐릿해진다.

 

 

쓰레기통 속에는 장미꽃다발, 헤어진 애인이 목이 꺾인 채 놓여 있다. 장미봉오리는 갓

출하된 립스틱, 쏟아낸 향기는 지워지지 않는다.

 

버려진 애인은 말이 없는 게 정석이죠, 그러니 당신, 분홍 우산이 범람하는 골목길에

음묶음, 애인들을 내버리세요, 색소침착증 앓는 입술이 가시를 내뱉는다.

 

 

여자는 몇 번이나 가시에 찔렀을까, 장미의 내면을 탐색하다 보면 까무러쳐 죽은 건 처녀

성, 혹은 남아있는 풍경이다.

 

어제의 구름이 넝쿨 없이 퍼져나간다. 느린 걸음으로 오후를 횡단한 그리움에도 꽃과 가시

가 대립하는 국면이 있다는 뜻 일게다.

 

쓰레기통 속이 잠시 환해진다. 장미가 벗어놓은 6월이 빗방울을 삼키고 인기척을 훔쳐 먹은

고양이 울음이 젖기 시작한다.

 

 

불빛이 진딧물처럼 번식하는 골목 안, 물기를 머금은 붉은 입술들이 유리창에 반사된다.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