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읽는 몇 가지 코드
■시인의 고향과 시 22/시안 2011년 여름호
나를 읽는 몇 가지 코드 /강영은
고향, 서귀포는 멀다.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 그중에서도 더 먼, 남쪽 해안에 자리한 탓도 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향은 마음의 오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낡은 사진첩 속에 흑백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 곳, 무성영화처럼 사라져버린 기억 뒤편을 더듬어 찾아가는 봄날은 그래서 늦은 봄만큼이나 서럽다. 목련이 피었다가 지고 유채꽃이 만발하다는 소식을 접한 3월 어느날, 고향을 찾아 길을 나선다. 어린 날에 화인을 찍은 몇 장의 추억이 먼저 고향에 가 닿는다. 공항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대략 50분을 가면 김포 공항, 거기서 하늘 길을 날면 제주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다시 한 시간을 달리면 서귀포가 나타난다.
서귀포 해안, 올레5코스인 삼매봉에서 바라본 모습
# 바람을 입고 달리다
서부산업도로를 달리다 들불축제가 향연을 펼치는 새별 오름 앞에 잠깐 멈춘다. 제주 정월대보름 들불축제는 제주를 대표하는 축제다. 매해 애월읍 봉성리에 있는 새별 오름을 통째로 불태우며‘평화와 번영의 제주, 무사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금년에는 구제역 때문에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축제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불타지 못한 오름, 마른 억새가 살 부비는 정염의 산을 마주하고 들판에 선다. 나를 통째로 집어 삼킬 듯 바람이 거세다.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다. 어린 시절, 초가지붕을 울리고 가는 바람의 울부짖음을 자주 듣곤 했다. 맹폭을 휘두르는 바람의 입김에 뜬 눈을 새우는 밤, 어머니의 치마폭에 매달려 칭얼대는 동생들의 모습이 어제인 듯 다가선다. 풍비박산된 초가지붕, 강풍에 날린 기왓장과 함석 간판, 길에 드러누운 전신주와 가로수, 태풍이 지나간 아침마다 황폐해진 거리를 바라보는 유년은 황량했다. 잠에 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강박관념은 어린 나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제주도의 자연이 가져다 준 공포심은 어린 나에게 죽음에 대해 맹목적인 관심을 가지게 했다. 지금에야 천혜의 자원을 가진 관광지로 관심을 끌고 있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제주도는 아름다움을 제대로 누리거나 인정받지 못한 변방이었다. 육지의 아웃사이더인 섬의 생래에 뿌리를 둔 것인지 누군가에게 인정 받을 때 괜히 부끄러운 나의 기질은 어쩌면 자연 동태학적 현상일지 모른다. 상전벽해의 세월을 거친 고향 땅에서 바람을 입고 달려본다. 나에게 열정이 있다면 야생마 같은 바람이 나를 키워준 탓이리라. 바람을 입은 옷이 풍선처럼 부푼다.
들불축제가 벌어지는 새별오름 앞에서
# 소금막 바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길을 언제나 하향곡선을 그린다. 굽이굽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멀리 푸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우정을 과시하려는 듯 바다는 눈높이만큼 일어서서 굼실거린다. 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바다의 다정한 모습이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님의 직장 따라 세 군데의 학교를 옮겨 다닌 나는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이 되어도 낯가림이 심하고 친구들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친구들과 놀기보다 바다를 찾는 일이 많았다. 방과 후면 빠지지 않고 찾아갔던 예촌망은 허리 아래 절벽과 바다를 두르고 있는 곶의 끝이다. 절벽마다 하나씩 있음직한, 속칭 자살바위 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탁 트였다. 바다 저, 멀리 무엇이 있을까, 아련한 동경이 갈매기의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다.
바다는 섬을 둘러친 울타리이기도 하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창이기도 하다. 갇힘과 트임이라는 이중적 정서를 지닌 섬을 닮아서인지 나도 폐쇄성과 개방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배타적이만 한 번 믿으면 아낌없이 제 속을 내 주는 제주 사람들과 투명한 에메랄드빛의 제주바다는 서로 닮았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만 그 경계가 풀리면 넘실거리는 습성 역시 바닥까지 드려다 보이는 제주 바다를 품은 탓인지 모른다.
예촌망을 중심으로 바다를 바라보면 오른쪽 아래에 하효 포구가 있는데 동네이름이 소금막이라고 불리어지는 곳이다. 한라산에 큰 비가 오면 팔뚝만한 장어가 흙탕물 속에서 튀어 오르곤 했다. 작은 어선 몇 척이 보일까 말까한 작고 초라한 그 바다에 어머니는 어린 나를 데리고 보말(바다고동의 일종)을 잡으러 자주 가곤 하셨다. 어떤 날에는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곤 하셨는데 눈 속에 고인 어머니의 바다는 어린 마음에도 슬퍼 보였다. 철들 무렵부터 왠지 모르고 슬프고 서러운 것이 그때 보았던, 어머니의 바다가 내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철이 들고 성장한 후에도 세상은 그대로 커다란 어머니의 바다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온전히 내 몫인 바다, 그 바다를 건널때면 무인등대 같은 어머니가 보고 싶어진다. 아무리 험한 풍랑이 일어도 바다는 언제나 눈높이에 있다. 어머니처럼, 친구처럼,
30년전의 소금막(하효포구)/필자가 어린 시절 자주 갔던 곳이다
# 망막의 빛, 서귀포
이른 저녁 무렵 서귀포에 도착한다. 언덕에 자리 잡은 서귀포 시가지는 바다를 향해 겹겹 건물을 세우고 꼬부라진 옛길들은 한결같이 바다를 향해 흘러내린다. 햇살 좋은 날, 부두에서 바라보는 서귀포 시가지는 아름답다. 신시가지에 새롭게 들어선 건물을 빼곤 거의 달라진 것이 없는 서귀포, 눈부시게 빛나는 지붕들은 빛의 산란 현상 때문에 흰 뼈처럼 보인다. 바다에서 바라보면 여전히 흰 빛이다. 햇살에 눈을 시린 날이면 아련하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무의식 저편에 자리한 서귀포의 풍정이 망막에 각인되어 있는 탓이다. 희디흰 빛은 눈 안의 모든 풍경을 사라지게 만든다. 추억은 내게 빛으로만 존재한다.
뱃고동소리로 분주한 서귀포를 노래하는 것은 사람보다도 물결이다. “칠십 리 바다 건너 서귀포를 아시나요"라는 노랫말과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더라면 쓰라린 이별마저 없었을 것”이라고 목을 놓는 노래 가락이 아니더라도 물결은 언제나 떠나는 이를 향해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 서귀포는 내게 있어 나폴리 항이다. 돌아오라 소렌토로,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내며 언제든 돌아오라고 부르는 파도의 화음이 늘 귓전을 때린다.
파랑이는 귓전의 물결을 따라가면 나타나는 서귀포 해안은 푸른 바다와 기암절벽, 폭포, 섬, 항구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대부분 조면암질 안산암 및 현무암의 단애가 수직으로 주상절리를 이룬 그 풍경은 신의 조각품 같은 모양을 빚어낸다. 또한 서귀포 앞바다에는 숲섬, 문섬, 새섬, 범섬 등 4개의 섬이 해안과 어우러져서 한 폭의 풍경화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천지연, 정방, 천제연 등, 폭포들도 서귀포의 이름을 드높인다. 이처럼 아름다운 서귀포를 고향으로 가졌지만 가까운 곳에 인색한 눈의 오독으로 그 소중함을 알지 못했다. 신이 특별히 허락해준 고향이었지만 내게는 놀이터였고 소풍 장소였으며 발길만 돌리면 언제든 찾아 갈 수 있는 그 곳을 그저 탈출하고만 싶었던 나, 수평선 너머를 동경하던 소녀는 그 풍광들을 오래 향유하지 못했다. 서귀포에서 열다섯 살까지 살다가 학업 때문에 제주시에서 6년을 보냈다. 그리고 상경했다
쇠소깍/ 쇠소깍이라는 이름은 제주도 방언이다. 쇠는 효돈마을을 뜻하며, 소는 연못, 각은 접미사로서 끝을 의미한다.
# 내 얼굴의 남쪽, 쇠소깍
넉넉한 인심과 감귤의 고장이었던 마을의 조용한 바닷가는 관광객이 들끓는 장소로 탈바꿈해 있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시퍼런 물이 담긴 소沼가 수백 미터나 이어지다가 바다와 만나는 곳, 여름이면 나와 어린 동생들은 멱 감았던 쇠소깍은 올레6코스의 명소로 환골탈태해 있다. 현무암 지하를 흐르는 물이 분출하여 바닷물과 만나 깊은 웅덩이를 형성한 쇠소깍은 효돈천 하구를 말한다. 바다와 경계를 짓는 그 하구의 모래자갈 위에 입고 간 옷을 벗어놓고 멱을 감으며 긴 여름 해를 보냈다. 제주도의 지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현무암과 송이인데 물을 저장할 능력이 없어서 지표면을 그대로 투과한 빗물들(지하수)은 해안가에서 용출하게 되는데 그것이 용천수다. 맑디맑은 용천수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짜지 않을뿐더러 한겨울에 뛰어들어도 춥지 않다. 쇠소깍은 달리 몸을 헹구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용천수가 뿜어져 나와 아무리 바닷물이 밀려들어도 담수처럼 염분기가 없기 때문이다.
쇠소깍에는 전설이 녹아 있다. 부잣집 무남독녀와 그 집 머슴의 동갑내기 아들이 사랑을 꽃 피우지 못하자 쇠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서려잇는데, 중학교 시절 동네 오빠가 행방불명 된 곳이기도 하다. 친구가 소피보러 간 사이 사라졌다는 그 오빠는 퉁퉁 불은 시체가 되어 쇠소각에 떠 올랐다. 쇠소깍의 한 구석에서 오래 동안 흐느끼던 옆집 언니, 예쁘기야 동네방네 으뜸이었지만 새침데기인 그 언니의 우는 모습은 내게 또 하나의 전설로 남아있다. 그래서인지 쇠소깍의 물빛은 심장의 피를 빨아들일 듯 두려움마저 드는 오묘한 물빛이다. 정오가 되면 놋그릇이 둥둥 떠다닌다고 해서 나와 동생들은 정오가 되면 멱 감는 일을 피했던 기억이 난다. 뛰어난 비경을 가진 계곡이지만 그 진가를 알지 못했던 그 때, 돌이켜보면 무서움조차도 정직하게 바라보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한 때가 아닌가 싶다.
고향이란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지만 고향 땅에 발바닥을 붙이고 사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행운이 아니다.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추억이 있다면 그것 또한 고향일 터, “시는 정서의 표출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도피요,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 도피다”라고 한‘엘리어트’의 말처럼 고향에 대한 상실감, 그 정서에 대한 도피가 시를 쓰는 내 얼굴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는지 모른다. /강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