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어제의 돋을새김
시인의 고향과 시 23 /『시안』 2011년 가을호
고향, 어제의 돋을새김 /강영은
시간은 변화무쌍한 오늘을 보여주지만 시간은 또한 변하지 않는 어제를 보여주기도 한다. 빗살무늬 허벅이나 현무암 같은 유품들이 보여주는 시간은 고향의 어제이다. 소멸되지 않는 영원한 어제가 고향의 다른 이름이라면, 첫사랑은 마음에 새겨진 돋을 새김이요 고향의 바닷가에 누워 계신 부모님, 이제는 무덤이라는 옷을 입은 부모님도 영원한 돋을 새김으로 종종 시간을 건너 오신다. 그래서, 고향이란 아무리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 옛 이야기, 발품을 팔지 않아도 아련하고 애틋한 한 때를 보여주는시간의 돋을새김이다. 그 돋을 새김은 내 삶 곳곳에 스며 있다. 돋을 새김으로 스며있는 고향에 대해 마음의 여정을 시작해 본다.
# 현무암, 화석의 속도
거실 한 구석에 돌 하나가 놓여있다. 동북쪽으로 뻗은 돌의 귀와 허리께에 튀어나온 돌의 꼬리가 딱, 한반도의 모양이라서 비행기를 태우면서 모시고 온 돌이다. 그 돌을 서울로 품고 온 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의 일이다. 울퉁불퉁 못생긴 본새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나를 닮았다고 놀리시면서 애지중지 하던 그 돌을 흔쾌히 내주셨던 아버지, 둘째를 낳고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도 반갑다는 표현 대신 돌처럼 말없이 웃기만 하셨다.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졸도하신 적이 있다. 대입 시험을 7일 정도 앞둔 시점이었다. 육지로 진학하려는 꿈을 접고 나는 고향, 제주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아버님의 병환이 어린 동생을 넷이나 둔 현실 속의 나를 돌아보게 한 것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셨지만 산산 조각이 난 꿈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갖지 못한 채 허무감에 시달리는 청춘을 키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졸업하자마자 부모님의 말씀에 따라 별 생각 없이 결혼이라는 장도에 올랐다. 한 달 만에 어른들끼리 성사시킨 결혼이었다. 아버지는 귀머거리 3년, 눈먼 봉사 3년, 벙어리 3년, 그렇게 살라 말씀하셨다.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말씀이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순종이라는 미덕 속에 감춰진 나의 내면을 드려다 볼 때, 섬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 좌절되어버린 세계에 대한 기대감으로 결혼이라는 도피구를 선택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한 결정이었는지, 여러 형태의 질곡 속에서 깨달아야 했지만 21살의 어린 신부인 나는 그 때 삶의 과정을 통과해야 할 가장 긴 여정중의 하나가 결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여행의 목적과 그 목적에 대해 구체적인 탐색과 그 외 부수적인 여러 상황을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아무데나 떠나고 보자는 무모한, 무모하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결혼을 감행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에는 퉁퉁 불은 젖을 아기에게 먹이던 어린 엄마만 있었고 내가 없었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무력감이 오래도록 나를 괴롭히던 그 때, 고향을 떠난 나는 마루에 놓인 현무암과 다르지 않았다. 불에 그슬려 죽은 돌이 되어버린 현무암, 회색이다 못해 검은 색을 띤 그 돌을 볼 때마다 죽음을 생각했지만 태풍의 눈처럼 검고 우묵한 아버지의 눈동자가 떠올라 행복하고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만 전하곤 했다.
제주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현무암은 화산이 분출할 때 생긴 화산암이다. 현무암 중의 결정은 용암으로 분출하기 전에 마그마 중에서 이미 성장한 것이다. 이때 세립 내지 유리상의 석기(石基) 중에 비교적 큰 결정이 함유된 모양이 반상조직(斑狀組織)을 이루는데 부글부글 끓는 용암이 하나의 결정체가 되기까지 현무암은 숱한 길을 지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 돌이 되었을 것이다. 목숨이란 때로 바람이 되기도 하고 불이되기도 하고 물이 되기도 하는 유동형의 에너지를 가진 것이 아닐까, 삶의 과반수를 지나온 지금 가만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내가 걸어왔던 일련의 모든 과정이란 것이 이미 예정된 삶의 길이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그 숙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일,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만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던 날이 무수히 지나갔다. 저 화석처럼 불과 물과 바람의 길을 지나온 나의 길들이 한 해가 지날수록 오히려 더 고맙게 느껴진다. 흐르는 목숨이 한 개 화석으로 굳어질 때까지의 속도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말없이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 같기도 한 현무암을 보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옷사치
어머니는 뜨게질을 좋아하셨다. 털실은 당신의 손을 통과 할 때마다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었다. 모자, 조끼, 스웨터, 풀오버을 만들어냈다. 그 옷 속에 체크무늬의 네거리를 짜넣거나 꽃을 피워내기도 하였다. 헌 와이셔츠나 헌 옷가지로 잘라 내고 다시 붙여 옷을 다시 만드는 등, 디자인에 있어서도 프로기질이 있으셨다. "너는 무엇이든 입어도 잘 어울리는 구나!" 초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어머니께서 손수 지어 주셨던 체크무늬 바지, 아버지의 와이셔츠를 뜯어내어 만들어주신 민소매 블라우스, 내 서랍 속에 잠들어 있는 그것들은 어머니에 다름 아니다. 서랍을 열면 그리움이 체크무늬처럼 사방에서 다가온다.
실용을 벗어나 사치품으로까지 신분상승하는 것 중에서, 특별히 옷에 관심이 가는 것은 어머니를 닮은 탓이다. 보석이나, 핸드백, 구두 등에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지만 의복에 한해서만은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간다. 우리들 네 자매가 다른 무엇 보다 옷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을 보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적 요인이 크다는 것을 부인할 수 가 없다. 옷은 어머니에게 표현의 한 수단이었다. 어머니의 취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는 옷을 쉽게 버리지 못 한다 아주 오래된 옷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옷이 지닌 디자인, 색깔, 재질, 무늬 등을 통해 표현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강냉이떡과 첫사랑
초등학교 5학년 전학을 오자마자 놀림감이 되었다. 학교를 가거나 길을 갈 때마다 조무래기들의 외침소리가 뒤따랐다. 강냉이떡, 강냉이떡, 신명이나 목청껏 소리 지르는 조무래기 뒤에는 까까머리 소년들이 숨어 있었다. 당시의 초등학교의 급식은 강냉이 떡이었다. 배급받은 강냉이가루를 분유에 개어 만든 급식 떡은 너무나 맛있어서 내 혀는 지금도 가끔 그 미각을 그리워하곤 한다. 누구에게나 인기가 좋은 강냉이떡이었지만 내 성이 ‘강’ 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별명이 붙었다고 생각한 나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곤 했다. ‘노오란 양푼이에/ 토락토락한 강냉이 떡/ 어쩐지 맛이 좋아/ 어쩐지 먹고 싶어’ 가수 한명숙이 부른 ‘노오란 셔츠 입은 사나이“에다 가사를 개사해서 만든 주제가까지 생겨났다. 그 노래 소리는 내 모습이 보일 때마다 유행가처럼 번졌다. 담벼락에 다른 반 반장아이와의 그렇고 그랬다는 내용이 분필로 휘갈겨져 있었다. 나의 첫사랑은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아이를 흠모하는데에서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3년 내내 대학노트에다 부치지 않는 편지를 날마다 썼다.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날까봐, 이름 끝에 '희'자를 붙여 마치, 여자 친구에게 편지를 쓰듯 위장까지 했다. 지금 읽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러한 감정이 시심을 기르는 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마을에 살면서도 새침떼기인 나는 끝끝내 그 마음을 숨겼다. 중 2때 한 번 그를 만나러 찾아갔지만 말도 제대로 못한 채 고개 숙여 그가 신고 나온 흰 고무신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달빛이 그처럼 눈부시다는 것을/그 애가 신고나온 고무신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달빛은 사정없이 부서져/나중에는/그 애가 신고 나온 것이/달빛인지 고무신인지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의 일기장에 메모되어 있던 것을 시인이 된 후, '첫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애만 조이며 바라만 보던 그를 아버님의 장례식에서 우연히 보았다. 그 옛날에 내가 기억하던 모습이 아닌, 배가 불룩한 중년남자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첫사랑은 내게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와 눈꽃 피어내는 대나무처럼 푸르게 눈 뜨는 밤을 남겼다. 내 마음 속 뒤꼍에 오래 남은 눈이 있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필자의 부모님
# 예배당의 종탑과 커다란 배롱나무가 있는 곳
일본에서 거주하시다 해방이 되어서야 한국으로 나온 부모님에게 고향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기독교로 개종해 유교집안에서 내침을 당하신 아버지는 명절이 되어도 찾아갈 본가가 없어졌고 찾아간대도 버려진 자식이 되어 반가워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고향을 찾기 위해서 인간은 타향으로 가야 한다. 말한 것은 F. 카프카이지만 타향을 떠돌다 고향을 찾아 온 아버지에게 고향은 여전히 타향이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와 자식들 외에는 천애고아나 다름없는 아버지는 당시에 드물게 가족들을 사랑하셨다. 하지만 그 외로움은 우리들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조상대대로 살아온 곳이 아니었다. 자란 곳도 낯선 곳이엇다. 아버지가 옮기시면 언제든 떠나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고모 이모에 대한 추억, 외사촌이니 고종이니 하는 개념도 나에게는 먼 이야기일 뿐이다. 시대 보다 빠르게 핵가족이 된 셈이다. 누가 나에게 고향을 물으면 제주도 라도 지역과 사춘기 때의 기억이 생각날 뿐, 대답을 하려면 막연하다. 배롱나무가 놓여 있는 예배당의 종탑이 추억의 한 지점에 놓여 있는게 다행이면 다행이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나의 놀이터였다. 두 살 위의 오빠와 두 살 아래의 남동생과 나무로 만든 칼싸움을 벌였고 나이차가 나는 어린 여동생들과는 소꿉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재개발로 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지만 언제나 그리운 풍경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 너머 집이 있었다. 내 가정이 있고 30년 이상을 살아온 서울이 오히려 고향 같은 지금, 고향에 대한 나의 그리움은 단순하게 울타리를 둘러진 집에 대한 안부로 시작해서 마칠 때가 대부분이다.
넓은 의미로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집이다. 나무는 나뭇잎의 집이며 개울은 송사리의 집이다. 궁창은 별의 집이며 우주는 모든 근원이 생하거나 멸하기도 하는 집이기도 하다. 모든 이에게 있어 고향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집이며 그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집이 있다. 집이라는 근원적 공간을 따져보면, 내 몸 역시 하나의 집일 것이다. '인생이란 고향집으로 향하는 여행이다' 라고 헬만 멜빌레가 말한 것처럼 내 인생이 향할 고향집은 지상에서 사라졌지만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에 대한 기억이야말로 집 속의 집, 나의 영원한 고향이다. 중절모를 즐겨 쓰셨던 아버지와, 늦게 태어났다면 시인이 되었을거라고, 자신의 꿈을 나에게 이식하셨던 어머니, 고향에 대한 나의 완결 편은 두 분에게 응집된다. 고향에 대해 쓴 전 편이 나를 읽는 몇 가지 코드의 바깥이라면 후속 편인 이 이야기는 고향과 연결되는 내 안의 코드 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