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의 깊이 ―용문사 은행나무
강영은
천년을 버틴 나무 앞에 서면
말은 사라지고 침묵만 남는다
말과 말 사이, 고요가 흐르고
우묵한 가슴팍에 새의 숨결이 깃든다
침묵은 언어가 닿지 못한 곳에서
가장 고요히 피어난다는 것을.
나는 그 빈틈에 별빛을 꿰매고
바람의 그림자를 놓아두리라
나는 보리라.
노란 이파리가 한없이 떨어지는 길 끝에서
말이 흩어지고 침묵이 쌓이는 것을
침묵은 이별을 깊게 하고
사랑은 말을 넘어 오래 남는다는 것을.
―《시와소금》, 2025년 겨울호
■ 시 읽기
이 시작품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말하는 것을 인간으로부터 배우고, 신(神)들로부터 침묵을 배웠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한 마디를 떠 올린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는 ‘말’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천년을 버틴 나무 앞에 서면/ 말은 사라지고 침묵만 남는다’ 함에서 삶의 지혜가 답해주는 최상의 응답으로 들린다. 뿐만 아니라 ‘말과 말 사이, 고요가 흐르고/ 우묵한 가슴팍에 새의 숨결이 깃든다’는 화자에게 한 그루의 은행나무가 살아가는 참된 지혜로움으로 최상의 답을 얻게 해주고 있다. ‘침묵은 언어가 닿지 못한 곳에서/ 가장 고요히 피어난다는 것’, 이것은 곧 은행나무가 화자에게 안겨준 가장 지순한 삶, 최상의 정신이요 최고 최량의 삶의 자세를 보여준 것임은 물론, 한 편의 시가 제시해 주는 올바른 삶의 정열(情熱)이라 할 수 있다. 때때로 좋은 시작품은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한계를 벗어나서 비범한 삶의 영성(靈性)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그루의 ‘은행나무’로부터 화자는 새로운 길을 찾게 된다. ‘나는 그 빈틈에 별빛을 꿰매고/ 바람의 그림자를 놓아두리라’고 다짐한다. 삶은 자기 속에서 길을 발견하지 못하면 이 세상 어느 곳이나 언제라에서도 찾지 못한다. ‘은행나무’로부터 화자 자신에게 돌아오면서 ‘노란 이파리가 한없이 떨어지는 길 끝에서/ 말이 흩어지고 침묵이 쌓이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이미 화자는 ‘은행나무’와 일체를 이룬다. 삶의 영역에서 촌철(寸鐵)이 되어 있는 ‘사랑’을 깨닫는다. ‘침묵은 이별을 깊게 하고. 사랑은 말을 넘어 오래 남는다는 것’ ―이러한 자아 각성을 통한 한 없는 관용(寬容)과 법열(法悅)이 한 편의 시를 낳게 한 것이 아닐까. (추천 구재기)
―《시와소금》, 2026년 봄호 '이계절의 좋은 시 읽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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