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비단구렁이47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교수) ■ 강영은 시집『녹색 비단구렁이』 해설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는, 선명한 감각의 재현과 생의 원초적 의미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결속하면서, 우리 시단에 매우 이채로운 음색을 던진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전(全)존재로서의 ‘시’를 쓰고 사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가령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꽃/집/독”이라는 다중적 속성을 ‘시’에 부여하는데, 그렇게 ‘꽃’과 ‘집’처럼 피고 지고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시’는 ‘독’처럼 스며 시인 자신을 “시퍼렇게 독 오른” 존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치명적 독성을 감염시킨 ‘시’에 대하여 시인은 이제 “내 허물을 벗겨다오”라.. 2015. 9. 22. 녹색비단구렁이(지혜사랑시인선)(14) 표4및 목차 녹색비단구렁이(지혜사랑시인선)(14) 표4 자연과 인간의 원형질적인 교감이 너무 산뜻해서 그의 시를 읽는 동안 꼭 그의 몸을 만지고 있다는 엉뚱한 착각까지 든다. 앙가조촘 떼를 쓰는 사춘기 소녀의 눈망울도 숨어있고 사소한 풍경을 적요와 초월의 소재로 짐짓 부리면서도 입 앙다물고.. 2015. 9. 22. 매미 시편 매미 시편/강영은 마루에 누워 시집을 읽다가 행간을 구르는 매미 소리를 듣는다 피를 토하는 어느 명창의 넋이 들어 있는지 박연폭포 한 소절 폭포수로 쏟아내는데 목구멍에 걸린 울음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해 매미시편 붙들고 땀을 흘린다 짧고 굵은 생애의 절창을 위해 매미 중, 북미의.. 2015. 9. 22. 벌레시인 벌레시인 /강영은 쓴다와 쓰다 사이,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밤 골 아저씨의 낫 같은 ㄴ이 있다 그 낫은 길이 잘 든 손을 갖고 있어서 아저씨가 까놓은 알밤들은 울퉁불퉁 반발이 심했지만 맛이 좋았다 잠 안 오는 밤 쓰다와 쓴다 사이, 낫 놓고 니은 자는 더 더욱 모르는 아저씨의 낫, 종.. 2015. 9. 22. 허공 모텔 허공 모텔 /강영은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실 비단 그물침대 걸어놓은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속 집 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 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 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 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 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 그 사내 빵처럼 뜯어먹으며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 자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에 들 수 있다면, 2015. 9. 22. 제논의 화살 제논의 화살/강영은 시애틀의 배션 아일랜드에서 자전거 나무를 본다 자전거의 두 바퀴가 허공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꽃 같다 녹슨 바퀴 꽃 살대마다 햇빛이 지나간다 자전거가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가 껴안은 시간 속에서 자전거가 계속 달리고 있는데도 우리 눈이 멈춰있다.. 2015. 9. 22. 투명 개구리 투명 개구리 /강영은 경칩 날 아침, 이슬비 내린다 방울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와, 개구리 알이다 !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둥글고 말간 알들이 송알송알 내린다 동그라미가 툭 툭 터지는 것이 올챙이 투명꼬리 터지는 것 같다 바람이 헤적일 때마다 꼬리를 살랑이는 투명 올.. 2015. 9. 22. 비누論 비누論 /강영은 비누는 가스똥 바슐라르의 촛불이다 그 촛불은 조용히 타오르기도 하고 거품 속으로 나를 이끌기도 하고 생각의 때를 벗겨주기도 한다 제 몸을 태우면서 활활 소리 내고 투덜거리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제 몸을 내던지는 존재의 불꽃, 통곡의 벽 앞에서 팔레스타인의 자치.. 2015. 9. 22. 푸른 식탁 푸른 식탁/강영은 여긴 너무 고요한 식탁이야 고요가 들끓어서 목젖까지 아픈 식탁이야 전골냄비처럼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수평선에 입술을 덴 하늘도 푸른 식탁이어서 냄비뚜껑의 꼭지처럼 덜컹거리는 여긴 정말, 숟가락 없이도 배부른 식탁인거야 저기 봐, 수평선 넘어 부푼 구름이 빗방울로 밥물 앉히는 중야 들어 봐, 밥물 잦아지듯 숨죽이는 파도 소리 한 냄비 부글부글 끓는 수평선으로 살림 차린 나와 당신도 어쩌면 식탁인거야 서로의 등뼈에서 슬픔을 발라먹던 식탁인거야 생선가시에 걸린 것처럼 내 목울대가 자주 울먹이는 건 당신보다 내가 더 식탁이었다는 증거야 오늘은 사계바다처럼 낯선 식탁이 되어 보는 거야 해안도로, 차량이 드문드문 외로움을 내려놓는 갓길에 앉아 노랑나비 한 쌍과 마주앉아 식탁을 차리는 거야 식탁보처.. 2015. 9. 22. 능소화 능소화 /강영은 엄마가 내 푸른 담요를 걷었을 때 나는 꽃이 될 거라는 예감을 가졌어요. 꽃이 나에게 노크를 했거든요. 엄마가 내 몸 속에 얼마나 많은 꽃씨를 숨겨 놓으셨는지 보세요, 저리도 많은 발가락과 손가락들을 마구 뻗어난 길들을 늙은 소나무의 축 늘어진 그것이든 버드나무 휘어진 허리춤이든 낭창낭창 휘감는 붉은 뱀들이 절정으로, 꼭대기로 치닫고 있잖아요? 폭염에 술 취한 딸처럼 주홍빛 얼굴을 울컥울컥 게우고 있잖아요? 그게 나라 구요, 나였다 구요 그러니 엄마, 습한 문 열고 나 장마 지게 꽃다운 나답게 꽃답게 툭, 툭, 모가지를 떨 굴 때까지 그냥 피어나게 내버려 두세요 2015. 9. 22. 발칙한 속도 발칙한 속도 /강영은 1, 스팸제로가 분석한 아래 유형의 그녀들을 앞으로 스팸 편지함으로 걸러내시겠습니까? (체크 후, 설정하기를 누르시면 됩니다) 당신의변태적상상력을감히뛰어넘겠습니다아파트계단에서옆집아저씨랑하다들킨황당한 밤의황태자가되는법바람난내남편을공개합니.. 2015. 9. 22. 장자 연못 장자 연못/강영은 두물머리 연못에 연꽃이 피었다기에 연꽃 보러 세미원에 갔지요 연꽃의 발가락을 보듬고 있는 진흙은 보지 않고 붉고 하얀 꽃들만 보았는데요 이마 위에 툭, 얹히는 빗방울 하나 구름의 발가락인 빗방울들이 제 몸 가득 연못을 길어 올리고 있었는데요 둥근 물무늬를 .. 2015. 9. 22. 이전 1 2 3 4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