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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등 바다의 등31

늦은 눈 늦은 눈/강영은     늦은 눈 오시는 날 희디흰 꽃씨들이 빈 봉투에 들어찬다   온다는 조짐도 예측도 없는 기별은 불규칙한데 빈 봉투에 내리는 아주 규칙적이고 아름다운 꽃모양 눈  공중으로 흩어지다 햇빛을 받을 때면 더 없이 빛나는 눈이 가장 우아한 무늬와 모양을 이루는 바로 그 때   당신은 당신 눈 속에 나는 내 눈 속에 눈꽃을 피워낸다 각기 다른 창가에 꽃눈을 티워낸다  ​아, 당신과 나는 서로에게 늦은 눈.   삼짇날 지나 흰 제비꽃 피어나듯 무수한 눈송이로 진화할지 모르지만 ​ 각막의 가장 안쪽에서 흐릿하게 피어나는 눈꽃은 이 계절에 없는 꽃이니 ​ ​잠깐 피었다 지는 눈의 씨앗들이여, ​ ​얼듯 녹을 듯 존재하는 그리움 속으로 가만가만 다녀가시라 2025. 3. 3.
킬힐 바이러스 킬힐 바이러스/강영은      푸른 숲이 사라졌다 숲 속의 나뭇잎, 잎 속에 귀를 묻은 잎사귀가 사라졌다 사슴뿔에 걸린 모자, 모자 속의 비둘기, 비둘기로 만든 장미꽃이 사라졌다 모자를 뒤집어도 장미는 더 이상 장미가 아니다 에스 라인이 아니다 절정이 아니다   뾰.. 2016. 3. 7.
휴대폰을 찾아주세요 휴대폰을 찾아주세요/강영은   컬러링이 사라진 창포꽃 원피스는 숫자 사이의 꽃대 보라 빛 꽃잎을 클릭해도 우주를 지나가는 바코드는 절반 지워져 있다   칸칸마다 열렸다 닫히는 문 너머 캄캄한 입을 벌린 지하역, 몇 시간 전의 무덤을 뚫어보아도 타다 남은 별의 궤적은 만져.. 2016. 3. 7.
하늘호수 저 편 하늘호수 저 편/강영은     오늘처럼 한 남자가 피어나는 건 구름이 제 먼저 와 담장 위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사랑한 것도 기다린 것도 아닌데 담쟁이 넝쿨이 자꾸 손을 뻗기 때문이다   오늘처럼 한 남자를 적시고 싶은 건 하늘이 제일 먼저 와 호수를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한 .. 2016. 3. 7.
달콤함에 대한 통속적인 관찰 달콤함에 대한 통속적인 관찰/강영은     분홍 리본을 목에 두른 당신은 은유적이야 쉽게 녹을 것 같아   딱딱한 표정은 어떻게 녹여 먹을까 접시, 캔들, 의자, 탁자를 남김없이 녹여먹는 통속은 달콤해요   녹기를 거부하는 당신은 집에 또 다른 캔디를 두고 온 얼굴 외면과 .. 2016. 3. 7.
첫사랑 극장 첫사랑 극장 /강영은       여보세요, 여보세요, 수화기 저편이 응답 없는 날, 나는 팝콘 봉지 비우러 변두리 삼류 극장에 가요     자막에선 빗방울 튀기지 않는 비가 죽죽 내리는데 빗줄기처럼 극장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자막 위를 헤엄치는 구름 물고기를 세어요 &nbsp.. 2016. 3. 7.
오래된 달력 오래된 달력/강영은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읽다 밑줄을 친다.    밑줄 친 행간에 구석기의 나를 번식시켜 볼까? 첫째 날은 쌍도끼를 든 남자와 결 혼하는 날, 여덟번째 날은 수퇘지와 황소 접붙이는 날, 열여섯 째 날은 정자나무 심는 날, 늑.. 2016. 3. 7.
반신욕 평전 반신욕 평전/강영은        너는 꼭지를 틀면 쏟아지는 물이다 너는 늘 밖에 있다 그런데도 나는 너를 가두어야 한다 너의 사랑은 하반신을 타고 오르다 땀방울로 툭, 떨어지는 거기가 절벽이다 절벽은 황홀한 허공이어서 나는 순간, 내 구멍을 힘껏 열어젖힌다 수채 구멍으.. 2016. 3. 7.
남극 빅뱅 남극 빅뱅/강영은   갈라스키 빙설과 부딪힌 B-15A*, 차르르 쏟아지는 파찰음을 받아내는 당신의 등이 빙산의 일각이다 뜨거운 얼음이 들어 있는지 굽다리 밥상 같은 등이 화면 속으로 몰입할 때마다  각을 세운 모서리가 사라지고 얼어붙은 봉우리가 녹아내린다 &nbsp.. 2016. 3. 7.
사랑의 본적 사랑의 본적/강영은 난 늘 발이 꼬였어요내내 넘어지며 산거죠 총상화서의 길이 수만 갈래 생각을 낳았거든요 꼬이고 꼬인 등줄기 아래 칡 싹이 돋아났지만 라일락과 장 미의 계절, 칡과 등나무가 얽힌 비문을 읽지 못한 난 나비 한 접시를 주문했죠 공원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비비꼬인 슬.. 2015. 10. 22.
기억의 뒤편 기억의 뒤편/강영은 기억을 소리내어 불러도 기억은 무리를 이끌고 떠나가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림자처럼 쓸쓸해진 기억은 저무는 하늘로 떠나가네 삐걱거리는 날개가 폭풍의 눈처럼 사라지는 그런 날이면 밤새도록 가랑잎이 몰려다니며 바람의 길 위에 날개 모양의 문신을 새기네.. 2015. 10. 22.
아궁 아궁/강영은 아가가 처음 궁문을 열었을 때 아궁불열의 입술로 아궁, 하 고 대답했을 뿐 나도 모르게 자궁 같은 비의를 발설했을 뿐 짐 승의 언어로 꽉 차 있는 내 입술은 그 궁전에 들지 못했다 오므렸다 펴지기를 반복하는 입술이 새벽처럼 당도하는 곳 수 억 광년을 달려온 별빛이 최초.. 2015. 10.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