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고의 항아리32

고독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강영은​ 내 몸속에 서천꽃밭이 들어있다. 이름도 낯선 도환생꽃, 웃음웃을꽃, 싸움싸울꽃들로 만발하다. 깨어진 화분에 ​몇 포기의 그늘을 옮겨 심는 나는 그 꽃밭을 가꾸는 꽃 감관 ​ 꽃 울음 받아 적는 저물녘이면 새가 날아가는 서쪽 방향에 대해 붉다, 라고 쓴다. ​산담 아래 흩어진 깃털에 대해 쓴다. 불에 탄 돌덩이가 기어 다니고 느닷없는 바람 몰아치는 곳, 언제부터 섬이었는지 ​활화산을 삼킨 내가 그 꽃밭의 배후여서 웅크린 섬의 둘레에 어두워가는 바다가 들어 앉았다. ​ 새를 꺼내보렴 너를 볼 수 있을거야, 새를 새로 꺼내는 파도 속에서 나는 나로부터 가장 가까운 새를 만진다. 어둠이 무거워 날지 못하는 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는 거기서부터 내 몸이 파도친다. 나의 神은 그곳.. 2025. 6. 14.
수석유화(瘦石幽花) 수석유화(瘦石幽花)/ 강영은 - 강세황,「표옹서화첩」종이에 수묵, 각 폭 28,5 x 18,0 cm, 1878, 괴석의 모양은 오래 전에 죽은 짐승의 골반 뼈처럼 바짝 삭아 손아귀에 조금만 힘을 주면 부스러질 듯 야위었다 구멍까지 뚫려 있으니 ​ 괴석의 가치는 추할수록 아름답다 구멍 뚫린 말, 주름진 말, 혹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말이라 해도 기름기를 쏙 빼야 옹골차게 야윈 입술을 가질 수 있다 ​ 괴석의 모양을 빌려 말하자면 그 기이함이 침묵의 참 모습이라는 것 얼굴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괴석의 틈에 끼어 자란 꽃의 표정은 옅은 먹빛이다 흙 없는 틈바구니에 피어도 낯이 부드럽다 흙을 만나고 가는 꽃이 미소 지으면 도리어 일이 많다고, 차갑고 맑은 입술을 돌 속에 담은 나는 마른.. 2025. 4. 14.
석간 (夕刊 석간 (夕刊 )/ 강영은 단풍잎을 줍는 아이와 그 등을 바라보는 어미의 코끝에서 타는 낙엽냄새 ​나무들 같은 존재에 닿는 지면이 같다고 생각하면 같은 온도로 틀리다고 생각하면 틀린 온도로 타오르는 저녁이다​손으로 비벼 끈 담배처럼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통곡의 벽을 지나가는 사람들, 모닥불처럼 피어나는 행간들​ ​누가 찢었나,누가 되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불자동차​잠을 청하는 노숙자처럼우리는 내일의 안녕을 묻지만 ​모르는 온도를 지닌 당신의 체온은 다른 낙엽으로 기록되는 것이어서 인기척에 놀란 활자들이 몇 갈피의 소모로 파쇄 되는 저녁​당신과 나의 입김으로 태어난 모로코나비n-nabi는 단풍잎 아래 파란색 수은주를 멈춘다. ​두 날개가 접힌 세계는 벌써 낯설고 먼 지상이다. ​​-『문학사상』 .. 2025. 4. 14.
별똥별 별똥별/강영은   ​한 번의 입맞춤이 나의 새로운 미래를 결정했다-살바도르 달리 얼굴을 들어 올려 첫 키스를 만든다 나는 손목을 들어 올려 죽은 사람의 머리칼이 자란다는 돌을 만진다 길섶에 나뒹구는 두 개의 돌덩이가 부딪힌다탄생하는 찰나의 별​부서질 것 같아,  간절하고 격렬한 입술을 지닌 두 개의 돌이 말을 더듬는 동안 ​목덜미를 뚫고 나간 소름은 별이 된다  바닥에서 보는 별이란 얼마나 아름답고 단단한 흉기이냐 ​털이 하얗고 눈매가 선한 별을 찾는 것이 너의 미래라면 너는 양치기처럼 어둡고 환한 밤하늘을 가진 것이다  산 너머로 사라지는 부싯돌을 켰다 ​내일이면 흘러내릴 그 날의 별빛으로 찰나의 빛이 새기고 간 흉터를 지웠다   『예술가』 2015년 봄호 2022. 2. 24.
음치 음치(音癡)/강영은     야영지 한구석에 놓인 노래방 기계가 유행가 가락을 뽑아냅니다. 제 몸이 기계인 것도 모른 채 구곡양장의 음절을 넘는 노래 소리가 밤 강물입니다. 저장된 물결이 강물을 밀고 간다는 걸, 저, 쇳덩어리도 아는 걸 까요, 구겨졌다 펴지는 곡조가 물고기비늘 같아 미늘을 문 마음이 서러워집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출렁거리는 기계음 속으로 달빛도 동전만한 혓바닥을 집어넣습니다.    악보 없는 허공을 바루는 동안 목젖이 아파 옵니다. 귀의 절벽에 매달린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울고 웃는 입술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까닭입니다. 가느다란 음절에 입을 여는 돌멩이도 비탈에 목젖을 묻은 소나무도 저마다 소리 내고 싶은 저녁이어서 흐르는 노래에 저당 잡힌.. 2022. 2. 24.
슈퍼문super moon 슈퍼문super moon/강영은​  시체 위에는 고추밭과 수박밭이 있었는데 개는 안 짖었습니까,​ 손과 발이 이유 없이 고개를 돌릴 때 달이 떠올랐다. 하반신이 날씬한 에볼라가 검은 대륙을 껴안을 때 달이 떠올랐다. ​ 합삭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혼돈,   위성 같은 연인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릴 때 달이 떠올랐다. 사람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말라붙은 대지의 젖가슴을 빨 때 달이 떠올랐다.​ 별이 반짝이는 저쪽에서 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와 무의미 사이 ​ 지구의 무릎 안쪽으로 커다란 자지가 들어왔다​. 초록의, 눈부신 음부를 향해 지구의 흉곽이 부풀었다.​ 삭망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폭력, ​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밤 달이 떠올랐다. 또 다른 위성을 지닌 것처럼 포기할 수 없는 달빛이 차올랐다. ​.. 2022. 2. 24.
저녁과의 연애/ 저녁과의 연애/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혀 질 메모지처럼 지루한 시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이내 속.. 2022. 2. 24.
눈물의 이면/ 눈물의 이면/강영은 눈물은 어디서 태어나나 당신 눈 속에 괴어있다 꽃으로 피어나나 당신 입속에 잠겨 있다 혀로 돋아나나 뺨 위를 흐르는 꽃과 혀가 있어 어떤 날의 나는 오목렌즈 어떤 날의 나는 볼록렌즈 햇빛과 빗방울도 투명 렌즈를 낀 눈이어서제 맘대로 부풀거나 졸아든 돌덩이.. 2020. 1. 16.
배롱나무 自敍傳 배롱나무 自敍傳/강영은 배롱나무를 사랑했습니다. 배롱나무도 나를 사랑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하여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온갖 새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아, 그러나 나는 희뿌연 달무리를 가느다란 팔뚝에 끼워줬을 뿐. 옷 한 벌 사주지 않았습니다. 밤 소나기가 창문을 두드.. 2020. 1. 16.
이른 눈 이른 눈/강영은  우리는 목관 악기에 혀를 끼워 울음소리를 보탰다. 목젖이 울리고 피리가락이 흐르는 동안 묵향의 단조로움에 붓을 세운 한지처럼 죽음을 애도했다.   목에 매단 나비를 고쳐 매주던 그 여자 만큼 우리도 사랑했을까,   내리면서 녹는 눈이 죽음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흐느끼는 여자 앞에서 푸르다는 말은 위안이 되지 못했다.    백합과 흰 장미의 무덤인 혼례식장에서 우리는 웃으며 축복했었다. 축복의 미래를 확인할 새도 없이 눈을 덮는 꽃의 폭설(暴泄), 우듬지를 때리는 꽃의 폭력이 청춘을 끝장 냈다. ​​  청춘이란 5월에 내리는 눈,​​  초록 잎사귀가 조문객 틈에 끼여 장례식장으로 운구 되는 동안 언제 이 별에 왔다갔는 지 우리의 청춘도 모호해졌다.   짧은 한 때, 이른 눈이 벚나무를 조문.. 2020. 1. 16.
카자흐의 검독수리 카자흐의 검독수리/강영은    한 점의 속도를 베어 무는 야성의 입맛 사라진지 오래   오직 당신을 기다리네   ​ ​발톱아래 식욕을 내려놓고 당신이 던져 줄 한 점 미끼를 기다리네    한 마리의 죽음 보다 미약한 삶을  완성된 문장보다 미완성의 .. 2016. 3. 7.
오늘의 구름같은 오늘의 구름같은 / 강영은    노래에 살며 사랑에 살며 날마다 무대에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무대 아래에서도 무대 위처럼 살았습니다 살아있는 죽음을 사랑한 것도 죽어 있는 삶을 사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태어나지 말라. 죽.. 2016.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