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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의 항아리

저녁과의 연애/

by 너머의 새 2022. 2. 24.

 

 

저녁과의 연애/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혀 질 메모지처럼 지루한 시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

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

이내 속으로 풍경이 사라진 것처럼

저녁이 남기고 간 자리에 나는 없더라는 말

그럴 때 저녁은 제가 저녁인 줄 모르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든다

혼자라는 위로는 불현듯 그때 수백 개의 얼굴로 찾아온다

 

『시로 여는 세상』 201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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