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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단평16

단풍잎 /허문영 단풍잎 /허문영 앞차 유리창에 발그레해진 얼굴이 붙어 있다 어디서부터 따라왔을까 소백산일까 내장산일까 도회지 구경이 하고 싶어 동행했는지도 모른다 둘인 걸 보니 정염情炎의 가을 숲에서 나온 연인 달리는 차창에 붙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두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불타는 .. 2019. 10. 6.
외딴집 /이윤학 외딴집 /이윤학 늦은 꽃을 피워 서둘러 열매를 매단 대추나무 아래 걸린 양은솥뚜껑 둘레에 수증기 물방울들이 주렁주렁 열린다. 장작연기와 수증기가 윤이 나는 풋대추를 문지르고 대추나무 주름을 더듬고 이파리를 간질이고 서로 어울려 먼 길을 떠난다. 할아버지가 짐자전거 찜통에 .. 2019. 10. 6.
신문지/이은봉 ​ 신문지/이은봉 ―서울 어렸을 때는 신문지를 두손으로 펴들고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신문지는 벽에 바르는 벽지이거나 뒷간에서 쓰는 밑씻개였다 신문지를 두손으로 펴들고 읽는 것은 면장님이나 하는 일이었다 벽지 대신 신문지를 바른 허드레 방에서는 한국일보.. 2019. 10. 6.
갈대는/이수익 갈대는/이수익 저 갈백색 물결이 부드럽게 일렁이고 있는 일은 겨울 햇살 아래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경이로움이다. 모두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린, 척박한 1월의 변두리 지역에서 살아 있음을 저리도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는, 그 상대적 일체감이 죽어 있는 물체들 사이에서 환히 빛을 낸.. 2019. 6. 21.
꽃멜/이명수 꽃멜/이명수 해질 녘 모슬포 부둣가 한 귀퉁이 아들이 갓 잡아온 멸치를 할머니가 손질해 말리고 있다 은빛 물결 잦아들면 멸치는 숨죽여 몸을 뒤척이고 노을빛에 할머니가 꽃처럼 곱다 5천원주고 꽃멜 한 봉지 얹어 배낭에 넣었다 몇 백 마리 멸치 온기가 한기 어린 내 등을 따뜻이 덥혀.. 2019. 6. 21.
암스테르담/강인한 암스테르담/강인한 공짜로 휴대폰을 바꿔준다는 전화가 또 왔습니다. 만원짜리 지폐가 든 봉투를 코앞에 흔들며 신문을 바꿔 보라는 사내가 있습니다. 바꾸고 바꾸고 또 바꾸는 게 유행이고 미덕이랍니다. 냉장고를 바꾸고, 비포에서 애프터로 얼굴을 바꾸고 정당을 바꾸고 심장도 바꾸.. 2019. 1. 18.
적막 소리/ 문인수 적막 소리/ 문인수 적막도 산천에 들어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 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도 다시 계속 적막 속으로 들.. 2019. 1. 18.
착한 미소/송명진 착한 미소/송명진 도솔천궁이 여기 있나이다 비로자나불 석가불 노사나불 약사불 아미타불 연초록 말씀으로 진리를 깨우치면 관음자장 미소로 삼생을 살아 도솔천에 닿기까지 오랜 기쁨입니다 돌아돌아 나무였다면 연초록 진리였을 것이고 돌아돌아 바람이었다면 유혹의 바람이었을 것.. 2019. 1. 18.
비대칭 반가사유상/정숙자 비대칭 반가사유상/정숙자 한 칸 때문에 엎드릴 것이다 깍고 팔 것이다 바람을 키울 것이다 한 칸 때문에 뒤척일 것이며 물렁뼈 깊어질 것이다 휙휙 휙 머리 날아갈 것이다 맑은 강 바라기도 할 것이다 ( 그 한 칸이야 기둥이었다가 대들보였다가 서까래였다가 툇마루였다가...... , 에라 그.. 2019. 1. 18.
유령학교/ 김혜순 유령학교/ 김혜순 나는 유령학교에 근무한다 이 동네에선 유령된지 10년이 지나면 자동으로 제도권 유령이 된다 나는 신참 유령들에게 수업을 한다 (이 일 때문에 도무지 잠적이란 부가능하다) 우선 머리에 발을 올리고 발을 땅에 대지않고 걷는 연습 말해봤자 아무도 듣지 않고 설자리 누.. 2019. 1. 18.
김여정의「이집트」 김여정의「이집트」 나 이제 몸피 잘 생긴 배롱나무를 보아도 혀를 날름 내밀어 보이며 "메롱!" 하고 싶어지면 안되겠지! 나 이제 넘실대는 청동의 파도를 보아도 혀를 날름 내밀어 "메롱!" 하고 싶어지면 안되겠지! 나 이제 마주하면 가슴 뜨거워지는 늠름한 적송赤松 만나고도 혀를 날름.. 2019. 1. 18.
시퍼런 하늘을 쳐다본다/ 고형렬 시퍼런 하늘을 쳐다본다/ 고형렬 하늘의 둔기가 내 머리를 내리칠 것 같다 찰나처럼 한 순간 그 고통이 지나간다면 그 둔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내겐 맞는 말이다 둔기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순간이 있다면 그때다 싶게 허공을 광속으로 달려오라 둔기여, 내 머리통을 단번에 박살내어.. 2019. 1.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