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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단평

신문지/이은봉

by 너머의 새 2019. 10. 6.

신문지/이은봉

              ―서울

 

 

  어렸을 때는 신문지를 두손으로 펴들고 읽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기껏해야 신문지는 벽에 바르는 벽지이거나 뒷간에서 쓰는 밑씻개였다 신문지를 두손으로 펴들고 읽는 것은 면장님이나 하는 일이었다

 

 벽지 대신 신문지를 바른 허드레 방에서는 한국일보가 가장 눈에 잘 띄었다 짧은 시 한 편이 실려 있는 한국일보 1면은 특히 소리 내어 읽기에 좋았다 뒹굴뒹굴 벽지를 읽는 재미라니

 

 그때는 누구도 조선일보 이불을 덮고 자지는 않았다 그때는 누구도 중앙일보 밥상을 펼쳐 아침을 먹지는 않았다 용산역 지하철 정거장 안, 동아일보 이불을 덮고 잠들었다가 꼬조조 눈을 뜨는 사람들……

 

  눈을 뜨자마자 누구는 한겨레신문을 펼쳐 아침상을 차렸다 더러는 문화일보를 펼쳐 아침상을 차리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이라야 비닐봉지에서 꺼낸 빵부스러기 따위 우물우물 입안에 털어 넣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러는 쏟아지는 아침 햇살 한 움큼 입안에 털어 넣는 사람도 있었다 경향신문을 덮고 잤기 때문일까 이들한테서는 늘 쉬어터진 인쇄잉크 냄새가 났다 고향집 외양간의 소똥냄새가 났다.



  

                    『서정과현실』 2013년 상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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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이란 특정 또는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시사에 관한 뉴스를 비롯한 정보 ·지식 ·오락 ·광고 등을 전달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이러한 기능 등을 수행함으로써 신문은 현대사회의 인간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구실을 담당하고 있다 매체로서의 다양한 가치와 기능을 버리면 신문은 한 장의 종이에 불과하다. 

 

 한 장의 종이가 된 신문지는 제유적 의미에서 다양한 이미지로 변신한다. 신문이 지닌 속성에서 벗어나 현실에서도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가난했던 한 때, 밑씻개였으며 흙벽에 바르던 벽지였으며 벽지로 발라져 있다가 어느 가난한 시인 지망생의 눈에 우연히 띈 모범 답안이었으며 노숙자들의 이불이고 밥상이기도 한 신문지, 신문지가 제대로 대접 받는 것은 권력을 지닌 자의 손에서다.

      

 시인의 날카로운 관찰력은 신문지의 지면(紙面)을 실질적 지면(地面)인 ‘서울’을 통해 현대사회의 일면을 통렬하게 풍자한다. 서울, 그 중에서도 용산 역 지하철 안, 노숙자가 되어버린, 될 수밖에 없는 어느 인쇄공의 길항하는 삶의 비의가 아프게 읽혀지는 시이다. 그는 누구일까, 그가 인쇄 했을지도 모를 신문을 덮으면 거대한 지면(知面)에 항거하는 아픈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것 같다. /강영은


2014 시인들이 뽑는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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