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485 엄마의 풀밭 엄마의 풀밭/강영은 나에게 사탕이 있었다고? 얘들아, 그건 모함이란다. 연애에 골몰하는 나이답게 그리움을 나눠 먹을 애인이 필요했지. 몰래 먹는 사탕은 필요하지 않았단다. 사탕 해, 엄마. 조막 같은 손들이 무릎에 와 안기며 사탕을 건넸지만, 썩은 이빨을 잇몸에 감춘 엄마는 사탕의 달콤함을 몰랐단다. 슬픔을 말해봐, 나도 내 슬픔을 말해 줄게, 엄마는 매일 밤 버스 정류장에 나가 마지막 버스로 돌아오는 남자를 기다렸어. 남편을 애인으로 만드는 일은 오지 않는 새벽을 기다리는 일이었지, 캄캄한 밤이 지속되면 엄마는 창문턱에 걸터앉은 베짱이가 되었어. 아이들이 어떻게 풀밭에 쓰러지고, 어떻게 풀숲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들판을 거니는지. 귀를 뚫는 소리로 노래했지. 너 스스로는 나쁜.. 2026. 7. 30. 마르셰 오 뿌세 (marche aux puces) 마르셰 오 뿌세 (marche aux puces)/강영은 파리 지하철 4호선 클리냥쿠르역, 출구에 피켓 든 사내 하나 서 있다. -잃어버린 아내를 찾습니다. 회백색 눈동자, 풀어 헤친 머리칼, 검은 십자가 그려 넣은 마스크가 들썩일 때마다 입 언저리가 주름졌다 펴지곤 했다. 전철이 도착하고 종점까지 달려온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그때 벼룩시장 구석의 암모니아 화석이 고생대로 유배된 귀를 연다. 세잔느의 연못이 연꽃을 피워내고 마리 앙투와네트 잃어버린 한쪽 귀고리가 반짝거린다. 자루처럼 축 늘어진 몸을 이끌고 벼룩처럼 뛰는 사내, 들끓는 사람들 속에서 첩첩 쌓여 있는 그림자를 뒤진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 따라 먼지 같은 몸을 털어내고 마음 까지 털어낸다면 못 찾을 것 없는 곳이 벼룩시장일.. 2026. 7. 30. 아이스아메리카노 아이스아메리카노/강영은 먼바다의 심연처럼 차가운 너는아이스아메리카노. 아아*를 주문하면 주문이 이루어지고투명한 유리잔에 입술을 대면 비의 기억, 얼음의 차가움, 안개와 이슬의 낮은 호흡.함께 마셨던 순간의 공기마저 서로의 침묵이 얼어붙던 자리에스며든다. 목마름은 빙하의 바다를 지나별빛 가득한 우주에 닿는다. 어둠 속 홀로 빛나는 얼굴. 한 조각 남은 얼음이네 얼굴을 지우지 못한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건네던 순간, 얼어붙었던 네 표정이 돌아온다. 보고 싶다.아이스아메리카노. 네가 없는 시간이 물처럼 흐르며불처럼 타올랐던 시간이 내 입술 속에서 녹아내린다. *아아 —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줄임말-『씨글』 2025년 겨울호 2026. 7. 30. 분리된 사랑 분리된 사랑/강영은 낯선 곳 낯선 틈에 앉아커피를 마신다 카페인은 없고 향기만 남은 잔에 내 안의 애인들이 로그인한다 오! 나도 모르는 무수한 애인이 있었다니! 누가 나를 이렇게 복수형으로 만들었나 슬픔과 분리된 사랑은 욕망파일만 남고 내용은 열리지 않는다 버리지 못한 욕망은 거품처럼 가벼워 자꾸 떠오른다 중독되지 않는 슬픔에 접속한누가 입술을 업로드 했는가 키스, 키사스, 디카페인 뜨거운 커피잔에 입술을 대는나, 혹은 그들-『사이펀』 2026년 여름호 , 2026. 7. 30. 녹색비단구렁이 녹색비단구렁이 강영은 어머니. 천둥번개 치고 비 오는 날이면 비 냄새에 칭칭 감겨 있는 생각을 벗어버리고 몸 밖으로 범람하는 강물이 되고 싶어요 모과나무 가지에 매달린 모과열매처럼 시퍼렇게 독 오른 모가지를 공중에 매달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신부가 되어 한 번의 낙뢰, 한 번의 키스로 죽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내 몸의 죽은 강물을 퍼 나르고 싶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가 건너야 할 몸 밖의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뿐이에요 눈부시게 빛나는 햇빛의 징검다리뿐이에요 내 몸에 똬리 튼 슬픔을 불러내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연두에서 암록까지 간극을 알 수 없는 초록에 눈이 부셔 밤이면 독니에 찔려 죽는 꿈들만 벌떡벌떡 되살아나요 어머니, 녹색비단구렁이 새끼를 부화하는 세상이란 정말이지 음모일 뿐이에요 희.. 2026. 7. 30. We Are the World We Are the World/ 강영은 먼 전장의 포성이 TV 화면에서 넘쳐흐른다. 방 안 공기가 흔들린다. 갓 구운 빵의 온기가 식탁에 내려앉는다. 버터칼이 부드럽게 길을 낸다. 화면 속, 건물이 무너지고 검은 연기 아래 흩어지는 그림자들 잘려 나간 빵엔 냉기가 스민다. 창틈의 빛이 식탁 위 은잔의 입술을 더듬는다. 창밖, 비둘기 한 마리 느리게 원을 그리며 날아오른다. 햇빛이 그 날갯짓에 오래 머문다. 날개 안쪽엔 도시의 폐허깃털 끝에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슬픔 나는 식어가는 시간을 찢어 빵 위에 올려놓는다. 소리와 냄새와 빛이 고요 속에 층층이 쌓인다. 키리에*, 자비를! 굴러내린 눈물을 헤롯의 쟁반에 받쳐 든다. 헤롯은 사라지고 쟁반만 남은 전쟁터. 아이는 제단 위에 남은 빵 부스러기.. 2026. 7. 30. 너머의 새 너머의 새/ 강영은새가 날아가는 하늘을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으로 나눕니다.방향이 틀리면 북쪽과 남쪽을 강조하거나죽음을 강요하기도 합니다.나의 흉곽을 새장으로 설득하기도 합니다.사이에 있는 것은 허공새가슴을 지닌 허공을 손짓하면새가 돌아올지 모르지만새의 노동이노래를 발견하고 나무를 발명합니다.헤아릴 수 없는 크기를 가진 숲에잠깐 머물러나무와 나무의 그늘을 이해한다 해도새 발자국에 묻은 피가 없다면당신이 던진 돌멩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点 하나가돌에 맞은 허공을 끌고 갑니다.제가 새라는 걸 모르고새라고 하자공중이 조각조각 흩어집니다.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너머로 넘어가는 새새라고 부르면 새가 될지 모르지만나라고 발음하는 새는누구일까요? ‘새 발자국에 묻은 피’ 본질적으로 시는 초월성을 담보로 한다.. 2026. 4. 28. 사랑이 있던 자리 : 가면, 상처, 반야 「풀등, 바다의 등」 해설 사랑이 있던 자리 : 가면, 상처, 반야 김석준(문학평론가) “나는 내가 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툴루즈 로트렉의 물랑루즈 포스터」중)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존재의 구멍이 벽처럼 인간학의 배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서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뻥 뚫리고 어안이 벙벙하다. 사랑이 있던 자리에 맹목의 상처가 자리 잡는다. “당신에게 가는 길”(「나침반」중) 사이사이에 사랑은 없고, 그저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깊은 슬픔뿐이다. 생에의 呂律이 마구 흔들려 광시곡이 온 세상에 암울하게 울려 퍼진다. “깨어진 마음”(「검은 호수」중)으로 인해 심혼이 마구 흐트러지고 불안이 심란하게 요동친다. 통념과 편견이.. 2026. 3. 13. 『 녹색비단구렁이』 해설 ■ 『 녹색비단구렁이』 해설 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강영은의 시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는, 선명한 감각의 재현과 생의 원초적 의미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결속하면서, 우리 시단에 매우 이채로운 음색을 던진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전(全)존재로서의 ‘시’를 쓰고 사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가령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꽃/집/독”이라는 다중적 속성을 ‘시’에 부여하는데, 그렇게 ‘꽃’과 ‘집’처럼 피고 지고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시’는 ‘독’처럼 스며 시인 자신을 “시퍼렇게 독 오른” 존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치명적 독성을 감염시킨 ‘시’에.. 2026. 3. 13.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강나루 (시와 사람 부주간, 문학평론가) ※ 강영은 신작 소시집 | 작품론 |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시간 강나루 (시와 사람 부주간, 문학평론가) 지난 수년간 필자는 기억에 관한 여러 사유를 수필로 쓴 바 있다. 어린 시절의 나도 지금의 나도 모두 ‘나’이지만, 성장하며 겪은 여러 경험과 기억이 어느 순간 과거의 나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는 감각은, 나라는 정체성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자주 묻게 했다. 겹겹이 쌓인 기억들이 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기억들이 언제나 정리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간 줄 알았던 시간들이 뜻밖의 순간에 현재를 건드리는 경험에 더 가까웠다. 그런 점에서 강영은 시인의 이번 신작 시들은, 경험과 기억이 어떤 방식으로 남아 있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강영은 시인의.. 2026. 3. 13. 단어(單語)의 세계 단어(單語)의 세계 /강영은 늦은 눈 내리는 3월, 눈보라를 지나가는 감정이 있다 몰려드는 눈갈기 손으로 털며 소복소복 쌓이는 눈을 밟으며 눈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표정이 있다 대숲에 드는 눈설레처럼 흰 여백 채우는 발자국 소리 돌담 둘러친 동백숲에선 붉게 핀 애기 동백 뚝뚝, 모가지를 떨구는데 가야 할 먼 곳 있다는 듯 죽음을 지나가는 형식이 있다 그리움은 죽음보다 더 먼 곳에 놓여있다고 오늘을 지나가는 저 사람, 심장이 녹기 전에 눈 속에 묻은 발목 지나야 한다 3월에 태어난 눈사람처럼 비유(比喩)의 세계를 지나야 한다 사람 닮은 한 덩이 돌덩어리로 굳어질까 봐 눈사람은 우두커니 서서 울고 있는데 동백꽃 지는 밤을 지나가는 목숨이 있다 말 걸지 말아줘, 나는 지금 햇빛과 사귀는 중야.. 2026. 3. 13. 침묵의 깊이 ―용문사 은행나무 침묵의 깊이 ―용문사 은행나무 강영은 천년을 버틴 나무 앞에 서면말은 사라지고 침묵만 남는다 말과 말 사이, 고요가 흐르고우묵한 가슴팍에 새의 숨결이 깃든다 침묵은 언어가 닿지 못한 곳에서가장 고요히 피어난다는 것을. 나는 그 빈틈에 별빛을 꿰매고바람의 그림자를 놓아두리라 나는 보리라. 노란 이파리가 한없이 떨어지는 길 끝에서말이 흩어지고 침묵이 쌓이는 것을 침묵은 이별을 깊게 하고사랑은 말을 넘어 오래 남는다는 것을. ―《시와소금》, 2025년 겨울호 ■ 시 읽기 이 시작품을 만나는 순간 ‘인간은 말하는 것을 인간으로부터 배우고, 신(神)들로부터 침묵을 배웠다’는 《플루타르크 영웅전》의 한 마디를 떠 올린다.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는 ‘말’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래서일까, ‘천년.. 2026. 3. 13. 이전 1 2 3 4 ···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