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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녹색비단구렁이』 해설 시집『 녹색비단구렁이』 해설​몸’에 깊이 새겨진 기억과 감각- 강영은의 시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 강영은 시집 『녹색비단구렁이』는, 선명한 감각의 재현과 생의 원초적 의미에 대한 집요한 천착을 결속하면서, 우리 시단에 매우 이채로운 음색을 던진 성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만큼 시인은 이번 시집을 통해 전(全)존재로서의 ‘시’를 쓰고 사는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가령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꽃/집/독”이라는 다중적 속성을 ‘시’에 부여하는데, 그렇게 ‘꽃’과 ‘집’처럼 피고 지고 세워지고 무너지는 동안 ‘시’는 ‘독’처럼 스며 시인 자신을 “시퍼렇게 독 오른” 존재로 만들었다. 이처럼 치명적 독성을 감염시킨 ‘시’에 대하여 .. 2025. 5. 17.
시집 <나는 구름에 걸려 넘어진적이 있다> 시집 해설 /노철 (문학 평론가,전남대 교수) 1, 사루비아 종족의 신선한 감각 아파트 평수 늘리기, 집값 올리기에 혈안이 된 세상에서 시를 쓰는 마음은 삶의 과녁에서 빗나가는 일이다. 이 지상에서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돈'이라는 것을 아는자, 동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자, 돈으로 아름다움마저 사버리는 자, 돈 아니면 남자도 아닌자, 돈 아니면 여자도 아닌 자, 이런 종족이 거주하는 나라에서 시인은 무슨 짓을 하는 것일까, 아니 시인이란 추상 명사로 말하기에는 시인들도 이미 여러 종족들의 집합이다. 이 여러 종족 가운데 강영은 시인은 '사루비아 종족'이다. 간 밤에 깨꽃 붉게 피었다 면도날 같은 달빛꽃잎 위에 박혀 붉은 눈물 화염처럼 번졌다 생으로 사루는그, 진한 빛깔의목숨을 보고 언니야, 큰 언니야.. 2025. 5. 17.
시집 <스스로 우는 꽃잎> 해설 숨어서 정갈한 풍경/박정호 (문학평론가) ​ ​ 산행을 하다보면 명승지가 아니라 하여도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름이 잘 알려지고 이름값을 하는 절경이 아니라 하여도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모른 아름다움을 간직한 풍경을 만날때면 산행의 기쁨은 더욱 커진다. 이 같은 행운은 어디 산행 뿐이랴, 길을 가다가도 풀섶에 핀 이름모를 꽃이 이름을 알고 있는 꽃들보다 더욱 아름다울 때가 있으며 글을 읽다가도 유명 저자가 아니라도 지혜와 감성이 더욱 빛나는 글도 있다., 우리들 삶에도 숨겨져 있어 알려지지 않았거나 무심코 지나쳐 눈여겨보지 않았던 아름다운 정경이 곳곳에 있다. 이 같은 기쁨은 시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이름도 알 수 없이.. 2025. 5. 17.
동대 입구 동대 입구/강영은 ​ 정오의 태양을 붙들어 맨 텅 빈 테니스장, 학교가 파한 아이들 둥근 머리가 테니스공처럼 날아다니는 장면과 장면 사이에 있다 동대 입구​ 가랑잎 몰려가는 그곳으로 들어서면 정문이 있고 삼문(三門) 중, 큰문으로 가는 벼슬아치처럼 동대로 가는 차들은 한결같이 그곳으로 올라간다​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등을 돌리면 동대 입구는 산으로 가는 길을 낸다 상아탑 만큼 오르기 힘든 오솔길은 가고 없는 소월을 향해 보이지 않는 길을 낸다​ 가시덤불과 쑥구렁 사이, 함초롬히 놓인 동대 입구, 나는 그 입구에서 아들의 상처를 만진다​ 축축한 지면에 닿아 검게 부식되어가는 가랑잎처럼 긁어 부스럼 난 슬픔을 만져본다 수액 돌지 않는 계절이 검은 꽃 피워냈나,​ 엄마, 동대 입구로 와요, 국립극장 앞으로 .. 2025. 5. 17.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책장冊張, 낱낱이 펼쳐진 밤의 숲/ 강영은​ 시인의 나라는 중립국이다.아군 적군이 없다. 은유(隱喩)로 빚은밤의 숲처럼 ​꽃을 꽃이라 말하지 않고벌레를 벌레로 보지 않는다.신(神)을 높이거나짐승을 업신여기지 않는다.​가지 끝, 허공을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지 않는다. 나무가 되기 이전의형상들숲을 채우는 온갖기호들너와 내가약속하기 전까지 몰랐던상징들 말똥이 뒤섞인 지뢰밭에서시인은 처음 죽은 병사처럼 소모전을 치른다. ​죽은 자들만이 장벽을 넘어간다.​아무도 거할 수 없고누구도 살 수 없는 언어의 신전(神殿)​시인의 나라는 그 숲에세워진다. 2025. 5. 17.
농담의 무게/ 농담의 무게/강영은​​ 당신은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오는 자판기잖아요! 진담보다 가벼운 농담이긴 해도 그 말을 듣고 알았어요 고장 난 내 몸이 기계였다는 걸, 흐르는 물처럼 잔잔히 죽음에 닿을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로봇이라는 걸, 시인의 운명이 그런 것이라면, 수술대 위에 누워 목숨을 구걸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기계가 되는 편이 낫겠어요 머리통이든 젖꼭지든 하다못해 눈물점이라도 누르기만 하면 지저귀는 기계* 쇠로 된 입술을 가진다면 모가지를 눌러도 지저귀겠죠? 전선 줄에 앉은 참새처럼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찾아오는 새, 시간의 손잡이를 돌려도 날아가지 않는 새, 찬바람에 놀란 갈참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밤, 농담처럼 나는 죽어도 새는 살아있겠죠?​ ​*파울클레 『.. 2025. 4. 14.
수석유화(瘦石幽花) 수석유화(瘦石幽花)/ 강영은 - 강세황,「표옹서화첩」종이에 수묵, 각 폭 28,5 x 18,0 cm, 1878, 괴석의 모양은 오래 전에 죽은 짐승의 골반 뼈처럼 바짝 삭아 손아귀에 조금만 힘을 주면 부스러질 듯 야위었다 구멍까지 뚫려 있으니 ​ 괴석의 가치는 추할수록 아름답다 구멍 뚫린 말, 주름진 말, 혹은 빼어나게 아름다운 말이라 해도 기름기를 쏙 빼야 옹골차게 야윈 입술을 가질 수 있다 ​ 괴석의 모양을 빌려 말하자면 그 기이함이 침묵의 참 모습이라는 것 얼굴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괴석의 틈에 끼어 자란 꽃의 표정은 옅은 먹빛이다 흙 없는 틈바구니에 피어도 낯이 부드럽다 흙을 만나고 가는 꽃이 미소 지으면 도리어 일이 많다고, 차갑고 맑은 입술을 돌 속에 담은 나는 마른.. 2025. 4. 14.
석간 (夕刊 석간 (夕刊 )/ 강영은 단풍잎을 줍는 아이와 그 등을 바라보는 어미의 코끝에서 타는 낙엽냄새 ​나무들 같은 존재에 닿는 지면이 같다고 생각하면 같은 온도로 틀리다고 생각하면 틀린 온도로 타오르는 저녁이다​손으로 비벼 끈 담배처럼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통곡의 벽을 지나가는 사람들, 모닥불처럼 피어나는 행간들​ ​누가 찢었나,누가 되는 저쪽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불자동차​잠을 청하는 노숙자처럼우리는 내일의 안녕을 묻지만 ​모르는 온도를 지닌 당신의 체온은 다른 낙엽으로 기록되는 것이어서 인기척에 놀란 활자들이 몇 갈피의 소모로 파쇄 되는 저녁​당신과 나의 입김으로 태어난 모로코나비n-nabi는 단풍잎 아래 파란색 수은주를 멈춘다. ​두 날개가 접힌 세계는 벌써 낯설고 먼 지상이다. ​​-『문학사상』 .. 2025. 4. 14.
그리운 중력重力 그리운 중력重力/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2025. 4. 2.
개불알꽃 개불알꽃/강영은​​   우리 집 개의 관심사는 오로지 내 두 다리에 쏠려있다. 내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 한판 붙어볼까, 틈을 노리는 것인데 한 눈 파는 사이, 내 다리를 끼고 오르락내리락, 시소 탄다.    볼썽 사납다고, 야단하는 식구들 성화에도 잽싸게 다리 붙드는 솜씨는 두레 밥상을 감추는 밥상보처럼 한 경지를 이룬다.    졸지에 기둥서방 된 다리가 외면할 때면 귀를 축 늘어뜨리고 맥없이 눈망울을 굴리며 하염없이 앞만 쳐다보는 것인데    투명한 수정체에 실금 같은 것이 어리면 그 실금이 강물 같다는 생각에 사물의 각처럼 뾰족해진 마음도    세상의 모든 다리 아래 강물 흐르는 것 하며, 세상의 여자들이 다리를 지나 엄마가 된다는 생각의 묘수에 빠져 관용(寬容)에 다다르는 것이다.    사람도 가죽.. 2025. 4. 2.
나의 두개골 나의 두개골/ 강영은   나의 두개골은 나를 자주 잃어버린다.   사탕으로 가득 찼던 비닐봉지가 텅 빈 것처럼 ​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쏟아지는 사탕들을 줍던 날도 있었지만   더 이상 되돌아올 사탕이 없어 밀려드는 고통​ 나의 두개골은 제가 시인이라는 걸 모른다.​ 나는 두개골에 너무 골몰했다. 나비를 날려 보내고 꽃을 피우는 쓰레기통처럼 ​ 두개골은 나를 너무 소모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는 일처럼​ 두개골은 너무 많은 나를 가졌다.  삐걱거리는 마루뼈/숭숭 구멍 뚫린 벌집뼈/딱딱한 날개를 지닌 나비뼈/자주 통증을 느끼는 뒤통수뼈/신경질적인 관자뼈/없는 자존심 세워주는 코뼈/슬픔을 저장하는 눈물 뼈/납작하게 웃고 있는 광대뼈,   나의 두개골은 고통의 뼈로 채워졌다.  네가.. 2025. 3. 3.
낙엽 사용증명서(使用證明書) 낙엽 사용증명서(使用證明書)/강영은​​한 장의 낙엽을 주워들 때 낙엽의 허무와 빛깔을 찬양할 때 아름답게 물든 계절이 시들어간다낙엽을 주워들 때의 감정과 감각이 불행이란 단어를 달고 사는 건 아니다 헤어지자는 너의 기별을낙엽의 명예로 잘못 읽은 일 어느 여름날, 너에게 물들어간 나의 불행은 푸른 잎사귀를 고집하는 가지의 상상에서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겨울 숲에서 들어보아라빈 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를! 그 떨림이 우리를 흔드는 건 아니다 수식을 좋아하는 숲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무는 나무로서 바람은 바람으로서 낙엽의 운명에 공감할 뿐우리의 부재를 말하지 않는다한 장의 낙엽이 언제나 불행에 집중하는 건 아니다한 장을 넘기면 또 다른 장면이 시작되는 것을책갈피로 꽂아둔 낙엽은 안다 2025. 3.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