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의 무게/강영은
당신은 누르기만 하면 시가 나오는 자판기잖아요!
진담보다 가벼운 농담이긴 해도 그 말을 듣고 알았어요 고장 난 내 몸이 기계였다는 걸, 흐르는 물처럼 잔잔히 죽음에 닿을 줄 알았는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로봇이라는 걸,
시인의 운명이 그런 것이라면,
수술대 위에 누워 목숨을 구걸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기계가 되는 편이 낫겠어요 머리통이든 젖꼭지든 하다못해 눈물점이라도 누르기만 하면 지저귀는 기계*
쇠로 된 입술을 가진다면 모가지를 눌러도 지저귀겠죠? 전선 줄에 앉은 참새처럼 기쁜 날에도 슬픈 날에도 찾아오는 새, 시간의 손잡이를 돌려도 날아가지 않는 새,
찬바람에 놀란 갈참나무가 잎사귀를 떨어뜨리는 밤, 농담처럼 나는 죽어도 새는 살아있겠죠?
*파울클레
『시와 편견』 2022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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