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살이/강영은
느려터진 한 해를 하루의 시간으로 앞지르려던 나는 부은 얼굴에 얼음을 갖다 댑니다. 얼어붙은 시간의 침묵에 타박상을 입은 거죠 그래도 온 누리 가득 퍼지는 햇살 두서너 개 호주머니에 꽂아 두어야겠죠 머지않아 봄이 올 거라고, 덕담 한마디 잊지 말아야겠죠
파릇파릇 새잎 돋아나는 봄이 오면 어떤 나무가 원고지가 될지, 글자들이 돋아나는 이파리에선 어떤 국경(國境)이 태어날지 벌거벗은 하늘을 바라보는 나의 상상은 남쪽을 지극하게 자극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겨우 살아가는 목숨인데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 많은 까닭을 당신에게 묻어두고 세밑에서 정초로 건너가보는 것인데요 얼어붙은 겨울을 건너야 하는 나의 언어는 아무런 말없이 등을 내주는 당신의 슬픔에 기생하는 까닭에 겨우 살아요
그렇게 살아가는 나와 당신에 대해 허공을 고문해 보려고요 허공에 박혀 있는 나의 인내가 별빛을 끌어안아도 당신과 나의 거리 두기는 여전히 유효하고 죽을 만큼 당신이 보고 싶어도 나는 당신을 보지 못 하죠 차리라 죽는 게 낫겠다고, 나와 거리를 두어보아도 흔들리는 그림자가 나를 따라 다닙니다
죽음을 건널 수 없는 나의 언어는 밤으로 가득 찬 원고지를 떠나지 못해 얼었다 녹았다 반복하는 명태처럼 찢어지기를 기다립니다만 재빠른 여우가 느린 곰을 앞서 나가 듯 당신의 넓은 등을 타고 허공을 건넙니다
너는 새가 뱉어 낸 허공일 뿐이야, 싹 트지 않는 계절을 묻어둔 옆집 아저씨가 한마디 했지만 허공중에도 보이지 않는 씨앗이 있다는 걸, 그 씨앗 속에 노래를 묻어두었다는 걸, 썩은 당신의 옆구리에 기어들면서 나는 속삭였죠
그렇게 나는 늙은 팽나무와 동거 했어요 만년필이 흘린 푸른 잉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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