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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머의 신작 59

그리운 중력重力 그리운 중력重力/강영은   평생 걷다가 한 번쯤 만나는 그대가 극지(極地)라면 함박눈 쌓이는 하룻밤쯤은 극지로 가는 열차를 꿈꾸어도 좋겠네.  기차보다 먼저 도착하는 기적 소리에 실려 한 번도 닿지 않은 그대 마음속, 극지로 떠나보는 것도 좋겠네.  함박눈 맞으며 걷고 있는 나는 여기 있지만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는지, 얼어붙은 빙하가 녹고 있는지   묵묵히 선 빙벽 아래 길을 내고 고요 속에 싹 트는 한 송이 꽃을 기다릴 수 있으리.   지구상에 홀로 남은 동물처럼 가다가, 서다가, 돌아서서 울다가 얼어붙은 대지와 한통속이 된들 어떠리. ​ 발자국만 남긴 그림자처럼 흔적 없이 사라진 미증유의 존재면 어떠리.  만남은 여기보다 조금 더 추운 곳에서 얼어붙고 헤어짐은 여기보다 조금 더 따뜻한 곳에 닿고 싶어.. 2025. 4. 2.
개불알꽃 개불알꽃/강영은​​   우리 집 개의 관심사는 오로지 내 두 다리에 쏠려있다. 내 주위를 맴돌며 어떻게 한판 붙어볼까, 틈을 노리는 것인데 한 눈 파는 사이, 내 다리를 끼고 오르락내리락, 시소 탄다.    볼썽 사납다고, 야단하는 식구들 성화에도 잽싸게 다리 붙드는 솜씨는 두레 밥상을 감추는 밥상보처럼 한 경지를 이룬다.    졸지에 기둥서방 된 다리가 외면할 때면 귀를 축 늘어뜨리고 맥없이 눈망울을 굴리며 하염없이 앞만 쳐다보는 것인데    투명한 수정체에 실금 같은 것이 어리면 그 실금이 강물 같다는 생각에 사물의 각처럼 뾰족해진 마음도    세상의 모든 다리 아래 강물 흐르는 것 하며, 세상의 여자들이 다리를 지나 엄마가 된다는 생각의 묘수에 빠져 관용(寬容)에 다다르는 것이다.    사람도 가죽.. 2025. 4. 2.
나의 두개골 나의 두개골/ 강영은   나의 두개골은 나를 자주 잃어버린다.   사탕으로 가득 찼던 비닐봉지가 텅 빈 것처럼 ​ 무릎걸음으로 기어가 쏟아지는 사탕들을 줍던 날도 있었지만   더 이상 되돌아올 사탕이 없어 밀려드는 고통​ 나의 두개골은 제가 시인이라는 걸 모른다.​ 나는 두개골에 너무 골몰했다. 나비를 날려 보내고 꽃을 피우는 쓰레기통처럼 ​ 두개골은 나를 너무 소모했다. 쓰레기통을 뒤지고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는 일처럼​ 두개골은 너무 많은 나를 가졌다.  삐걱거리는 마루뼈/숭숭 구멍 뚫린 벌집뼈/딱딱한 날개를 지닌 나비뼈/자주 통증을 느끼는 뒤통수뼈/신경질적인 관자뼈/없는 자존심 세워주는 코뼈/슬픔을 저장하는 눈물 뼈/납작하게 웃고 있는 광대뼈,   나의 두개골은 고통의 뼈로 채워졌다.  네가.. 2025. 3. 3.
시계의 미래 시계의 미래/강영은  지나간 것은 지나갔을 뿐이에요. 지나간 줄 모르고 지나간 것에 매달려 있다면 시계가 아니겠죠. 시계는 알아요. 강물이 마침내 하늘로 흐른다는 걸당신은 나를 기다리지 말아요. 자꾸 떠나가니까요. 당신이 온다 해도 나는 떠나가겠죠. 그러니 시계겠죠.한밤중에 시계는 홀로 울겠죠. 사랑과 이별에 내일이 없다고, 끝없이 재생되는 어제 속으로 돌아가겠죠.당신과 나는 고장 나겠죠. 당신이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 해도멈추지 않고 우는 일, 그것이 시계가 꿈꾸는 일이겠죠마음의 분침과 초침을 믿어 봐요. 내일의 시계가 내일의 세계가 될지 시계가 걸어가는 그곳이 내일의 세계겠죠. 고장난 시간에 붙잡히지 않는 시계의 미래겠죠. - 2024년 겨울호 2025. 1. 1.
지구인 지구인/강영은   아픔은 정체 모르는 과일이다.  가슴에 총소리가 고이고 이마에 폭탄이 터질 때 썩은 과일처럼 짓무르는 증상이 몸에 속한 건지 마음에 속한 건지 그 맛을 알 수 없다.   고통의 진실은 생각 속에 있는 거라고 생각을 두둔하지만, 생각이 모르는 아픔도 있는 것 인지 아픔이 몰고 오는 전쟁터를 알지 못했다.   어느 저녁에 나는 숲속에 있었다.   벌 떼가 아카시꽃에 몰려드는 것처럼 딱,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아픔이 있는 건 아니었다.   노을이 지고 떠돌이 벌처럼 헤매는 피의 향기가 숲속으로 흘러들었다. 누구의 무덤에서 풍겨 나오는 것일까,   뉴스에서 보았던 시신(屍身)들, 무덤에 닿지 않은 생명들이 썩은 과일처럼 버려지고 있는 것이 생각났다.  생각 속의 느낌이 흐느낌으로 변할 때, 어.. 2024. 12. 22.
당신의 결심 당신의 결심/강영은​​ 지키기 힘든 마음자리에 놈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나의 전유물인지 당신의 자존심인지 어떻든 어떻게든 지켜야 할 존재 같아서 일인칭인지 이인칭인지 마음을 뺏긴 적이 하도 많은 존재 같아서​ 놈의 입술에 키스한다. 놈의 입속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지킬 수 없는, 그러나 지켜야 하는 연기(煙氣)의 말,​ 구겨진 종이를 펴지 못해 헤매는 손처럼 미망(迷妄)으로 가득 찬 이 비문(非文)이 당신의 결심이었나,​ 그렇다고 당신 것만은 아닌,​ 밑 빠진 항아리 속을 빠져나가는 생쥐처럼 죽이기도 어렵고 살리기는 더욱 어려운 마음의 실체​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이야!​ 식탁 위에 남은 한 조각 케이크처럼 입술에 담기는 다정한 말에 방심(放心)을 선택한 나의 무심(無心)은 당신을 그저, 놈이.. 2024. 12. 22.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 백로전미발白露前未發*/ 강영은  ​ 난데없이 부는 바람에강아지풀이 화분을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귀로 듣는 이야기는 모두 아픈 것이어서 귀를 버리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까?​명줄이 끊어지는 강아지를 품에 안고병원으로 달려가던 날처럼낯설지만 낯설지만은 않은 풍경.​전쟁과 폭풍, 가짜뉴스 같은비명은 비명을 모르고 슬픔은 슬픔을 모르고초록이 친구이길 바랐으나초록을 초록으로 마주하기엔 절벽 같은 시간​귀가 남긴 풍경 속에서 돌아오지 않는 당신, 다시 볼 수 없는 당신을여름이라 불러도 되나,​생사를 알 수 없는 계절 속에나를 세워두고 처서 지난다.​갓 태어난 생명이 삶과 죽음의 테두리를 도는 이 땅은 계절이 무용(無用)한 세계​이중 고기압과 열대야에 짓눌렸어도비의(比擬)를 알 수 없는 소슬바람 분다고.. 2024. 12. 22.
울릉(鬱陵) 울릉(鬱陵)/ 강영은   섬잣나무 같은 사내에 눈이 먼다면, 울릉도에 가볼 일이다.​ 깊은 바다 외롭게 솟아있는 해산海山처럼 폭발하는 마음, 아무도 모르게 출렁거리는 마음 데리고 울릉도에 가볼 일이다.​ 남몰래 띄우는 편지처럼 나리분지 북쪽에 일렬로 늘어선 봉우리 어느 한 칸에 우데기* 같은 초막 한 채 세워도 되리.​ 밤이면, 섬잣나무 무릎에 누워 사랑하는 이의 귓밥 파주듯 가만가만 속삭이는 파도 소리 들어도 좋으리. 젊은 화산체 같은 마음 다시 타오르기를 기다려도 좋으리​ 섬과 섬 사이, 안개 짙어지면 오갈 데 없는 마음 고요해져 출렁거리는 밤의 기척은 한층 더 깊어지리. 세간의 이목구비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리.​ 좋았다가 흐리다가 비 오가를 반복하는 날씨 더불어 오직 그대만이 그리워지리. 슬픔이 울창.. 2024. 10. 6.
눈물은 공평하다 눈물은 공평하다/ 강영은 ​​​경기가 끝났을 때 승자도 패자도 눈물 흘렸다.​땀으로 얼룩진 표정을 닦는 척, 수건에 감정을 파묻고 꾹꾹, 목울대를 치받고 올라오는 울음을 눌렀다.​양팔을 높이 쳐든 승자는 메달을 가져갔지만텅 빈 손을 내려다보는 패자에게도 메달은 있었다.​시간이라는 메달!승부는 다만 순간 속에 녹여낸 사물일 뿐​딱딱한 기쁨을 목에 걸었다고 시간이 늘어나는 건 아니다. 물컹한 슬픔을 손에 쥐었다고 시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시간은 안다. 그 공평함이 세상을 걷게 한다는 것을​흐르지 않는 시간 있어 눈물이 한 생을 완성하는 그때이슬처럼 영글게 하는 ​그 공평함이 신의 은총이라는 것을 먼 길 걸어본 당신과 나는 안다.『신동아』 2024년 9월호 2024. 9. 24.
여름 밤이 남긴 것 여름 밤이 남긴 것/강영은​​네 눈 속에 별이 들어 있어,​논짓물*에 스며든 그 말을 들은 날부터 밤마다 속눈썹에 네가 돋았다 ​​​피에로의 웃음 같은 슬픔, 혹은 기쁨일지도 모를 너의 그 말​항아리 뚜껑 위에 올려놓고 복을 비는 정화수처럼한 그릇 물이라도 된다는 말​은하수 가득 별을 뿌려놓은 여름밤이 모두의 눈을 가리기 위해 반짝였지만​태풍처럼 왔다가 사라진 그림자를 찾아 헤맬 때면한 그릇 물에 고인 별빛이 흐렸다​죽어도 낫지 않는 피부병처럼 모호하고 불확실한 사랑이 찾아온 것은​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오두막에서였다 ​* 그냥 버리는 물'이라는 뜻의 제주 방언.​『문학 에스프리』 2024년 여름호 2024. 8. 17.
뫼비우스의 띠 뫼비우스의 띠/강영은  슬픔은 내부와 외부를 갖고 있다. 이 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로 통합된다. ​너는 말한다. 울지만 말고눈물을 꼭 눌러 봐, 슬픔의 뒷면이구나 싶은 그때, 눈물은 처음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거야. ​눈물이 얼마나 멀리 가는지 알지 못하는 너는 그것을 슬픔이라 생각하는데고개 들어 창밖을 보니강아지풀과 부추꽃이 사는 바깥이 시들어 있다 ​꽃 피는 일에도 꽃 지는 일에도 한결같은 너와 나 사이, 구분할 수 없는 어둠이 있는 것일까, 눈동자 속으로 자꾸 고여드는 별빛​등만 바라보는 외줄기 사랑은 슬픔을 통과하지 못한다. 아무리 울어도 안팎이 모호한 눈동자 속의 첫 장면으로 돌아간다.​​『동행문학』 2024년 봄호 2024. 6. 27.
섬망(譫妄)의 숲 섬망(譫妄)의 숲/ 강영은  고라니는 소리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갖는다.  어떤 소리가 고라니의 진짜 소리인지 고라니가 기술하는 소리의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고라니의 목청은 방울을 굴리거나 개처럼 짖어대거나 사람처럼 휘파람 불기도 한다. 개울가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라니를 본다. 반가운 마음에 휘익, 휘파람 불자 방울뱀처럼 목젖 굴리며개울 너머로 달아난다.  주고받은 소리 사이, 남아 있는 숲 축축한 낙엽, 썩은 나무뿌리, 가시덤불, 막 돋아난 어린 새싹들,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동백 꽃송이들,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한층 풍만해진  소리의 바닥이 거기 있었다.소리에 소리가 쌓여도  고라니의 눈높이에선 하늘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 적도 없었을 거다. 고라니를 다시 본 것은.. 2024. 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