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망(譫妄)의 숲/ 강영은
고라니는
소리의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을
갖는다.
어떤 소리가 고라니의 진짜 소리인지
고라니가 기술하는 소리의 내력을 알지 못하지만
고라니의 목청은
방울을 굴리거나 개처럼 짖어대거나 사람처럼
휘파람 불기도 한다.
개울가 풀숲에서 불쑥
튀어나온 고라니를 본다. 반가운 마음에
휘익, 휘파람 불자 방울뱀처럼 목젖 굴리며
개울 너머로 달아난다.
주고받은 소리 사이,
남아 있는
숲
축축한 낙엽, 썩은 나무뿌리, 가시덤불, 막 돋아난 어린 새싹들,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 동백 꽃송이들,
삶과 죽음이 어우러져
한층 풍만해진
소리의 바닥이 거기 있었다.
소리에 소리가 쌓여도
고라니의 눈높이에선 하늘이 보이지 않았을 거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본 적도 없었을 거다.
고라니를 다시 본 것은,
꿈인 듯 생시인 듯 내 울음을 불러내던
회복실에서였던가,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른 채 짖고 있는
고라니, 소리가 엉켜 있는
숲속에서
죽음에서 해방되지 못한 내 눈동자가
소리의 향방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죽음을 처음 만난 것처럼
고라니는 부르는
크고 작은 목소리가 흩어진다.
그 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닐 수도 있다.
고라니가 내 목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알아야 한다.
내 목소리를 찾아내야 한다.
소리 없이 달아나는 소리를 찾아야 한다.
그래, 스며들 듯 사는 거다. 이끼처럼,
다정하게 달라붙어 사는 거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숲속에
축축한 바닥에
내 소리의 영역을 표시한다.
시작 메모
나는 자주 옥상에 오른다. 녹지 않는 눈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허공이 지닌 풍경과 소통한다. 대륙을 건너온 미세먼지와 펄펄 날리는 눈송이와 젖은 공간을 직조하는 겨울비 속, To be, or not to be? 아니면 Que Sera Sera?..... 먼 나라에서 전해져 오는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돌아보니, 여름부터 내내 겨울이었다. 머지않아 봄이 오리라. 눈사람이 사라진 그곳에서 시(詩)가 돌이 오기를 기다린다.
『현대시』 202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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