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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19

산수국 통신 산수국 통신/강영은 ​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길고 좁다란 닭 울음소리가 건너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이 젖습니다. 길고좁다란 돌담을 꽃피우고 싶어졌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 속에서 길고 좁다란 뱀을 꺼냈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에게 길고 좁다란 뱀을 먹였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을가진 닭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비 오는 북쪽이 닭울음소리를 훔쳤겠지요. 길고 좁다란 형용사만 그대 곁에 남았겠지요.​ 비 개어 청보라 빛 산수국 한 그루 피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산수국 피는 남쪽이고 싶었습니다.   『월간문학』 2016년 6월호 2022. 2. 24.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강영은  바나나를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건 몸에 좋지 등이 꼿꼿하게 펴지거든 헤엄쳐온 생각을 혀로 핥는데 입속으로 사라지는 아, 바나나긴장도 희열도 없는 바나나를 씹으며 바나나에 닿는다 슬픔 따위와 이별하듯 씹혀주는 바나나 즙액도 씨앗도 없는 열매의 거만함을 생각하다가종족에게서 멀리 떠나온 외로움에 닿는다 갓 태어난 무덤 같은아, 바나나철학자처럼 게걸스러운 날들과 헤어진 바나나 껍질은 이빨에 좋다이빨에 묻은 얼룩을 하얗게 닦아 준다 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말하지 않는 바나나껍질만 남은 계단을 오른다 우연히 식탁에 놓여 있던 아, 바나나   *실재와의 만남을 뜻하는 우연 ​ ​『웹진광장』 2017년 6월호  ---------------------.. 2022. 2. 24.
음치 음치(音癡)/강영은     야영지 한구석에 놓인 노래방 기계가 유행가 가락을 뽑아냅니다. 제 몸이 기계인 것도 모른 채 구곡양장의 음절을 넘는 노래 소리가 밤 강물입니다. 저장된 물결이 강물을 밀고 간다는 걸, 저, 쇳덩어리도 아는 걸 까요, 구겨졌다 펴지는 곡조가 물고기비늘 같아 미늘을 문 마음이 서러워집니다. '어제는 울었지만 오늘은 당신 땜에, 내일은 행복할거야'* 출렁거리는 기계음 속으로 달빛도 동전만한 혓바닥을 집어넣습니다.    악보 없는 허공을 바루는 동안 목젖이 아파 옵니다. 귀의 절벽에 매달린 바보여서가 아닙니다. 울고 웃는 입술이 내 마음 어딘가에 있는 까닭입니다. 가느다란 음절에 입을 여는 돌멩이도 비탈에 목젖을 묻은 소나무도 저마다 소리 내고 싶은 저녁이어서 흐르는 노래에 저당 잡힌.. 2022. 2. 24.
슈퍼문super moon 슈퍼문super moon/강영은​  시체 위에는 고추밭과 수박밭이 있었는데 개는 안 짖었습니까,​ 손과 발이 이유 없이 고개를 돌릴 때 달이 떠올랐다. 하반신이 날씬한 에볼라가 검은 대륙을 껴안을 때 달이 떠올랐다. ​ 합삭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혼돈,   위성 같은 연인들이 바이러스를 퍼트릴 때 달이 떠올랐다. 사람의 옷을 입은 늑대들이 말라붙은 대지의 젖가슴을 빨 때 달이 떠올랐다.​ 별이 반짝이는 저쪽에서 달은 무슨 의미입니까, 의미와 무의미 사이 ​ 지구의 무릎 안쪽으로 커다란 자지가 들어왔다​. 초록의, 눈부신 음부를 향해 지구의 흉곽이 부풀었다.​ 삭망이 될 때까지 지속되는 폭력, ​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밤 달이 떠올랐다. 또 다른 위성을 지닌 것처럼 포기할 수 없는 달빛이 차올랐다. ​.. 2022. 2. 24.
저녁과의 연애/ 저녁과의 연애/강영은  저녁의 표정 속에 피 색깔이 다른 감정이 피었다 진다 보라 연보라 흰색으로 빛깔을 이동시키는 브룬스팰지어자스민처럼 그럴 때 저녁은 고독과 가장 닮은 표정을 짓는 것이어서 팔다리가 서먹해지고 이목구비가 피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는다 여럿이 걸어가도 저녁은 하나의 눈동자에 닿는다 빛이 굴절될 때마다 점점 그윽해져가는 회랑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인이 되는 것이어서 미로 속을 헤매는 아이처럼 죽음과 다정해지고 골목이 점점 길어지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화분이 나뒹구는 꽃집 앞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당신이 생각나기도 한다 내일이면 잊혀 질 메모지처럼 지루한 시간의 미열처럼 그럴 때 저녁은 연애에 골몰하는 것이어서낡은 창틀 아래 피어 있는 내가 낯설어진다 어느 저녁에는 내가 없다이내 속.. 2022. 2. 24.
샨티Shantih* 샨티Shantih*/강영은     주여, 이 문장에 평화를 주소서 바구니를 든 손은 가난하고 얼굴은 시들었으나 풍성한 열매를 따고 가는 가을의 얼굴처럼 기쁨에 들뜬 언어를 주소서 고단한 햇빛과 바람의 가시를 몸에 들였으나 폭풍우를 견뎌낸 심장은 튼튼하니 한 톨 한 톨 밤을 떨구는 우주를 받들게 하소서 매 순간, 헤어지는 땅의 시간을 감당했으니 홀로 서 있는 밤나무의 슬픔을 이해하게 하시고 먹을 것을 얻은 다람쥐처럼 그 밤의 깊이에 다다르게 하소서 빈 들녘에 울려 퍼지는 갈가마귀 소리가 노래의 도구(渡口)임을, 필생(筆生)의 울음이 필생의 노래임을,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입술에도 노래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물결을 저어가는 구음(口吟)이 내 과업임을 알게 하소서 나의 노동이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지날.. 2019. 4. 7.
문정희, 문학집배원, 시배달 ,「허공 모텔」 강영은, 「허공 모텔」 Posted on 2016-09-12 by 김 태 형 Posted in 2015 문정희, 문학집배원, 시배달 꽁무니에 바늘귀를 단 가시거미 한 마리, 감나무와 목련나무 사이 모텔 한 채 짓고 있다 저, 모텔에 세 들고 싶다 ​장수하늘소 같은 사내 하나 끌어들여 꿈 속 집같이 흔들리는 그물 침대 위 ​내 깊은 잠 풀어놓고 싶다 ​매일매일 줄타기하는 가시거미처럼 ​그 사내 걸어 온 길 칭칭 동여맨다면나, 밤마다 그 길 들락거릴 수 있으리 그 사내, 쓰고 온 모자 벗어버리고​신고 온 신발도 벗어던져​돌아갈 길 아주 잃어버린다면​사내 닮은 어여쁜 죽음 하나 낳을 수 있으리 그 죽음 자랄 때까지빵처럼 그 죽음 뜯어먹으며​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는 날개 옷 한 벌자을 수 있으리 ​저, 허공 모텔.. 2019. 1. 18.
문학동네 시인이 읽은 시 꽃을 위한 예언서/강영은 ​ ​​ ​ 초저녁별과 나 사이, 꽃잎 위를 기어가는 투구벌레의 등이 꼭짓점이다. 제 등이 꼭짓점인지 모르는 황금 갑옷이 반짝일 때마다 막 피기 시작한 꽃잎이 휘어진다. 곡선을 봉인한 날개 속에 죽음이 유지되기를 원할 뿐, 꽃잎을 덮고 있는 어둠을 보지 못.. 2019. 1. 17.
명품 만년필, 시의 상상력을 읽는 기쁨 명품 만년필, 시의 상상력을 읽는 기쁨 -지현아 신작시 특집 조명/ 강영은 시인은 ‘무엇을 쓸 것인가’ 와 ‘어떻게 쓸 것인가’ 라는 두 개의 명제를 앞에 두고 고민하기 마련이다. 양날과 같은 이러한 고민은 세계와 그 세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상상 속에서 충돌과 화합을 거듭하여 시, .. 2019. 1. 16.
생일(生日) 도로시아 태닝의 「생일」,1942, OIl on canvas, 102×65㎝,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생일(生日)/강영은 해마다 온다 ​매화나무 가지가 꽃을 피워내듯 일생동안 온다 매화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처럼 어제 잃어버린 신발을 찾는 것처럼 어떤 일을 하는 동안에도 열리기만 하는 문(門), 그 틈새.. 2019. 1. 15.
성체聖體 성체聖體/강영은                     빵이라 부를 때 이것은 존재 한다​ 누룩과 불화하는 이것 때문에 상처가 아문다 상처를 길들이는 이것 때문에 나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닌다 피와 연합하는 포도주처럼 나의 내면이 뜨거워진다​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흠집은 흠집을 깎는 고귀한 감정을 지니게 된다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감정은 존재의 지척(咫尺)을 드러낸다​​ 빵이 되기 위한 밀가루처럼 존재에 선행하는 존재* 뼈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것 때문에 나의 식탁은 밀밭이다   나의 굶주림은 밀밭 위로 날아오르는 새떼가 된다 이 하늘에서 저 하늘로 날아다니는 조직의 지체가 된다   만일 이것이 밀가루에 국한된 존재라면 쟁반 위에 놓인 한 잔의 포도주와 한 조각 빵은 식탁이 차려준 한 끼니 식사에 .. 2019. 1. 8.
오후 네 시를 지나는 두 개의 바늘 - 기억의 고집<살바도르 달리 오후 네 시를 지나는 두 개의 바늘 강영은 화단과 멀어진 ​다음, 그 다음에도 걷겠습니다. 활짝 핀 웃음을 기다리는 당신을 향해 ​걷다가 멈추겠습니다. 걷다가 멈추는 일이 습관이라면, 바람도 바람에 날리는 향기도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당신마저 .. 2018.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