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시론詩論22 눈물 병(甁) 눈물 병(甁)/강영은 고대 이스라엘에는 눈물을 받아주는 병(甁)이 있었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병이었다 울 일이 있으면 꼭 챙겨야 했고 간직한 사람이 죽으면 함께 묻어야 했던 그 병이 발굴됐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지만손수건으로, 부의금으로 진화했다는 가담항설이 있는 것을 보면 눈에서 병으로 주소지를 옮긴 눈물은 사물이거나 자본이었는지 모른다 눈물이 병에 담길 때마다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았는지 눈물의 평생을 연구한 학자도 눈물의 색깔로 마음을 물들인 염색가도 눈물에 비치는 무늬를 짜 넣은 직공도 아니었지만 흘린 눈물을 모아 소중히 보관했던 나는 축축이 젖은 가죽 속에서 죽은 자가 흘린 울음을 꺼내들거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기도 했던 것인데눈물은 지상의 모든 입을 얼어붙게 만드는 최고의 창검, 어떤.. 2022. 2. 24. 산수국 통신 산수국 통신/강영은 길고 좁다란 땅을 가진 옆집에서 길고 좁다란 닭 울음소리가 건너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이 젖습니다. 길고좁다란 돌담을 꽃피우고 싶어졌습니다. 길고 좁다란 돌담 속에서 길고 좁다란 뱀을 꺼냈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에게 길고 좁다란 뱀을 먹였습니다. 길고 좁다란 목을가진 닭울음소리가 그쳤습니다. 비 오는 북쪽이 닭울음소리를 훔쳤겠지요. 길고 좁다란 형용사만 그대 곁에 남았겠지요. 비 개어 청보라 빛 산수국 한 그루 피었습니다. 그대에게 나는 산수국 피는 남쪽이고 싶었습니다. 『월간문학』 2016년 6월호 2022. 2. 24.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투케(tuche)*에 대한 소고(小考)/ 강영은 바나나를 입에 물고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는 건 몸에 좋지 등이 꼿꼿하게 펴지거든 헤엄쳐온 생각을 혀로 핥는데 입속으로 사라지는 아, 바나나긴장도 희열도 없는 바나나를 씹으며 바나나에 닿는다 슬픔 따위와 이별하듯 씹혀주는 바나나 즙액도 씨앗도 없는 열매의 거만함을 생각하다가종족에게서 멀리 떠나온 외로움에 닿는다 갓 태어난 무덤 같은아, 바나나철학자처럼 게걸스러운 날들과 헤어진 바나나 껍질은 이빨에 좋다이빨에 묻은 얼룩을 하얗게 닦아 준다 죽음 뒤엔 무엇이 남는지 말하지 않는 바나나껍질만 남은 계단을 오른다 우연히 식탁에 놓여 있던 아, 바나나 *실재와의 만남을 뜻하는 우연 『웹진광장』 2017년 6월호 ---------------------.. 2022. 2. 24. 샨티Shantih* 샨티Shantih*/강영은 주여, 이 문장에 평화를 주소서 바구니를 든 손은 가난하고 얼굴은 시들었으나 풍성한 열매를 따고 가는 가을의 얼굴처럼 기쁨에 들뜬 언어를 주소서 고단한 햇빛과 바람의 가시를 몸에 들였으나 폭풍우를 견뎌낸 심장은 튼튼하니 한 톨 한 톨 밤을 떨구는 우주를 받들게 하소서 매 순간, 헤어지는 땅의 시간을 감당했으니 홀로 서 있는 밤나무의 슬픔을 이해하게 하시고 먹을 것을 얻은 다람쥐처럼 그 밤의 깊이에 다다르게 하소서 빈 들녘에 울려 퍼지는 갈가마귀 소리가 노래의 도구(渡口)임을, 필생(筆生)의 울음이 필생의 노래임을,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입술에도 노래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물결을 저어가는 구음(口吟)이 내 과업임을 알게 하소서 나의 노동이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지날.. 2019. 4. 7. 성체聖體 성체聖體/강영은 빵이라 부를 때 이것은 존재 한다 누룩과 불화하는 이것 때문에 상처가 아문다 상처를 길들이는 이것 때문에 나는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표정을 지닌다 피와 연합하는 포도주처럼 나의 내면이 뜨거워진다 커다란 다이아몬드의 흠집은 흠집을 깎는 고귀한 감정을 지니게 된다 수축하거나 팽창하는 감정은 존재의 지척(咫尺)을 드러낸다 빵이 되기 위한 밀가루처럼 존재에 선행하는 존재* 뼈에서 떼어낼 수 없는 이것 때문에 나의 식탁은 밀밭이다 나의 굶주림은 밀밭 위로 날아오르는 새떼가 된다 이 하늘에서 저 하늘로 날아다니는 조직의 지체가 된다 만일 이것이 밀가루에 국한된 존재라면 쟁반 위에 놓인 한 잔의 포도주와 한 조각 빵은 식탁이 차려준 한 끼니 식사에 .. 2019. 1. 8. 바벨 바벨/강영은 태초에 이 세상은 하나로 연결된 허리띠였지 높낮이가 없는 지평선은 독립적이고 서열이 없었지 오르막 없는 길이 지루해진 사람들이 한 벌판에 이르렀단다 “자 벽돌을 구워 하늘 꼭대기까지 닿는 탑을 세우고 우리의 이름을 만 천하에 날리자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정복하자”* 그들은 수직의 탑을 세우고 기다랗게 펼쳐진 허리띠를 탑 안에 구겨 넣었지 달리던 말은 사지가 절단 나고 소리치는 말은 재갈이 물려졌지 비명은 크고 순한 눈망울 속에 들어가 말이 없었지 방목당한 말은 허공 속에 흩어져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각이 말발굽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진 건 그 때였단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말 폭탄, 입씨름이 난무하는 난장판을 봐 제 혀를 베어 먹는 말이 보이지? 상처 입.. 2017. 1. 10. 그물과 종달새 그물과 종달새/강영은그물에 걸린 종달새를 본 적 있니? 나는, 그 종달새와 그물 앞에 허공을 놓아 주겠다바람과 햇살이 들락거리며 동아줄이 지닌 감옥을 비워내리라 내 입술은 그물을 찢은 칼처럼 흐느끼리라 종달새에게는 종달새의 자유를, 나에게는 종달새의 하늘을 달라 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종달새가 모든 노래를 풀어 놓으리라 『시인동네』 2016년 봄호, 2017. 1. 10. 양의 귀환 양의 귀환/강영은 대관령에 갔었네 천국의 어린양 같은 얼굴을 하고 하늘 아래 첫 동네, 대관령에 갔었네 양떼목장의 건초 더미는 알맞게 마르고 향긋한 냄새를 풍겼네하느님이 벗어놓은 초록 모자는 산등성이에서 빛나고양떼구름은뒹굴기에 더 없이 부드러운 풀밭으로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몰고 오네발왕산 능선 위 울음 걸쳐 놓은 한 마리 양은 어디로 갔나이 평화로움에 온전히 물든 나에게 묻네길 잃은 양 한 마리(내 안의 양 한 마리)어디로 갔니?2016년 평창시(시와 소금) 2017. 1. 10. 낙엽들 낙엽들/강영은 산행 길에서 한 해의 가장 적막한 나무를 접사한다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문장을 빌어 안부를 전송하는 가지들, 휑하니 허공을 줌업 시킨다 지난 계절은 나에게 너무 많은 낙엽을 요구했다 가장 용감한 낙엽은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낙엽은 여전히 거룩했다 가장 잔인한 낙엽은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낙엽은 퍽이나 온건했다* 내가 놓친 낙엽은 밤이 되어도 돌아올 줄 모르는데 외딴 마을에 도착한 불빛이 이슥토록 꺼지지 않는 것은 누구의 사모(思慕)가 빚어낸 언어일까 한 잎 낙엽이여, 결구 없는 詩여, 네 눈썹에 봄빛이 돋을 때까지 나도 한 그루 겨울나무로 있겠다 * 쉼보르스카의 ‘단어를 찾아서’ 패러디 『미소 문학』 2015년 겨울호 2017. 1. 10. 장미의 이름 장미의 이름/강영은 당신의 총구에서 장미가 피어나네 당신이 이름 붙인 장미를 위해 장미가 피어나네 줄기에 매달린 잎사귀만 보면 줄장민지 사철장민지 분별할 수 없네 담장을 버린 장미가 담장을 넘네 이름을 버린 장미가 경계를 넘네 가시철조망을 넘은 장미를 보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네 이름 따위엔 관심 없는 국경선처럼 당신도 한때 붉게 피는 순수를 사랑했잖아 누구보다 장미를 사랑했잖아 아무리 외쳐도 당신은 장미를 모르는 얼굴 당신은 당신이 만든 장미만을 고집하네 내면의 어떤 장미가 두 손에 피를 묻히고 검은 복면을 두르게 했나 눈구멍이 파인 장미들, 눈구멍을 파는 장미들 색깔이 다른 장미의 내부에서 전쟁이 시작되네 색깔이 같은 장미의 외부에선 붉은 꽃잎이 흩날리네 이제.. 2016. 4. 4. 데드 존 데드 존/강영은 당신의 여름을 폐간합니다 수습이 필요하면 봄은 남겨두기로 하죠, 제주행 비행기를 탄 날, 폭설을 만났네 스팸메일처럼 한 방향으로 몰아치는 눈보라, 내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기내(機內)에서 탑승할 수 없는 메일을 읽은 마음이 쓰러진 울타리네 가을이 오기 전에 여름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들리는 건 다만 그 얘기뿐인데 축생을 가두어 기르는 울타리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지상의 내릴 곳은 보이지 않네 온실 속의 꽃들은 어떡하나, 이미 청탁한 봄을 철회해야 하나, 몇 권의 봄을 궁리해온 사람들은 하느님을 외치네 난분분한 혓바닥만으로 미쳐 날 뛰는 바람과 함부로 돌아다니는 눈의 속살을 설명할 길이 없네 잔치를 향한 신탁의 기도는 멀고 눈에 갇힌 시간을 논의할 지면은 보이지 않네 멀고먼 아마.. 2016. 4. 4. 몰입의 기술 몰입의 기술/강영은 깊이 모를 물보다 깊이 모를 마음이 두려운 당신과 내가 장흥에서 배타고 성산포 가네 장흥에서 성산포로 맨 먼저 달려가는 건 뱃고동 소리겠지만 뱃고동 소리보다 먼저 달려가는 건 물결이겠지만 물결 소리보다 귀가 빠르게 달려가네 귀가 가려운 당신과 내가 물결을 밀고 가네 일출은 먼데, 일출은 먼데 낙담하는 물결이 배를 밀고 가네 물결에 밀리는 건 당신과 나 뿐인데 모르고 한 맹세는, 쉽게 한 약속은 방향을 바꾸지 않네 입장을 바꾼 당신과 내가 세상의 모든 바다에 닿네 잇몸으로 핥는 파도의 말씀이 순해지네 옛날에, 옛날에 흘러들었던 항구, 도무지 헤어질 수 없는 항구, 물결소리를 담은 귀가 항구를 낳네 물결에 몰입해온 바다가 낯을 바꾸네 장흥에서 성.. 2016. 4. 4.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