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상냥한 시론詩論

장미의 이름

by 너머의 새 2016. 4. 4.

장미의 이름/강영은



당신의 총구에서 장미가 피어나네
당신이 이름 붙인 장미를 위해 장미가 피어나네 ​​
줄기에 매달린 잎사귀만 보면 줄장민지 사철장민지​
​분별할 수 없네

​담장을 버린 장미가 담장을 넘네
이름을 버린 장미가 경계를 넘네
가시철조망을 넘은 장미를 보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네

​이름 따위엔 관심 없는 국경선처럼
당신도 한때 붉게 피는 순수를 사랑했잖아
누구보다 장미를 사랑했잖아
아무리 외쳐도 ​당신은 장미를 모르는 얼굴
​당신은 당신이 만든 장미만을 고집하네

​내면의 어떤 장미가 두 손에 피를 묻히고
​검은 복면을 두르게 했나
눈구멍이 파인 장미들, 눈구멍을 파는 장미들

색깔이 다른 장미의 내부에서
전쟁이 시작되네​
색깔이 같은 장미의 외부에선​ ​
붉은 꽃잎이 흩날리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영락한 이름 뿐*

장미는 당신을 파괴하지도 구원하지도 않는데
가시가 피워 올린
신(神)의 이름이 피를 흘리네
모가지를 떨군 장미의 이름은
차마 말할 수 없네


* 움베르토 에코 의 소설 '장미의 이름' 중에서


『공시사』 2016년 1월호 부분 수정


'상냥한 시론詩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의 귀환  (0) 2017.01.10
낙엽들  (0) 2017.01.10
데드 존  (0) 2016.04.04
몰입의 기술  (0) 2016.04.04
아일란 쿠르디외  (0) 2016.0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