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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시론詩論

데드 존

by 너머의 새 2016. 4. 4.

데드 존/강영은



당신의 여름을 폐간합니다 수습이 필요하면 봄은 남겨두기로 하죠, 제주행 비행기를 탄 날, 폭설을 만났네

스팸메일처럼 한 방향으로 몰아치는 눈보라, 내릴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기내(機內)에서 탑승할 수 없는 메일을 읽은 마음이 쓰러진 울타리네

가을이 오기 전에 여름이 사라질지 모릅니다, 들리는 ​건 다만 그 얘기뿐인데 축생을 가두어 기르는 울타리는 높은 지위에 오르고 지상의 내릴 곳은 보이지 않네

온실 속의 꽃들은 어떡하나, 이미 청탁한 봄을 철회해야 하나, 몇 권의 봄을 궁리해온 사람들은 하느님을 외치네

난분분한 혓바닥만으로 미쳐 날 뛰는 바람과 함부로 ​돌아다니는 눈의 속살을 설명할 길이 없네 잔치를 향한 신탁의 기도는 멀고 눈에 갇힌 시간을 논의할 지면은 보이지 않네

멀고먼 아마존, 섬광이 번쩍이는 밀림에선 폐간되는 나무들로 죽은 언어가 쌓인다는데 나무가 떨군 활자며 문장을 어떤 눈이 먼저 수록했나

꽃과 동시에 열매를 맺는 ​나무의 모양을 원하면서도 도끼날이 박힌 나무의 실상을 몰랐던 눈의 오독이 비행기 날개처럼 벌목지대로 돌아가네

지상의 어떤 나무에게도 목숨 내건 봄이 있었네 봄이라는 혁신호가 있었네

마른 수피에 새 살이 돋는 것이 혁신이라면 그대여, 정치도 역사도 어떤 학문도 구태의연한 페이지는 폐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대에게 보낸 봄을 철회하네 눈 덮인 모든 지경을 첫 페이지로 삼아주시게 아직 싹 트지 않은 봄의 순결한 발자국를 찾아주시게

무성한 나무 그늘이 이파리를 다 떨군다 해도 나는 브라질호두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겠네



웹진 시인광장』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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